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5. 미술
  • 3) 서화
  • (2) 서예

(2) 서예

 고려 후기의 서예는 명종대부터 고종 말년(1259)까지의 무신집권기를 통해 일반회화와 마찬가지로 지식층의 심성양성과 교양적 기능의 하나로 널리 성행되었다. 특히 이규보는 草書작품을 보고 “乾坤을 뒤흔들어 造化를 구사하니 열 폭 비단에 하얀 연기가 피어난다”고 하였다. 이것은 서예를 천지음양의 배합이라는 우주적 원리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고 여긴 것으로 회화와 동질의 창작이론을 통해 인식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東國諸賢書訣評論序>라는 글을 통해 우리 나라의 명필들을 神·妙·絶의 3품으로 나누어 평하고 그 가치를 논함으로써 우리 나라의 서예이론과 서예비평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규보는 이 글에서 金生과 坦然·崔瑀·柳伸을 神品四賢으로 꼽아 가장 높게 평가했으며, 품평의 최고 기준을 창작에서 극치의 경지로 일컬어지는 인위로는 도저히 이를 수 없고 천연적으로 저절로 우러나 이루어진 상태에 두고 있었다.0697) 洪善杓, 앞의 글(1987), 43쪽.

 무신집권기에는 이러한 이론적 경향과 교양적 매체로서의 심화를 통해 서예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지만 현존하는 유물은 금석문과 사경 이외에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당시 최고의 명가로 손꼽히던 최우와 유신을 비롯한 文克謙·李仁老 등의 유작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고 있어 이 시기 서예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다만 崔詵(?∼1209)이 쓴<龍壽寺開創記>(명종 11년 ; 1181)를 비롯하여 淵懿의<龍門寺重修記>(명종 15년), 參知政事를 지낸 柳公權(1132∼1196)의<瑞峰寺玄悟國師碑>(명종 15년)와 <直指寺大藏殿碑>(명종 16년), 翰林學士를 지낸 金孝印(?∼1253)의<寶鏡寺圓眞國師碑>(고종 11년 ; 1224)와<松廣寺眞覺國師圓炤塔碑>(고종 22년) 등의 비문글씨를 통해 볼 때 앞 시기 탄연체의 영향이 지속되면서 시대가 내려올수록 점차 顔眞卿體의 장중한 분위기가 살아나는 경향으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0698) 崔完秀,<韓國書藝史綱>(≪澗松文華≫ 33, 1987), 57쪽.

 고려 후기의 서예는 원종대부터 한문학을 비롯한 詩·書·畵의 전반적인 발달에 따라 더욱 확산되고 심화되었으며, 서풍도 밀접해진 원과의 문화교류를 통해 당대 제일의 서화가 趙孟頫의 松雪體가 성행하게 되었다.0699) 任昌淳,<韓國書藝槪觀>(≪書藝≫, 中央日報社, 1981), 182쪽. 서예에서 晉·唐으로의 복고를 주장했던 조맹부의 송설체는 자유롭고 분방한 송대 서풍의 반작용으로 형성된 바르고 아름다운 독특한 서체로, 연경의 만권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당시 고려·원과의 서화교섭을 따라 국내로 유입되었다.

 이와 같이 송설체는 고려 말기를 통해 전래되어, 이제현과 性澄, 공민왕, 李岡(1337∼1351), 崔興孝 등이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이들 중에서도 명성이 가장 높았던 서예가는 李嵒(1297∼1364)이었다. 左政丞에까지 올랐던 李嵒은 묵죽과 함께 楷·行·草 3法 뿐 아니라 篆書에까지 뛰어났던 당대 최고의 서화가였다. 특히 조맹부의 필법정신을 체득한 이는 杏村(이암) 한 사람 뿐이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로 고려 말기 송설체의 일인자로 손꼽혔다.0700) 吳世昌,≪槿域書畵徵≫(啓明俱樂部, 1928), 29∼30쪽. 그가 쓴 淸平山 文殊寺藏經閣碑(충숙왕 14년 ; 1327)의 글씨는 송설체 대가로서의 그의 성가를 입증해 준다(<도판 10>). 이와 같이 이암을 중심으로 수용되고 풍미했던 송설체는 조선 초기로 계승되어 크게 성행하면서 18세기 초까지 그 영향력이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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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10>文殊寺 藏經閣碑
<도판 10>文殊寺 藏經閣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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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善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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