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5. 미술
  • 4) 공예
  • (1) 도자공예

가.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전반-절정기

 의종과 명종으로 이어지는 12세기 후반은 고려 귀족사회의 절정기이며, 몰락기였고 전환의 시기였다. 의종의 사치스러운 활동들과 의종 24년(1170)에 일어난 무신의 난으로 인한 지배세력의 변화는 고려사에 있어서 하나의 큰 전환기였다. 문신귀족 중심에서 무신귀족 중심으로 지배세력이 바뀌면서 고려사회 전체적으로 동요를 일으킨 농민들의 난, 노비들의 난으로 이어지며 무신들의 권력쟁탈과정으로 점철되는 사회의 모습이 이루어진다.

 12세기 후반의 靑瓷편년에 기준이 되는 자료로는≪高麗史≫ 世家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 주목된다.

여름 4월 초하루 丙申日에 대궐 동쪽의 離宮이 완성되어…또 민가 50여 채를 헐어내고 太平亭을 짓고 태자에게 명하여 현판을 쓰게 하였다. 그 정자 주위에는 이름난 화초와 특이한 과수를 심었으며 기이하고 화려하면서도 보배롭고 즐길 만한 장식물들을 좌우에 진열하고 정자 남쪽에는 못을 파 거기에 觀瀾亭을 지었으며, 그 북쪽에는 養怡亭을 축성하여 청기와(靑瓷)를 덮었고 그 남쪽에는 養和亭을 지어 종려나무로 지붕을 이었다(≪高麗史≫권 18, 世家 18, 의종 11년).

 청자에 관한 위의 기록은, 1927년 개성 滿月臺의 高麗宮址에서 수습된 靑瓷瓦片들과 1964∼65년 국립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한 康津 沙堂里窯址 출토의 다양한 청자와편들로 입증되었다. 이들 청자와편들은 靑瓷陽刻牡丹紋수막새, 靑瓷陽刻唐草紋암막새를 비롯하여 청자음각모란문이 꽉차게 施紋된 청자와편들로 약간의 象嵌技法이 시문된 청자편과 함께 조사되었다.0701) 崔淳雨,<高麗靑瓷瓦>(≪美術資料≫ 13, 國立中央博物館, 1969). 이들 청자와편은≪고려사≫의 기록과 개성 만월대 고려궁지 그리고 강진 사당리요지의 출토품과 들어맞는 가장 기준이 되는 자료인 것이다. 문양은 굵은 음각선으로 비스듬히 넓게 시문하여 마치 양각처럼 표현되는 모란당초문이 꽉차 있으며, 음각당초문의 경우도 정교하고 예리하다. 양각의 수법도 잎맥까지 나타낼 정도로 정교하며 틀로 찍어낸 후 조각칼로 다듬어 나타냈다. 釉色은 보다 짙은 담녹색이었고 硅石받침으로 정교하게 제작된 청자들은 長陵 출토로 전해지는 청자보다 조금씩 컸으며 釉에는 氷裂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 청자와편들과 함께 출토된 청자들 중에는 세 발 달린 향로편들과 상형의 오리, 양각의 三足鼎片, 탁잔편이 있어 주목되었다.

 사치와 향락을 좋아했던 의종연간에 화려한 청자로서 음각·양각·투각·상형의 수법이 채택되기 시작하였음은 충분히 가능한 사실로, 실제로 뛰어난 고려청자의 명품들이 의종연간의 작품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의종 11년 청자기와가 제작되던 시기에 특이한 음각·양각·투각의 청자와 함께 器面의 일부분에 흑백상감한 상감청자편이 발견되었다.0702) 鄭良謨,<高麗陶磁の窯址と出土品>(≪世界陶磁全集≫ 18, 小學館, 1978), 196∼200쪽. 靑瓷陰刻象嵌寶相花紋盌의 내면 口緣에 白象嵌으로 唐草紋帶를 돌린 문양이 음각의 寶相花紋과 함께 나타나 있는 것과 靑瓷透刻象嵌七寶香爐의 투각청자에 점이 백상감된 예가 있어 상감청자의 발생이 이 시기 전후에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사진 1>).

