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4. 역사학
  • 4)≪제왕운기≫의 편찬
  • (1)≪제왕운기≫편찬의 배경과 동기

(1)≪제왕운기≫편찬의 배경과 동기

 ≪帝王韻紀≫는 李承休가 충렬왕 13년(1287)에 제작한 역사시이다. 그 구성은 상·하 2권으로 되어 있다. 상권에는 序에 이어 盤古, 三皇五帝, 夏·殷·周 삼대와 秦·漢을 거쳐 宋·金·元의 흥기에 이르기까지의 중국역사의 요점을 7言으로 노래하고 있다. 하권은 東國君王開國年代와 本朝君王世系年代의 2부로 나누었다. 전자에서는 序에 이어 地理紀, 檀君의 前朝鮮, 箕子의 後朝鮮, 衛滿의 찬탈과 漢四郡, 그리고 삼한을 계승한 신라·고구려·백제의 삼국과 후고구려·후백제, 그리고 발해의 고려에의 통합에 이르기까지는 다시 7言古詩로 노래하였다. 후자에서는 고려의 역사로서 王建 선조의 世系說話에서부터 이승휴 당대인 충렬왕대까지 읊고 있다.

 그런데 상·하권의 각각에는 시의 사이사이에 註를 첨가하여 역사의 줄거리를 이해하기 쉽도록 배려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각종 역사서들을 인용하여 그 근거를 밝혔고, ‘史臣曰’의 형식으로 史論까지 덧붙이고 있어0524) 상권에는 ‘史臣曰’형식으로 전개되는 6개의 사론이 있고, 하권에도 史臣曰 自古聖人 不係本宗 而以德立姓者尙矣라고 한 사론이 있다. 단순한 문학작품으로 보다는 역사서로서의 가치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단지 시의 형식을 빌린 것은 이 작품이 대중에게 쉽게 불려질 수 있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0525) 鄭求福,<고려시대의 역사의식>(≪傳統과 思想≫ 4,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0), 211쪽. 역사를 시로 읊는 서사시의 등장은 고려 후기 역사서술의 한 특징으로서, 그러한 경향은 역사서술을 제약하는 시대적 요인 즉 무신정권의 횡포와 원의 간섭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소산으로 지적되고 있다.0526) 金相鉉,<高麗後期의 歷史認識>(韓國史硏究會 編,≪韓國史學史의 硏究≫, 乙酉文化社, 1985), 86∼89쪽.

 이승휴가 살았던 시기도 바로 무신집권 말기에서 몽고침입 초기인 13세기 전 시기에 해당된다. 그는 星州 加利縣출신으로 되어 있으나 그의 행적의 대부분은 외가가 있던 강원도 三陟에서 발견된다. 그의 가계도 이승휴 이전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고, 삼척 頭陀山 계곡의 초가집에서 몸소 경작했던 생활로 보아 한미한 가문 출신의 신진사대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0527)≪高麗史≫권 106, 李承休傳과≪新增東國輿地勝覽≫ 권 28, 星州條를 보면 加利縣人 小孤力學 高宗朝登第라고 되어 있고≪典故大方≫ 권 1, 萬姓始祖編에는 加利李氏 始祖 李承休로 되어 있다.

 그는 사상적으로 유교 외에 불교와 도교까지도 섭렵했고 특히 만년에는 불교에 심취하여≪內典錄≫이라는 불교관계의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현존하지 않으며≪帝王韻紀≫와≪動安居士文集≫에 수록된 약간의 시문이 남아 있을 뿐이다.0528)≪動安居士集≫은 雜著 一部와 行錄 四卷 등이다. 공민왕 8년(1359)에 次子 衍宗이 엮어 펴냈다는 이 至正本이 1939년 朝鮮古典刊行會에서 영인되었다.

 고종 39년(1252)에 29세의 늦은 나이에 등제하였으나 그 후에도 10여 년간이나 은둔해 있다가, 원종 5년(1264)에서야 비로소 李藏用·柳璥의 천거로 慶興府 書記로서 관직에 복귀되었고, 충렬왕대부터는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하게 된다. 그 후 그는 두 차례에 걸친 元使行을 통해 중국과 고려의 문화적 차이를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귀국 후에는 곧 閤門祗侯·監察御史와 右正言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 어사와 정언의 대간직을 통해 현실비판의 안목을 길러 三別抄의 亂이 일어났을 때는 軍에 물자가 공급되지 않아 백성에게서 함부로 거두는 사태가 일어나고, 빈번한 축조사업으로 백성의 생활이 더욱 어렵게 되었음을 상소했다가 파직될 뻔한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승휴가 다시 楊廣·忠淸道按察使로 부임했을 때는 지방행정의 문란과 민폐를 직접 목격하고 부정한 관리 7인을 탄핵했다가 원한을 사서 좌천되기도 했다. 다시 殿中侍史로 등용되었으나 충렬왕 6년에 왕의 실정과 附元輩들을 비판하는 상소를 했다가 다시 파면되어 은둔하게 되었다. 그리고 7년 후 왕에게 올리기 위해 제작한 것이≪제왕운기≫이다.

