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4. 역사학
  • 5) 민지의≪본조편년강목≫
  • (1)≪본조편년강목≫의 편찬과 그 성격

(1)≪본조편년강목≫의 편찬과 그 성격

 ≪本朝編年綱目≫은 충숙왕 4년(1317) 원로대신 閔漬에 의해 찬진된 사서로, 국조 元德大王(文德大王, 이름은 損乎述 또는 寶育)으로부터 고종 때까지의 사실이 42권에 나뉘어 편찬되었다. 원래 이 책의 편찬은 충숙왕 원년 “태조 이래의 실록을 약찬하라”는 상왕인 충선왕의 뜻에 따라 민지와 權溥 두 사람이 맡게 된 것이었지만, 그 후 사정상 민지 혼자서 이 일을 맡아 3년 후인 충선왕 4년≪본조편년강목≫이라는 이름으로 내놓게 되었다.0563)≪高麗史≫권 107, 列傳 20, 閔漬.

 ≪본조편년강목≫은 우리 나라 최초의 綱目體 사서로서 주목되어 고려 후기를 통하여 중시되었으며, 조선 초에≪高麗史≫를 편찬하는데 크게 쓰였다. 이 책은 이미 편찬되어 있던 역대실록이 기본자료로 되었지만 그 밖에 金寬毅의≪編年通錄≫과≪碧巖錄≫ 등의 禪書를 인용했고, 여러 가지 所傳도 인용하였다고 한다.0564) 閔賢九,<閔漬와 李齊賢>(≪斗溪李丙燾博士九旬紀念韓國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7), 349쪽. 그 성격은 이보다 앞서 민지 등에 의해 편찬된≪世代編年節要≫가 聖骨將軍 虎景大王으로부터 원종 때까지를 다룬 것에 비하여, 보다 사실에 가까운 국조 원덕대왕을 그 서술의 상한으로 잡고 또 원종대보다 객관적 서술이 가능한 고종대를 하한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그 객관성에 있어 진일보한 사서라 하겠다. 물론 이 책이 전해지고 있지 않아 완전한 것을 알 수는 없지만 고려왕실의 선대세계를 기록한≪고려사≫권 1의 高麗世系에 인용되어 있는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설화적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지적하였듯이 민지는≪본조편년강목≫의 편찬에 앞서≪세대편년절요≫를 편찬한 바 있다. 민지는 충렬왕 25년(1299) 9월에 同修國史에 임명되었다. 이 때 監修國史에는 宋玢이, 修國史에는 安珦이 함께 임명되었는데 민지가 鄭可臣의≪千秋金鏡錄≫을 증수하라는 왕명을 이 무렵에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왕명을 받고도 사서편찬의 여가를 얻지 못하던 민지는 훗날 권부와 더불어 교열하고 편찬해서≪세대편년절요≫라고 이름했다.0565)≪高麗史≫권 107, 列傳 20, 閔漬. 아마도 충선왕 즉위년(1308)쯤에 이 사서의 편찬이 완료되었을 것이다. 이 해 12월에는 賀正使 趙璉으로 하여금≪세대편년절요≫와≪천추금경록≫을 원에 가져가게 했다는 사실에서0566)≪高麗史≫권 33, 世家 33, 충선왕 후원년 12월 무오. 확인할 수 있다.

 민지는 7권의≪세대편년절요≫와 함께 世系圖를 그려 아울러 바쳤다. 민지의 묘지명에 의하면 그는 역대의 치란을 도표로 나타냈다고 한다. 즉 충선왕이 세자로 있을 때 민지는 왕으로 하여금 앞서간 시대의 사실을 간명히 이해하도록 왕조의 변천, 立都立號의 내용, 그 치란의 상태 등을 하나의 도표에 여러 가지 색을 사용하여 편람하기 쉽게 제작하니 충선왕이 이를 매우 귀중하게 여겼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민지의 이 세계도에 대해서는 하나의 독립된 저작인 歷代圖로 이해하는 경우와0567) 閔賢九, 앞의 글, 344쪽.≪세대편년절요≫에 부록되어 있던 세계도였을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로 나뉘어 있다.0568) 許興植,<閔漬의 詩文과 史學>(≪敎育硏究誌≫30, 慶北大, 1988), 65쪽.

 한편 충숙왕 원년(1314) 정월에 민지와 권부에게 태조 이래 실록의 略撰을 명한 바 있다.0569)≪高麗史≫권 34, 世家 34, 충숙왕 원년 정월 을사. 이 때의 약찬실록을≪세대편년절요≫와 같은 내용으로 추측하는 견해가 있는데, 편찬자가 같고 편년체로 절요하면 약찬실록이 되기에 같은 내용일 수 있다는 것이다.0570) 許興植, 앞의 글, 65쪽. 그러나≪세대편년절요≫는 이미 충렬왕 34년(1308) 12월 이전에 완성되어 있었으므로 충숙왕 원년에 쓰여진 약찬실록과≪세대편년절요≫는 별개의 사서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충숙왕 4년에 찬진된≪본조편년강목≫이 42권에 이르는 방대한 사서였으나 이 책 역시 빠진 부분이 많아 충목왕 2년(1346) 왕명에 따라 李齊賢·安軸·李穀·安震·李仁復 등에 의해 증수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전해지지 않고 있어 그 보완과 수정의 정도는 알 수 없다.

 ≪본조편년강목≫은 그 서명을 통해 편년체와 강목체를 합친 형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마도 역사적인 여러 사실을 연대순으로 서술하되, 그 중에서도 더욱 중요한 것과 정통에 합당하는 것을 綱으로 설정하고 그에 따른 내용이나 구체적인 사실 등을 目으로 설정하여 기술했다고 생각된다. 李穡이 “국사를 윤색하여 강령과 조목을 나눈 일은 실로 일세에 독보였다”0571) 李 穡,≪牧隱文藁≫권 8, 黙軒先生文集序.고 평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강목체는 찬자의 주관이 강하게 반영되고 정통론이 강조되는 서술체제이다. 이렇게 민지가 正名論·正統論이 강한 강목체로 역사를 서술한 것에는 당시 瀋王黨의 책동을 견제하면서 고려의 정통성을 강조하려 했던0572) 許興植, 앞의 글, 66쪽. 그가 살다 간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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