확대보기
<사진 1>靑瓷透刻象嵌七寶香爐
<사진 1>靑瓷透刻象嵌七寶香爐
팝업창 닫기

 1990년 11월에 발굴·조사된 扶安 鎭西里窯址에서 무문·음각의 국화문, 양각의 화문, 청자편과 함께 백상감의 당초문·雷紋이 기면 일부에 시문된 초기 상감청자편이 조사되었다.0703) 1990년 10월∼11월까지 2개월간에 걸쳐 圓光大 馬韓百濟硏究所에 의해 발굴조사되어 보고서 준비중에 있는 가마터이다.

 대체로 의종연간에는 음각·양각·투각·상형의 청자가 상감청자보다 훨씬 많이 제작되었으며, 고려청자의 창의적인 다양한 기형과 문양·翡色의 유색 등이 이 시기에 나타나는 공통된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12세기 후반의 청자자료에는 명종 11년(1181)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靑瓷陰刻象嵌牡丹紋「辛丑」銘 벼루와 신종 원년(1198)의 承安三年銘墓誌와 함께 宋子淸墓에서 출토된 청자잔과 白瓷淨甁의 예가 있다.

 13세기 전반은 의종 24년 무신의 난 이후 정권을 잡은 무인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 쉴새없이 정권이 교체되다가 명종 26년 崔忠獻에 의해 정권이 안정된 후 崔瑀·沆·竩에 이르는 4대 62년간 다스려진 최씨무신집권시대였다. 또한 이 시기는 동아시아에서 몽고세력이 흥기하여 일대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차츰 고려와의 관계에 불화가 감돌면서 고종 18년(1231)부터 몽고의 침입이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최우정권은 단호히 항쟁할 것을 결의하고 고종 19년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고종 46년 몽고와의 강화가 맺어질 때까지 항쟁은 계속되었다.

 특히 남송과의 단절로 인해 문화의 자극이 없어지고 그 때문에 고려청자 특유의 기형과 문양이 발전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12세기 후반에 이은 상감청자의 발전은 이러한 외부의 문화적인 자극이 없어지고 고려 자체내의 요청에 따른 발전의 양상으로 高麗化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청자로는 명종의 智陵에서 출토된 청자들을 들 수 있다. 청자접시·靑瓷陰刻蓮瓣紋盌·靑瓷退酒器·靑瓷陽刻牡丹紋접시·靑瓷陽刻雲紋盌·靑瓷象嵌荔枝紋대접·靑瓷象嵌菊花紋접시 등 12점이 있다.0704) 野守健,≪高麗陶磁の硏究≫(淸閑舍, 1944), 14∼17쪽. 청자상감여지문대접의 경우 내만된 넓은 口部와 둥근 몸통, 한층 밝고 맑아진 투명한 靑瓷釉, 문양의 경우 내외면에 꽉차게 포치된 施紋, 규석받침 자국이 잘 모여 있으며, 무문·음각·양각의 청자가 상감청자보다 더 많다.

