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4. 역사학
  • 2)<동명왕편>의 역사인식
  • (3) 고구려 계승의식의 표방

(3) 고구려 계승의식의 표방

 고려왕조는 고구려적 이념과 신라적 전통이라는 이중적 성격에서 출발하였다. 따라서 고려 전기의 역사인식체계에는 고구려 계승의식과 더불어 신라의 계승이라는 이원적 계승의식이 유지되어 왔다.0476) 李佑成,<三國史記의 構成과 高麗王朝의 正統意識>(≪震檀學報≫38, 1974), 204∼206쪽.

 그러나 명종 말기에 이르러 삼국의 시조 중에서 고구려 시조의 영웅담이 이규보에 의하여 재현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동명왕편>에 내포되어 있는 고구려 계승의식에 대하여 검토하고자 한다.

 고려왕조가 국호를 통하여 내세웠던 고구려 계승의식은 고려의 건국 당시 松岳을 중심으로 하는 옛 고구려영역 주민들의 고구려 지향적인 토착의식에 기초한 것이었다.0477) 金光洙,<高麗朝의 高句麗 繼承意識과 古朝鮮 認識>(≪歷史敎育≫43, 1988), 93쪽. 그 후 이러한 경향은 고려의 창업 이래 줄곧 추진되어 온 고구려 故土의 수복에 대한 희원 및 발해의 흡수, 徐熙와 거란과의 담판0478)≪高麗史≫권 94, 列傳 7, 徐熙.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高麗圖經≫과 ≪宋史≫등에 보이는 “高麗本曰高句麗”0479) 徐 兢,≪高麗圖經≫권 2, 世次 王氏.라는 기사로도, 외국에서는 대체로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자 내지 동일왕조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려왕조에서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에 대한 봉제사를 행했다는 사실이 이러한 이해를 더욱더 확인시켜 주고 있다. 당시 서경에는 동명왕의 祠宇가 있었으며, 이미 국초부터 그에 대한 일정한 제례의식이 마련되었다.0480) 金光洙, 앞의 글, 96쪽. 뿐만 아니라 개경의 東神祠에 봉안된 東神聖母가 朱蒙의 母인 河伯女였음을0481) 徐 兢,≪高麗圖經≫권 17, 祠宇 東神祀. 보아도 고구려 國母神信仰이 그대로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까지 계속되어 온 동명왕에 대한 숭앙은 전통적인 자기문화에 대한 자각과 신뢰가 바탕이 된 것이며, 고려인의 고구려 계승의식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정권을 담당하게 된 인종대의 시대적 상황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삼국사기≫가 편찬될 무렵에는 신라의 문물과 전통을 긍지로 지녀온 문신귀족이 정국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김부식은 전통적인 자주의식마저 잔해하는 독선을 자행하였다.0482) 李佑成, 앞의 글, 205∼206쪽. 이러한 김부식의 태도는 역사인식의 체계가 인종대에 이르러 신라 계승을 표방하는 방향으로 바뀌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당시에는 현종의 金氏出自說이 나올 만큼 신라 계승의식이 팽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고려 전기의 역사인식은 무신란을 거치면서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을 명종대에 들어와서 지식인을 대표한다고도 할 만한 이규보의<동명왕편>에서 볼 수 있다. 그는 ≪구삼국사≫ 동명왕본기를 읽고 황당기괴한 것으로 간주했던 동명왕의 이야기를 만세에 길이 남을 아름다운 일로 재인식하게 된다. 이규보는<동명왕편> 서문에서 고구려 시조설화를 ‘幻’이 아니고 ‘聖’이며, ‘鬼’가 아니고 ‘神’으로 깨닫게 되는 자신의 인식상의 전환을 밝히고 있다.0483) …亦初不能信之 亦以爲鬼幻 及三復耽味 漸涉其源 非幻也乃聖也 非鬼也乃神也.

