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4. 역사학
  • 6) 이제현의≪국사≫
  • (3) 이제현의 역사서술과 그 인식

(3) 이제현의 역사서술과 그 인식

 끝으로 이제현의 역사서술과 그 방법에 대한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지적할 수 있다.

 이제현은 우리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정통론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그의 학문적 소양은 성리학적 토대 위에 있었고, 그의 史眼은 명분론과 정통론에 입각한 성리학적 春秋史觀의 지반 위에 있었다고 하겠다. 그는 “사서를 편찬함에 있어서 춘추를 본받지 않는다면, 그것이 옳은지 모른다”라고 했고, “한의 呂后와 당의 則天武后를 帝紀에 나열한 班固와 歐陽修의 사필이 과연 춘추필법을 얻었다고 하겠는가”라고 비판하였으며 후일 주자의 강목을 보고 자신의 견해가 옳았음을 자랑스럽게 여기었다.0607) 李齊賢,≪益齋亂藁≫ 권 3, 則天陵.
―――,≪櫟翁稗說≫후집 1, 歐陽永叔.
그러기에 그가 “사서를 읽을 적에 筆削의 대의는 반드시 춘추를 본받았다”는 묘지명의 기록은 믿어도 좋을 것이다.0608) 金哲埈과 金泰永은 이제현이 춘추사관에 입각하였다고 하는데, 鄭求福은 그에게 춘추적 인식이 보인다고 해서 春秋史觀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李穡이 쓴<묘지명>에도 ‘처음 공이 사서를 읽을 적에 필삭의 대의는 반드시 춘추를 본받았다’고 한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둘째, 이제현은 역사서술에 있어서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려 하였으나 개서하기도 하였다. 그 예로 혜종 이하 여러 왕의 묘호를 ‘宗’자에서 ‘王’자로 개서하였는데, 이는 원 간섭기 그의 비자주적 의식성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국사≫를 편찬하였던 시기가 공민왕의 반원정책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공민왕 6년 이후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사서술에는 반원적 색채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점은 그가 반원의식을 아직 역사의식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받게 하고 있다.

 셋째, 그는 고려에서 卽位年稱元法을 썼던 당시의 관례를 무시하고 踰年稱元法에 의해 개서하였다. 즉<충헌왕세가>의 기록과<김공행군기>에서 기년의 기록이 당시의 금석문에 기록된 기년과 달리 현전하는≪고려사≫나≪고려사절요≫의 기년과 일치하고 있다. 이처럼 즉위년칭원법을 도덕적인 관점에서 부당하다고 생각하여 개서한 것은 역사적 객관성보다 도덕적 측면을 더 중시한 경우라고 생각된다.

 넷째, 그는 설화나 전설에 의존한 역사의 기록을 배격하고 합리적 서술을 시도하였다. 그가 태조의 세계에 대하여 金寬毅의 설을 부정하고 새로운 자료에 의해 역사해석을 새롭게 하고 있는 것이라든가, 현종이 신라왕실의 후예라는 점을 김관의와 민지의 설을 버리고 金富軾의 설을 따른 점, 원의≪經世大典≫에 고려측 기록이 잘못된 것을 시정한 점에서 그의 합리적인 역사연구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이제현은 八關會·燃燈會·仙郞 등의 전통신앙은 경시하고 유교문화를 높이 평가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같은 입장은 유교의 합리주의적 사관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겠지만, 전통사상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반드시 전진적으로만 평가될 수 없고, 비자주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원, 자주적 성격을 지니는 개혁의 측면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배후인물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0609) 閔賢九, 앞의 글, 238쪽.

 끝으로 그는 그가 살고 있던 당대사의 기술과 그가 살았던 왕조사를 정리하는데 주력한 것이 그의 역사학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지적할 수 있겠다. 그는 당대의 역사인 충렬·충숙·충선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책임을 맡았으며, 개인적으로는 비록 책 전체가 역사서술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역옹패설≫을 기술하였다. 이러한 경험 위에서 그는 비로소 기전체≪국사≫의 편찬을 통하여 고려왕조사를 통괄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요컨대 이제현이 서술한 역사는 當代史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그의 역사서술의 목적이 현실문제의 해결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풀이된다.0610) 鄭求福, 앞의 책, 263쪽. ‘理亂興衰의 대략을 서술한≪사략≫이 당세의 귀감을 삼고자 함이었다’0611)≪世宗實錄≫ 권 80, 세종 20년 3월.고 평가되는 것도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현실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 문제였던 원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고 고식적이었다는 평을 면하기 어려운 점이다. 이는 그가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심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해된다.0612) 金泰永, 앞의 글, 343쪽. 뿐만 아니라 “그의 사학이 사대를 합리화시키는 것”0613) 金哲埈, 앞의 글, 481쪽.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金相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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