 이 시기의 청자로 추정되는 扶安 柳川里窯産 고려청자편(이화여대박물관 소장)들은 12세기 후반의 청자를 포함하며 13세기 전시기에 걸치는 것으로 매우 다양한 기형과 문양을 보여주고 있다.0705) 梨花女大博物館,≪扶安柳川里窯 高麗陶瓷≫(梨花女大 博物館, 1983). 각종 투각의 墩과 臺片들, 음각의 장구·합·주전자·접시·잔·매병들과, 양각의 접시·대접·병·항아리 등 다양하며, 상감기법으로 완성된 陶板·매병·술병·합·탁잔·주전자·완·화분·대접과, 그 밖의 鐵畵·鐵白畵의 예, 백자·상감백자 등이 다채롭게 출토되었다. 문양의 경우도 雲鶴紋·菊花紋·牡丹紋·蒲柳水禽紋·荔枝紋·蓮花紋 등 다양하며 유색은 녹색이 짙은 청자유와 투명한 청자유가 함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기벽은 두꺼워져 가고 있으며, 굽다리의 규석받침도 커져 가고 말끔히 마무리하지 않은 예도 있다. 큰 기형의 경우 점토가 섞인 모래받침으로 받쳐 구운 梅甁·壺片의 예가 많아진다. 이처럼 기형과 문양에서 중국적 요소가 사라지고 고려적인 기형과 문양의 세계가 확대되고 전개되어 가는 것이 이 시기의 도자에서 주목되는 점이다. 이 시기에 제작된 대표적인 도자의 예로는 靑瓷象嵌雲鶴紋梅甁(간송미술관소장,<사진 2>)과 靑瓷象嵌葡萄童子紋銅彩瓢形주전자 및 승반(국립중앙박물관소장)이 있다.

확대보기
<사진 2>靑瓷象嵌雲鶴紋梅甁
<사진 2>靑瓷象嵌雲鶴紋梅甁
팝업창 닫기

 강진 사당리와 부안 유천리에는 자기소가 설치되어 所民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청자를 비롯한 도자기는 別貢의 貢物로서 국가에 바쳐져 사용되었다.0706) 北村秀人,<高麗時代の所制度について>(≪朝鮮學報≫ 50, 1969). 전자의 경우 長興倉에, 후자의 경우 安興倉에 집결시킨 도자기는 조운에 의해 해로로 개경에 올려 보내면 고려왕실과 관청·귀족 등에 공급되어 쓰여졌다. 예종 3년(1108)에는 공물이 과다하여 장인들이 어려움을 겪고 도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예종 3년 2월에 왕이 명령을 내리기를 “경기의 州·縣들에서는 常貢 이외의 徭役이 많고 무거워서 백성들이 이를 고통으로 여겨 날마다 점점 도망해 간다. 담당 관청에서는 그 공물, 부역의 다소에 대하여 해당 界首官들과 토의하고 적당히 제정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銅·鐵·瓷器·紙·墨 등의 雜所에서 別貢으로 바치는 물품을 거둠이 극도로 과중하므로, 匠人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도피하게 되었다. 담당 관청에서는 各所에서 바치는 別貢·常貢의 물품의 다소를 헤아려 결정하여 나에게 아뢰어 결재를 받도록 하라”고 하였다(≪高麗史≫ 권 78, 志 32, 食貨 1, 貢賦).

 강진 大口面은≪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大口所가 있던 곳이므로 고려시대에는 자기소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부안 유천리요의 경우 그 주위로 토성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고려왕실 및 관청이 필요로 하는 도자기의 수요에 따라 자기소의 소민이 주축이 되어 청자를 비롯한 도자기를 제작하고 그 완성품을 所의 관리가 맡아 별공으로 공급하는 체제였다. 고려시대 자기소는 기술집단으로서, 다른 鐵所·紙所·墨所 등과 함께 운영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0707) 權丙卓,<高麗後期 陶瓷器所의 經營形態>(≪傳統陶瓷의 生産과 需要≫, 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1980), 57∼58쪽. 현존하는 청자 중에 보이는 ‘孝文’·‘孝久刻’·‘孝光’·‘照淸造’ 등의 銘文은 12∼13세기 부안 유천리자기소에서 청자를 제작하던 자기장의 이름들이다. 성은 보이지 않고 ‘孝’를 공통으로 하고 있어 주목된다. 특히 일본에 있는 靑瓷陰刻蓮唐草紋淨甁의 굽 안바닥에 음각된 ‘孝久刻’ 명으로 보아, 12세기 후반 의종연간에 넓게 음각하여 양각처럼 나타내 보이는 특이한 시문방법을 새기던 대표적인 자기장의 이름으로 보여 흥미롭다 하겠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