•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4. 역사학
  • 2)<동명왕편>의 역사인식
  • (2)<동명왕편>에 나타난 역사의식

가. 전통적 신이사관의 추구

 <동명왕편>은 이규보 개인의 창작이 아니라 민간전승으로 내려온 설화에다≪舊三國史≫ 東明王本紀를 토대로 쓴 서사시이다. 그 구성은 동명왕 탄생 이전의 계보를 밝힌 서장과, 그의 출생으로부터 종말까지를 묘사한 본장 및 동명왕을 계승한 유리왕의 즉위에 관한 종장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을 ≪三國史記≫의 동명왕에 관한 기록과 비교해 보면, 우선<동명왕편>에서는 ≪삼국사기≫에 생략된 神異事가 널리 강조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규보는<동명왕편>에서 ≪구삼국사≫에 보이는 동명왕의 怪力亂神의 내용을 삭제한 金富軾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김부식은 유교의 합리적인 도덕윤리를 역사의 척도로 설정함으로써0468) 李基白,<三國史記論>(≪文學과 知性≫ 7­4, 1976), 62∼73쪽. 믿을 수 없는 비합리적인 신이한 일은 삭제해 버렸다. 뿐만 아니라 김부식이 삼국의 선조에 대하여 ≪삼국사기≫에서 신라인은 小昊 金天氏의 후예이므로 金氏라 하였고, 고구려도 高辛氏의 후예이므로 高氏라 하여 모두 중국 성인의 후예로 상정한 것을0469)≪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義慈王 論曰. 반박했다. 한편 解慕漱를 天帝의 아들로, 그리고 동명왕을 천제의 손자로 인식한 ≪구삼국사≫의 인식에 대하여 이규보는 ≪구삼국사≫도 國史이므로 허탄한 것을 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김부식이 이 사실을 크게 축약하였으므로 자기가 마땅히 기록해 두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그는 동명왕에 대한 신이는 사람을 현혹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로 ‘創國의 神迹’이라 하고, 荒淫하고 奇誕스러운 일인데도 오히려 노래로 읊어서 후세에 보이고 있는 白樂天을 예로 들고 있다. 즉 이규보는 동명왕에 관한 기술을 통한 고구려의 창업을 성스러운 것으로 하여 이것을 오래도록 보존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이규보는 고구려 시조의 이야기가 중국 개국시조의 神異事에 비하여 부족함이 없음을 나타냈다. 이러한 의도에서 그는 중국 제왕들의 신이한 탄생과 업적을<동명왕편>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에서 예시하고 있으며, 아울러 천제 → (천제의 아들인)해모수 → (천제의 손자인)동명왕으로 연결되는 동명왕설화를 음율화한 것이라 생각된다.

 <동명왕편>에서 추구하고 있는 이러한 비유교적인 양상은 의종대의 金寬毅의 저술에서도 나타나는데, 그의 ≪編年通錄≫은 그 서술에 있어서 유교적 색채가 전혀 없음이 지적된 바 있다.0470) 河炫綱,<高麗 毅宗代의 性格>(≪東方學志≫26, 1981), 14쪽. 이것은 의종 때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즉 정치적으로 문신세력에 반대하는 기운이 사상적으로는 비유교사상의 강조로 나타나게 된 것이며, 이러한 경향은 무신란 이후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신들은 대체로 불교·음양설·도참설·토착신앙 등을 신봉하였으므로 체질적으로 반유교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규보도 사상면에서 제약이 없는 당시의 신앙형태를 두루 수용하였음을 그의 작품세계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이규보가<동명왕편>을 쓰면서 儒敎史觀에 입각한≪삼국사기≫를 외면하고 神異史觀에 입각한 ≪구삼국사≫를 존중하게 되었는가를 이러한 시대적 맥락 속에서 알 수 있다. 즉 무신집권 이후 고려인들의 역사인식체계가 유교사관에서 신이사관으로 전환한 것이라 생각된다.

