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4. 역사학
  • 8) 고려 후기 역사서술의 특징
  • (1) 무신집권기 사학의 위축

(1) 무신집권기 사학의 위축

 무신집권시기 史官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어 사실을 직서하기도, 반무신적 사필을 들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관들은 현실에 적응하여 무신들과 영합하기도 했다.≪毅宗實錄≫을 편찬할 때에 의종의 시해사실을 숨기기 위해 상장군 崔世輔를 同修國史로 삼았던 예에서0638)≪高麗史節要≫ 권 13, 명종 13년 12월. 이 시기 역사서술에 가해졌던 무신들의 횡포를 알 수 있다. 文克謙이 최세보에게, “무관이 동수국사가 된 것은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희롱하였듯이, 무관이 사관이 되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의종을 시해한 李義旼이 집권하고 있던 시기에 편찬된≪의종실록≫은 사실대로 쓰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씨집권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신종·희종·강종의≪三代實錄≫이 최씨집권시기에 편찬되지 못했던 것도 우연만은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기에는 사관이 史草를 기록하지 않은 채 공백으로 남겨 두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즉 任睦은 백지의 사초를 남겼고, 元傅 또한 사초를 바치지 않은 적이 있었다.0639)≪高麗史≫ 권 107, 列傳 20, 元傅. 이같은 사실은 직서를 용납하지 않던 무신들에 대한 무언의 항변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高麗史節要≫의 사론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말의 누설을 두려워하여 무신의 擅權을 생략해 버렸던 것은 실록편찬을 맡았던 사신의 죄이기도 하다”0640)≪高麗史節要≫ 권 14, 신종 3년 12월.라거나, “최충헌의 후한 은혜를 입고, 어찌 그 악을 후세에 전하겠는가”라고 하면서 사초를 기록하지 않았던 사관 兪千遇의 경우나,0641)≪高麗史≫ 권 105, 列傳 18, 兪千遇. 崔怡의 공적을 과장한 5, 6권의 책을 써서 그에게 바쳤던 史館修撰 朴暄 등의 행위는,0642)≪高麗史≫ 권 125, 列傳 28, 朴暄. 그들의 직분에 대한 기만이며 아부였다. 일부 옛 문인들과 신진사인들이 무신집권하에서 행정에 참여했지만, 이미 이들은 불의와 비리와 모순에 타협하면서 분주하게 명리를 찾아 헤매는 인간상으로 변해 있었다. 따라서 이들로부터 올바른 역사서술을 기대하기란 어려웠던 것이다.

 무신집권기에 나타난 사서, 혹은 이와 관련이 있는 문헌으로는<東明王篇>·≪海東高僧傳≫·≪歷代歌≫·≪海東法華傳弘錄≫·≪瓊源錄≫ 등이 있었다. 하지만 사관들에 의해 국가적 사업으로 편찬된 역사서는 거의 없는 형편이다.≪해동고승전≫이 비록 왕명에 의해 편찬되었다고 하지만, 覺訓은 사관이 아닌 승려였고, 任景肅은 사관이었지만 그의≪경원록≫이 국가적 사업으로 편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시기에 나타난 몇 가지 사찬서가 있다고 하더라도 불교사서나 영사시 정도였고 국사류는 없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무신집권기의 역사서술은 국가적 사업으로서 사관에 의한 사서편찬이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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