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4. 역사학
  • 5) 민지의≪본조편년강목≫
  • (2) 민지의 생애와 기타 저술

(2) 민지의 생애와 기타 저술

 ≪세대편년절요≫와≪본조편년강목≫을 편찬한 민지는 문인학자로서 뿐 아니라 관료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따라서 그의 생애는 정치외교가로서의 활동과 문인학자로서의 역할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0573) 閔漬의 생애와 관력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高麗史≫권 107, 列傳 20, 閔漬傳과 李齊賢이 쓴<有元高麗國推誠守定保理功臣三重大匡判僉議府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上護軍驪興府院君贈諡文仁閔公墓誌銘幷序>참조.

 무신집권기에 가문을 일으킨 驪興閔氏 閔令謨의 5대손인 민지는 18세인 원종 7년(1266) 과거급제 후 중견관료로서의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고 충렬왕 말기에는 재상의 반열에까지 올라 충선왕 즉위년 僉議政丞으로 치사하였으며 이 때≪본조편년강목≫을 편찬하였다. 민지는 충렬왕 때 대표적 외교문서는 그에 의해 작성되었다고 할 정도로 문한관으로서 외교문서의 작성과 사서편찬 등의 일을 도맡았다. 더구나 원에 상주하기 곤란한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표문을 지어 고려 관민의 뜻을 간절히 전하기도 하였다.0574) 閔賢九, 앞의 글, 342쪽. 예를 들면 충숙왕 10년 吐蕃으로 유배된 충선왕의 귀환을 위해 쓴<請還太尉王表>와<獻都堂書>가 바로 그것이다.

 민지의 활동은 충렬왕대에 두드러지며, 충선왕과의 관계는 왕이 세자였을 때 그가 사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립했던 것 같다. 그는 충선왕이 세자일 때인 충렬왕 16년(1290)에 鄭可臣과 함께 세자를 수행하여 원에 가 있을 때, 마침 원 조정에서 交趾에 대한 용병을 논의하는데 참여하여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즉 군사를 동원하여 정벌하기보다는 사신을 보내 항복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하여 세조의 공감을 얻고 翰林直學士의 직을 받았으며, 원이 두 번이나 실패한 일본정벌을 결행하려 하자 충렬왕 9년 왕을 수행하여 원에 가서 일본원정의 불필요함을 역설하여 전함 건조를 중지토록 하기도 했다. 이처럼 민지는 외교적으로도 원의 交趾 및 일본에 대한 정벌계획을 중지시키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으며, 또 앞서 밝혔듯이 만년에는 토번으로 귀양가 있던 충선왕을 방환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기도 했다.

 증손 子復에 의해 그의 시문을 모은≪黙軒先生文集≫이 간행되기는 하였으나 현재는 이색이 지은 그 서문만 전해지고 있다. 이색은 묵헌의 문장을 평해 “마치 물이 쏟아져 내리듯 거침이 없어 배우는 이가 지금까지도 으뜸으로 삼는다”고 했다.0575) 李 穡,≪牧隱文藁≫ 권 8, 黙軒先生文集序.

 민지는≪세대편년절요≫나≪본조편년강목≫과 같은 사서 이외에도 불교와 관련된 비문을 비롯하여 사적기·영험기·서문 등 불교에 관한 여러 기록을 남겼다. 충렬왕 21년에는 왕명을 받아 普覺國師 一然의 비문을 지었다. 비록 왕명에 의해 비문을 지었지만,≪三國遺事≫의 저자 일연의 역사의식과 민지의 역사의식에는 공통점이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또 충렬왕 32년에는<大藏經移安記>를 썼 다. 이는 2년 전 고려에 왔던 남송의 鐵山 紹瓊이 강화 普門社에 봉안되어 있던 대장경 3본 중 許評 부부에 의해 인출된 1본을 얻어서 江西의 仰山으로 옮긴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으로 민지는 임제종 楊岐派의 고승 철산과도 교유했음을 알 수 있다.0576) 許興植,≪高麗佛敎史硏究≫(一潮閣, 1986), 706∼717쪽 참조.

 그가 쓴 사적기로는 충렬왕 23년에 쓴<金剛山楡岾寺事蹟記>가 전해지고 있다. 유점사의 승려가 유문과 구전 등을 모은 뒤 민지에게 청하여 사적기를 썼다고 한다. 이 밖에 충렬왕 31년에는<楓岳山長安寺事蹟記跋>을 썼고, 2년 뒤에는<寶盖山石臺記>를 썼다. 그는 또 금강산과 보덕굴을 시로 읊기도 했는데, 보덕굴시는 칠언절구이고, 금강산시는 7언 250구 1,750자나 되는 장편이다.0577) 이들 여러 기록은≪楡岾寺本末寺志≫에 수록되어 전한다. 그리고 충렬왕 33년에<五臺山月精寺事蹟>을 썼다. 원래 신라방언으로 전해오던 기록을 이 절의 청에 의해 한문으로 고쳐 쓴 것이었다. 충숙왕 2년(1315)에는<國淸寺金堂主佛釋迦如來舍利靈異記>를 썼고, 동왕 13년에는 指空의≪禪要錄≫에 서문을 썼다. 지공은 이 해 봄 고려에 와서 3년간 체류하다가 원으로 간 인도출신의 고승이었다. 당시 79세의 노학자 민지는 “자신이 늙고 병들었으나 門弟로 참여했으므로 굳이 사양할 수 없어서 지공의 행적을 간단히 기록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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