 이것은 무인들이 집권한 이후 그 이전의 문신귀족들이 추구했던 신라 계승의식에 대신하여 고구려 계승의 역사인식이 표방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이규보는 이러한 시대조류에 부응하여 무인들의 체질과 어울리는 웅대한 기상의 고구려 시조의 영웅담을 시로 지어 고구려 계승의식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가 신라 중심의 ≪삼국사기≫와 달리 고구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구삼국사≫를<동명왕편> 저술의 근거문헌으로 선택한 이유를 나타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규보는 자신의 문집에서도 자국의 강토를 널리 확장하고 싶은 염원을 토로하고 있으며, 東明舊壤을 회복하고자 한 태조의 이념을 들어서 호국의 간절한 심정을 나타내고 있다.0484) 卓奉心,<李齊賢의 歷史觀>(≪梨花史學硏究≫17·18, 1988), 342쪽. 이것은 고려가 건국한 이래 꾸준히 추구해 온 東明故土의 수복에 대한 열망이 이규보에까지 이어져 왔음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그가<동명왕편>에서 표방한 고구려 계승의식과도 상통하는 바가 있으며, 이규보 스스로 동명왕의 이야기가 백성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음을 밝힌 것은 명종대의 역사인식의 동향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이것과 연관지어 ≪삼국사기≫가 遼·金의 국가적 위협을 목도한 경험의 소산이었음은 밝혀진 바 있다.0485) 申瀅植, 앞의 책, 8쪽.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적극적인 영토회복의 의사표시가 없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극복이<동명왕편>의 기본자세가 된 것은 아닐까 한다. 즉 이규보는 요나 금과의 비굴한 외교관계 아래서 살아가면서 신라 위주의 ≪삼국사기≫적인 나약한 입장보다는 요동에 웅거했던 고구려의 정신을 표방함으로써 12세기 전반기의 역사의식을 극복하려 했으리라 생각된다.

 이상에서<동명왕편>에 나타난 역사의식을 자아의식에 입각한 전통적 신이사관과 고구려 계승의식이라는 두 측면에서 고찰해 보았다. 이규보가<동명왕편>을 저술한 동기에 대하여 스스로 “천하로 하여금 우리 나라가 본래 성인이 살던 곳임을 알게 하려고 한다”고 밝히고 있듯이, 그는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 우리 나라가 본래 성인의 나라임을 밝혀서 국민들로 하여금 민족적 자부심을 갖도록 했던 것이다.0486) 그러나 이것은 고구려의 시조만을 韻律化한 것이므로 아직까지 부족적·지역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李佑成, 앞의 글, 1975, 176쪽).

 13세기에 들어와 몽고의 침입을 받게 되면서 국사에 대한 인식이 크게 확대되어 갔으니, 강대한 이민족의 침입은 단군을 민족 공동의 시조로 하는 역사의식을 낳게 하였으며, 우리 고대사회의 역사적 변천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일연은 우리의 고대사를 중국이 아닌 天과 직결되는 역사로 파악하게 되었고, 李承休는 자국의 역사가 중국과 구별되는 생활영역에서 진행되었음을 밝히게 되었다.

 이규보는 막연한 국가의식을 내세운 ≪삼국사기≫의 인식체계보다는 실질적인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함으로써 고려의 역사적 위치를 확립하고자 했다. 그리고<동명왕편>에 나타난 전통적 신이사관과 天에의 연결인식은, 그 후 일연과 이승휴에게 전승되어 우리 역사의 독자성을 강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규보의<동명왕편>이 지니는 사학사적 의의를 찾아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규보는 민족사의 주체적 창조를 위하여 동명왕 1인에 한정하여 시로 노래하였던 것이 일연에 계승되어서는 삼국 전체로 확대되었으며, 이승휴는 민족의 시조로서 단군신화의 내용을 구체화시켜 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규보가 인용한 ≪구삼국사≫ 동명왕본기가<동명왕편>의 分註로 2,200자 정도 남아 있는데, 이 단편적 逸文이 ≪구삼국사≫의 현존하는 전문으로 사료로서의 원전적 가치를 지닌 점이 주목되고 있다.

<卓奉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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