 이처럼 그는 16년간의 짧은 정치활동 중에서도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력을 견지하고 惠政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바로 그같은 정치성향 때문에 충선왕이 친원세력가들의 횡포를 시정하기 위한 개혁정치를 실시하였을 때 그 주체세력으로 발탁되게 되었던 것이다.0529) 충선왕은 1298년 詞林院을 설치하여 개혁의 중추기관으로 삼고 신진사류를 추진세력으로 삼았다. 이 때 文才와 吏用의 자질이 당대에 비할 자가 없으며 忠諫의 기질과 절개까지 겸비하였는데 불행히 때를 만나지 못해 산속에서 헛되이 지낸다고 하여 詞林侍讀左諫議大夫充史館修撰官知制誥를 제수하여 불러들였다. 그러나 이미 李承休 나이 75세였으므로 연로함을 이유로 사양하였다(≪高麗史≫ 권 106, 列傳 19, 李承休 참조). 충선왕의 개혁정치가 비록 실패했으나 기존의 권문세족 중심의 체제를 부인하고 신진사대부에 의한 정치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0530) 閔賢九,<高麗後期 權門世族>(≪한국사≫ 8, 국사편찬위원회, 1974), 47쪽. 그러므로 이승휴의 짧은 기간에 걸친 정치활동은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장차 역성혁명의 주체가 될 신진사대부계층의 현실인식과 그 개혁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이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으며 그의 역사관을 검토하는 이유도 바로 이 점에 있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이승휴의 고난스러웠던 정치활동에서 얻은 현실인식은≪제왕운기≫ 찬술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스스로≪제왕운기≫를 제작하게 된 문제의식이 고려 당대의 현실에서 비롯되었고, 그것은 孔子가≪春秋≫를 지은 의도와 같다고 했던 것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0531) 李承休,≪帝王韻紀≫권 하.

 공자가≪춘추≫를 저술한 목적이 亂臣賊子를 징계하려 했던 것이었다면, 이승휴가 경계하고자 했던 상황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그가 은둔하기 직전에 올린 상소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0532)≪高麗史≫ 권 106, 列傳 19, 沈言昜.
≪高麗史節要≫ 권 25, 충렬왕 6년.
劉璟娥,<李承休의 生涯와 歷史認識>(≪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554쪽에서 그 10가지의 상소 내용을 정치·지방행정·경제·사회면으로 분류하여 도표로 작성해 놓았다.
즉 그가 은둔하기 직전의 현실은 원의 비호 아래 등장한 세력가들이 국정을 좌우하였으므로 왕권이 실추되고 국가재정이 궁핍해졌다.0533) 李承休가 올린 상소 중에 尹秀에 대한 비판이 있는데 윤수는 鷹坊을 통해 출세한 부원세력가이다. 또 그의 비판대상이 된 別監·忽只·鷹坊도 모두 元의 요구에 의해 설치된 기관이었다. 게다가 빈번한 토목공사와 기근으로 인해 민생은 더욱 곤궁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왕은 이런 현실을 외면한 채 사냥과 연회만을 일삼고 있는 상황이었다.0534) 충렬왕의 실정에 대한 기사는≪고려사≫에 산재해 있으나 특히 동왕 世家 말미의 史臣贊에도 언급되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제왕운기≫를 펴낸 구체적인 의도는 첫째 부원배들의 횡포에 대항하여 왕실의 권위와 정통성을 내세우려 했던 것이며,0535) 李承休,≪帝王韻紀≫, 進呈引表. 둘째는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경계할 것을 왕에게 깨우쳐0536) 李承休,≪動安居士集≫, 雜著一部, 寄晉陽牧伯李尙書諱㦃書. 궁극적으로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국가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가치관을 제시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帝王韻紀≫의 서술목적이 부원세력가들을 응징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 이면에는 원에 대한 저항의식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元使行을 통해 당시 세계 대제국으로 발전해 가고 있던 원의 인적·물적 자원을 목격한 그로서는 직접적인 대항을 선언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원의 정치적 간섭은 일단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문화와 전통만은 보존·유지하기 위한 역사서술이 필요했던 것이며, 그것이 “耳目에 환히 익혀져 風詠으로 퍼지게 되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수단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제왕운기≫의 구성도 2권으로 분리하여 중국사와 대등한 우리 역사를 노래했고 강역도 중국과 구별되는 영역임을 밝히고 있다.0537) 李承休,≪帝王韻紀≫, 東國君王開國年代에서는 “遼東別有一乾坤 斗興中朝區以分”이라 했고, 鄭求福,<高麗後期의 歷史認識과 敍述>(≪韓國史論≫ 6, 國史編纂委員會, 1979), 53쪽에서도 그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또한 우리 민족은 중국인과 다른, 동일한 조상의 다 같은 후손이라는 동족의식을 가다듬게 되었고, 민족의 시조로서 단군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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