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5. 미술
  • 1) 건축
  • (2) 강화궁궐 및 성곽

(2) 강화궁궐 및 성곽

 江華宮闕의 위치는 현재 궁지로 전해지는 강화읍 官廳洞인 松嶽山 아래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나 그 곳에 어떤 궁궐건물이 어떻게 배치되고 어떤 관아시설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형을 비롯하여 궁전이나 사찰들은 모두 송도의 것을 모방하여 만들었고 여러 가지 행사도 개성에서와 같았다고 전해진다.

 ≪高麗史≫나≪高麗史節要≫등에 기록된 강화궁궐이나 궁전·관아 등의 이름을 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본 궁궐은 西宮으로 불리웠으며 송악산 밑에 있었고 그 밖에 延慶宮·壽昌宮·龍岩宮·麗正宮·今旦洞宮·辰岩宮 등의 별궁 이름이 보인다. 궁전건물 이외에는 御醬庫·太常府·輸養都監·景靈殿·國子監·九曜堂·太廟 등의 관아나 시설들의 이름을 볼 수 있다.

江華府 東南의 亭子山(見子山) 밖 궁터는 4, 5리 안에 있고 많은 건물들의 터와 담장, 초석 기와들이 널려 있는데 大廟洞이나 都監洞의 이들이 이것이다(≪江華府志≫ 권 하, 古蹟 麗宮舊墟).

 마치 강화궁궐이 이 곳에 있었던 것처럼 기록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별궁인 연경궁이 있었던 곳이었고, 여러 건물터들은 이 별궁에 관련된 시설들이며, 여기에 태묘와 도감건물이 있었기 때문에 궁궐터로 오인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0661) 尹龍赫,≪高麗對蒙抗爭史硏究≫(一志社, 1991), 164∼170쪽.

 강화성곽은 강화궁궐 즉 서궁을 중심으로 내성과 중성·외성 등 세 겹으로 축조되었으며 모두 토축인 점이 개성도성과 아울러 고려의 성곽축조 방법의 특징이다. 이들 성곽 가운데 내성과 외성은 몽고와의 강화가 이루어지자 고종 46년에 몽고에서 파견된 감독관의 감시하에 궁궐건물과 아울러 철폐되어 그 흔적조차 거의 남기지 않았다. 내성은 강화궁궐과 거의 같은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생각되며 그 길이는 3,874자라고 했다. 그 지역은 지금의 松嶽山·新門里·南山里 일대를 둘러싼 범위로서 조선시대에 축조한 강화성과 일치하고 현 강화성 북문이 내성에 연결된 門址였던 것으로 보인다. 외성은 고종 20년에서 24년에 걸쳐 축조된 土壘로서 길이 37,036자라고 한다. 그 범위는 佛恩面 三成里·西門洞·洞岩里·新峴里·德城里를 비롯하여 강화도의 동쪽 해안 일대를 돌았으며, 조선시대에 축조된 德津鎭과 甲串墩은 외성에 속하는 해협수비시설이 있었던 곳으로 생각되고 있다.0662) 文化財硏究所,≪文化財案內文案集≫ 2 (文化財管理局, 1986), 172·186쪽. 중성은 고종 37년에 축조하기 시작하였는데 둘레가 2,960여 칸이고 그 곳에 대소 17개소의 문이 있었다고 한다. 그 범위는 지금의 仙源面 大門洞의 大門峴을 남문자리로 하고, 仙否里·倉里·神井里·智山里 및 府內面 菊花里·玉林里 일대를 포함한 성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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