 <동명왕편>에 나타난 이와 같은 신이사관은 그 후 一然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삼국 시조의 탄생설을 조금도 괴이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이규보가 동명왕의 신이한 사적을 신비하고 성스럽게 간주한 것과 동일한 입장인 것이다. 그리고<동명왕편>에 나타난 고대 전통에로의 복귀는 우리의 고대사를 중국이 아닌 天과 직결시킨 일연의 역사의식과 그 궤를 같이한다고 보여진다.

 이들이 이처럼 신이를 표방하고 나선 이유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유교의 合理主義史觀에 대한 비판의 뜻으로 보인다. 유교적 모화사상은 제도와 문화면에서 자기 나라의 것을 열등하게 여기고 중국의 것을 흠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편찬목적과 성격이 그러했기 때문에 이규보가 그 오류를 시정하기 위하여 고구려신화를 주장했고, 일연도 그 첫머리에 단군신화를 실어 고조선의 인식에서 한국사의 첫 출발점을 찾고 있다고 할 수 있다.0471) 金哲埈,<高麗 中期의 文化意識과 史學의 性格>(≪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427쪽. 이와 같이 역사적 신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우리의 역사를 자주적인 입장에서 새롭게 이해하려는 노력이었으며, 주체적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 동명왕의 신이사를 민족혼의 근원으로 파악한 전통적 신이사관은<동명왕편>을 특징지워 주는 역사의식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규보가 비유교적 신이사관만을 고수한 것은 아니다. 그의 활동을 일관되게 뒷받침해 준 사상 중의 하나는 유교였으며, 그는 儒子로서 입신하여 유교적인 통치의 구현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또한 그는 무신정권에 대하여 거부하기 보다는 깊이 참여하였으며, 일생 동안 문필활동을 통하여 치국의 경륜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 가운데 이규보는 治者, 특히 군왕의 윤리를 엄격히 밝히고 있다. 그것은<동명왕편>을 다음과 같이 끝맺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알았노라 守成君은 大小事에 조심하고 寬仁으로 왕위를 지키고, 예의로서 백성을 교화하여 길이길이 자손에게 전하여 나라살림 무궁하리.

 이렇듯 그는 守成君은 관인과 예의로 나라를 다스려 길이 전해야 한다는 정치윤리를 제시함으로써 후세에 권계를 삼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동명왕편>을 지은 이듬해의 작품인<開元天寶詠史詩>0472) 李奎報,≪東國李相國集≫전집 권 4.에서도 국정의 모든 책임은 군왕에게 달려 있다고 하면서, 후세의 역사적 사건을 대조해 보임으로써 역사의 교훈으로 삼으려고 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고찰을 통하여 이규보가<동명왕편>을 쓴 명종 말기에 역사적 설화성을 내포한 시를 지음으로써 국가적 차원의 민족의식을 표출하려 하였으며, 동시에 신성한 창업의 계승과 발전에는 합리적인 윤리관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합리적 윤리관을 강조한 것은 ≪삼국사기≫의 편찬목적 가운데 자기 역사를 재인식시키고 역사사실의 기록에서 권계를 찾으려 했던 점0473) 申瀅植,≪三國史記 硏究≫(一潮閣, 1981), 357쪽.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러므로 이규보의<동명왕편>이 단순히 ≪삼국사기≫적 역사의식의 반발에서 나왔다고0474) 金哲埈, 앞의 글, 387∼427쪽. 하기보다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찬술했던 인종대와 <동명왕편>이 지어진 명종 말기의 역사의식의 상이점에서 파악해야 될 것이다.

 김부식이 활약하던 인종대의 시대적 환경을 고려해 볼 때, 그가 ≪삼국사기≫에서 신이사를 배제하고 유교의 합리적인 도덕윤리를 강조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0475) 李基白, 앞의 글, 862∼873쪽. 그러나 유교사관에 입각한 경우에 나타나는 자기 전통문화의 빈곤화와 축소화를 감안할 때, 이규보는 이러한 성격을 지닌 유교사관보다는 오히려 전통에의 복귀라는 신이사관에 역점을 두어 국민들에게 자부심을 고취시키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역사의식의 양상을 무신란 이후 무신들의 지배로 전환되어 가는 시대적 맥락 속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규보의 전통적 신이사관은 그 후 일연에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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