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4. 역사학
  • 8) 고려 후기 역사서술의 특징
  • (5) 역사의 문학적 표현

(5) 역사의 문학적 표현

 고려 후기에 나타난 몇 가지 사찬서의 경우는 자유롭고 새로운 방법에 의해 서술되고 있었다. 특히 역사를 시로 읊은 詠史詩의 등장은 주목할 만하다. 무신집권시기에 쓰여졌던 李奎報의<東明王篇> 및 吳世文의≪歷代歌≫, 그리고 원 간섭기에 등장한 李承休의≪帝王韻紀≫와 雲黙無寄의≪釋迦如來行蹟頌≫ 등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高得相의 영사시와 오세문의 三百韻詩가 있으며, 이규보가 지은 삼백운시는 이의 次韻이다.

 명종 25년(1195)경, 오세문과 이규보는 삼백운이나 되는 장편시를 쓴 적이 있다. 신라의 역사 등 거의 모두를 고사를 인용하여 썼던 오세문의 삼백운시는 영사시에 가까운 것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이규보가 화답한 시에도 신라의 역사를 64구에 걸쳐 읊고 있다.0660) 李奎報,≪東國李相國集≫ 전집 권 5, 古律詩 次韻吳東閣世文呈誥院諸學士三百韻詩. 그리고 고종 6년(1219)경에 쓰여졌을 것으로 생각되는 오세문의≪역대가≫도 그 제명이나 삼백운시의 성격 등을 감안할 때 우리 나라의 역사를 포함하는 영사시류였을 것이다. 충숙왕 15년(1328)에 운묵이 쓴≪석가여래행적송≫은 5언 776구, 3,880자에 달할 뿐만 아니라 자세하고도 많은 분량의 주를 병기한 장편의 불교서사시이다.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영웅적 생애를 읊은<동명왕편>이 영웅서사시라면, 단군 이래 민족사의 전개과정을 읊은≪제왕운기≫가 민족서사시라고 하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영사시들을 다른 역사서와 나란히 놓고 평가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창작의도나 그 서술방법이 처음부터 달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영사시가 역사서로서는 한계와 제약이 있지만, 이것은 역사의 문학화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영사시는 역사인식을 감격적으로 서술하기에 적합한 형식이다.<동명왕편>에서 동명왕의 신이한 사적이, 그리고≪제왕운기≫에서 단군신화가 자유롭게 서술될 수 있었던 것도 또한 영사시가 갖는 이같은 특징과 무관하지 않다. 영사시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역사적 교훈을 전파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규보가 “천하로 하여금 우리 나라가 본래 성인의 고장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던 것이나, 이승휴가 “이목에 환히 익혀져 풍영으로 퍼지게 될 것”을 바랐던 것도 이 까닭이었다. 역사가 갖는 교훈적 측면이 역사가 대중성을 띠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라면, 이승휴가≪제왕운기≫를 저술하여 후인의 권계로 삼으려 했던 것이나, 운묵이≪석가여래행적송≫이라는 거울을 통해 新學沙彌之輩의 몽매를 깨우치려 했던 것은 의미있는 일이었다.

 번거로운 역사적 사실을 간략하게 전달할 수 있는 것도 영사시가 갖는 한 특징일 것이다. 이승휴가 “호한한 고금전적들의 내용을 요긴함을 추려 시로 읊는다면 보기에 편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던 것이라든가, 운묵이 “간략함에 의하여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하려 했던 것”은 영사시의 이같은 이로운 점에 착안한 것이었다. 요컨대 역사적 교훈을 시대에 저촉될 염려가 적은 시에 담아 전달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은근한 비판을 가하고자 했던 것의 대표적인 시로서<동명왕편>과≪제왕운기≫를 들 수 있겠다.

<金相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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