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4. 역사학
  • 8) 고려 후기 역사서술의 특징
  • (2) 역사서술에 대한 원의 간섭

(2) 역사서술에 대한 원의 간섭

 무신집권시기에 위축되어 있었던 역사서술이 원의 간섭시기에 이르러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실록의 꾸준한 편수는 물론이고, 통사류의 편찬 또한 상당수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흔히 ‘자주의식의 내연’이나, ‘민족의식의 발로’, 혹은 ‘강대한 외압에 대처하여 왕조를 지키려는 노력의 소산’ 등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를≪三國遺事≫에서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고려의 역사서술에 대한 원의 간섭도 있었다. 원은 실록 및 통사류 등 고려역사서의 진공을 요구하고 있었고, 고려는 원의 이같은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충렬왕 4년(1278), 원의 中書省에서는 고려의 累朝事跡 및 臣服한 기간, 사신의 명목, 국왕의 친조연월 등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여 바치도록 고려에 요구해 왔었다.0643)≪高麗史≫ 권 28, 世家 28, 충렬왕 4년 7월 정해. 원의 이같은 요구가 國史院의 통보로 인한 것이었음과 고려의 누조사적까지를 알고자 했던 것으로 보아, 고려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충렬왕 12년 왕은 直史館 吳良遇에게≪國史≫의 편찬을 명했는데, 이것은 원에 바치기 위해서였다.0644)≪高麗史≫ 권 30, 世家 30, 충렬왕 12년 11월 정축. 그리고 충렬왕 21년에는 수국사로 치사한 任翊과 사관수찬관 金賆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원의≪世祖事蹟≫을,0645)≪高麗史≫권 31, 世家 31, 충렬왕 21년 3월 정사.
≪高麗史節要≫권 21, 충렬왕 21년 10월.
동왕 33년에는 선대실록 185책을,0646)≪高麗史≫ 권 32, 世家 32, 충렬왕 33년 11월 병술. 또한 충선왕 즉위년(1308)에는≪세대편년절요≫ 및≪금경록≫을 각각 원에 바쳤다.0647)≪高麗史≫ 권 33, 世家 33, 충선왕 즉위년 12월 무오. 특히 선대실록을 원에 보내려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祖宗의 실록을 타국에 내보내는 것이 마땅치 못하다”고 반대하였다.0648) 이 선대실록 185책은 충선왕 4년(1312)에 다시 고려로 송환되었다(≪高麗史≫ 권 34, 世家 34, 충선왕 4년 5월 임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대실록까지를 원에게 바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원의 강한 요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元 世祖는 고려사신 鄭可臣을 불러 고려의 풍속, 세대의 相傳, 理亂의 자취 등을 묻고 장시간 열심히 들었다고 한다.0649) 李齊賢,≪益齋亂藁≫ 권 9 상, 世家.
≪高麗史≫권 105, 列傳 18, 鄭可臣.
원의 成宗 또한 고려의 귀부시기를 물었던 적이 있다.0650)≪高麗史≫ 권 31, 世家 31, 충렬왕 20년 5월 갑인. 이러한 관심은 고려역사서의 진공요구로 나타났으며 고려의 내정간섭을 위한 자료획득은 물론, 고려의 역사서술에 대하여 통제와 간섭을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충숙왕 12년(1325)에 원의 중서성은 국사원의 요구에 따라 成吉思汗 이래로 공이 있는 자를 사서에 초록하여 보내라고 고려에 요구해 왔던 것도0651)≪高麗史≫ 권 35, 世家 35, 충숙왕 12년 12월 계미. 그들의 고려지배에 필요한 자료를 얻어 내려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고종 및 원종의 실록은 훗날≪충헌왕실록≫과≪충경왕실록≫으로 개찬되었다. 이 두 실록의 개찬이 원의 간섭에 의한 것이었음은, 忠憲王 및 忠敬王이 고종과 원종의 시호였던 사실만으로도 쉽게 짐작되는 일이다.

 원의 간섭과 압력으로 인한 사서의 개편은 통사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고금록≫·≪금경록≫등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 후기에는 역사서를 고쳐서 편찬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즉 문종 및 헌종대에 활동했던 朴寅亮은≪고금록≫10권을 편찬했었다.0652)≪高麗史≫ 권 95, 列傳 8, 朴寅亮. 그런데 충렬왕 10년(1284)년에 權溥 등도 또한≪고금록≫이라는 같은 이름의 사서를 편찬했다. 정가신의≪千秋金鏡錄≫은 충렬왕의 명에 의해 閔漬 등이 증수하여≪世代編年節要≫라 했다. 원의 간섭시기의 이같은 사서개편의 표면적 이유는 빠진 것을 보충하는 것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원을 의식한 보정’이거나 ‘원의 압력에 의한 개편’으로 추측하는 경우가 있다.0653) 井上秀雄,<高麗時代の歷史編纂>(≪日本文化硏究所報告≫ 16, 1980). 이 시기에 개편되었던 사서들이 반원적이고 자주적인 방향에서의 개혁이 추진되고 있던 공민왕대에 이르러 다시 한 번 개찬되고 있음은 주목되는 사실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원 간섭기에 상당수의 사서가 편찬되었지만, 이를 ‘민족의식의 발로’로만 보기는 어렵다. 관찬사서의 경우, 원의 사서 진공요구에 따라 편찬되거나, 또는 원의 간섭으로 사서가 개편되기도 했다. 하지만≪삼국유사≫와 같은 사찬사서는 민족의식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어 더욱 돋보이는 사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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