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4. 역사학
  • 5) 민지의≪본조편년강목≫
  • (3) 민지의 사학사적 위치

(3) 민지의 사학사적 위치

 비록 현전하지는 않지만≪본조편년강목≫은≪고려사≫의 고려세계에 세 차례 인용되어 있는 내용이 모두 설화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설화적 성격이 짙었던 사서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태조가 道詵으로부터 배웠다는 다음의 내용 역시 설화적이다.

민지의 편년에 이르기를, ‘태조의 나이 17세에 도선이 다시 와서 뵙기를 청하고 말하기를, ‘족하가 百六의 운수에 응하여 天俯名墟에 태어났으니 三季의 창생이 그대의 넓은 구제를 기다린다”고 하면서 出師·置陣·地理·天時의 법과 산천에 제사드려 感通保佑하는 이치를 가르쳐 주었다’고 하였다(≪新增東國輿地勝覽≫권 4, 開城府 상, 形勝).

 따라서 민지는 이제현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이는 그의 사학의 설화성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0578) 閔賢九, 앞의 글, 349∼350쪽. 이외에도 민지에 의해 쓰여진 불교관계 기록에는 많은 불교설화나 신앙영험이 수록되어 있다.

 국청사는 천태종의 중심 사원으로 충숙왕 즉위년으로부터 2년에 걸쳐 중창하고 금당에 석가여래상을 봉안한 바 있다. 이 때 관음상 앞에서 기도하여 사리를 얻었던 일이며, 點眼할 때 날씨와 관련된 神異, 낙성법회 때의 우물이 맑아진 기이한 일 등에 관하여 자세히 기록한 것이<國淸寺金堂主佛釋迦如來舍利靈異記>의 내용이다.0579)≪東文選≫ 권 68, 記 國淸寺金堂主佛釋迦如來舍利靈異記.<유점사사적기>에서는 서역으로부터 배에 실려서 우리 나라로 왔다는 53佛설화를 자세히 소개했고,<보개산석대기>에서는 옛 기록과 구전을 인용해서 창건연기설화를 기록했다. 이처럼 민지는 신앙영험이나 기이한 설화를 아무 거리낌없이 기록했는데, 崔瀣가 53불설화를 황당한 이야기라고 하면서 웃음거리로 취급했던 경우와는 판이한 것이었다.

 민지는 성리학 수용 초기에 살았지만, 성리학에 완전히 젖어들지 않고 전통을 계승한 사학자였기 때문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

민지는 시문에 대한 재주가 약간 있었지만, 속습이 많고 심술이 바르지 않아 內人을 아첨하여 섬기고, 또한 성리학을 알지 못하여 그 논함에 성인에 위배됨이 있었으며, 심지어 朱子의 昭穆論을 잘못이라고 하였으니, 소견이 이와 같이 편벽되었다(≪高麗史≫권 107, 列傳 20, 閔漬).

 일찍이 이제현도 昭穆에 관한 민지의 서술을 비판한 바 있다. 소목이란 종묘의 神位次序를 말하는 것으로, 주자는 소목의 위치를 변경할 수 없다는 不遷論을 주장했는데, 민지는 주자의 이 견해에 찬성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려에서는 太廟에 대한 편이성을 생각하여 소목에서도 형제가 각각 소목으로 갈리는 예가 있었고, 같은 왕의 위패가 소에서 목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따라서 민지의 소목론은 고려에서 전통적으로 계승되어 온 특수한 현실성을 그의 역사서술에 반영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0580) 許興植, 앞의 글, 67쪽.

 이처럼 민지가 주자학에 완전히 젖어들지 않았던 데에는 그의 활동시기가 주자학 수용 초기에 해당했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의 불교신앙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는 法喜居士라고 자처하고, 79세 만년에는 “자신이 늙고 병들었으나 指空의 문도에 참여했다”고 할 정도로 불교를 믿었다. 그가 불교에 관한 여러 기록을 남기고,≪본조편년강목≫에≪벽암록≫ 등의 禪書를 인용했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아무튼 민지가 성리학자들의 강목체를 수용하면서도 성리학에 깊이 물들지 않고, 고려의 전통을 계승했던 인물이라는 평가는0581) 許興植, 위의 글, 68쪽. 그의 사학사적 위치와 관련하여 시사해 주는 바 크다고 하겠다.

<金相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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