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5. 미술
  • 4) 공예
  • (2) 금속공예

(2) 금속공예

 고려시대에는 많은 청동제 생활용구와 불교용구들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銅鏡·수저 등 생활용구는 시기를 구분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며, 대부분 고려 전기의 금속공예 항목에서 이미 설명하였다.0715) 尹龍二,<공 예>(≪한국사≫ 17 :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국사편찬위원회, 1994). 그러므로 후기의 금속공예는 주로 불교용구를 다루었다.

 고려 후기에는 원의 침입을 겪으면서, 부처의 도움으로 이민족을 물리치려는 목적으로 대장경을 조성하는 등의 대규모 佛事가 행해졌다. 그리고 원의 간섭기에는 원의 문화 및 라마교의 영향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공예품에서도 변화를 찾아볼 수 있다.

 銅鏡은 12세기에 고려의 독특한 양식이 정립되어, 鐘肩 위에 蓮瓣臺와 같은 立花장식이 붙고 때로는 音管 위에 球形장식이 부착되며, 대체로 鐘口가 넓어져 口徑에 대한 鐘高의 비율이 전기에는 1.2 내지 1.1로 낮아지며 후기에는 구경 40㎝ 미만의 소형이 되는 동시에 구경과 종고가 비슷해져 신라종의 전통이 변화된다. 또한 鐘身에는 飛天 대신에 여래·보살 등의 입상이 배치되어 투박스러워진다.

 고종 9년(1222)에 만들어진 扶安 來蘇寺鐘은 높이 1.03m로 12세기 종의 양식을 충실히 이어받아 종구가 벌어지기 시작하였고, 음관 위에는 구슬이, 종견에는 입화장식이 각각 붙어 있다. 문양대는 寶相花紋으로, 蓮花座에 앉은 삼존불이 조각되어 있으며 윗면에는 寶蓋가 하늘을 날고 있다.

 또 14세기에 만들어진 海南 大興寺鐘(충목왕 2년 ; 1346)과 奉恩寺의 長興寺銘鐘도 모두 이러한 고려종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다만 개성 남대문에 걸려 있는 演福寺鐘은 그 명문에 의해 알 수 있듯이 원의 工人에 의해 만들어진 원나라 형식의 범종으로, 鈕筒도 없고 乳廓·飛天 등도 없으며 종구도 八花形으로 되어 있다.

 香爐는 또는 香琓이라고도 부르며, 불교행사·의례에서 향을 피우는데 쓰였고 銀入絲 등의 기법으로 장식되었다.

 금강산 乾鳳寺향로는 고종 원년(1214)에 만들어졌는데, 높이 30㎝이다. 향로의 몸체에 梵字紋이 네 개 있는 것은 12세기에 만들어진 表忠寺향로와 같으나, 공간을 장식하고 있는 작은 보상화문이 문양이면서도 회화적인 구도와 형태를 가지고 있어 畵金靑磁의 문양과 통하는 점이 있다. 이에 비하면 충혜왕 5년(1344)에 만들어진 봉은사향로는 보상화문이 완전히 문양화되어 퇴색하고 있다.

 金鼓는 절에서 대중을 집합시킬 때 사용하던 도구이다. 13세기 이후 만들어진 금고로는 신종 5년(1202)의 蒲溪寺금고, 희종 2년(1206)의 德周寺금고, 고종 5년의 貞祐6年銘금고, 고종 39년의 玉泉寺금고 등이 있다. 그런데 이 중 포계사·덕주사금고는 표면에 동심원을 그려 4구로 나누고 중앙에서부터 연밥·연꽃·당초의 문양 등을 양각하였다. 그런데 정우6년명금고는 경기도 안성군 二竹面 奉業寺 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지름 61㎝인 큰 작품에 속하며 형식이 약간 다르다. 즉 표면을 동심원으로 3구로 나누고 중앙에는 연밥을, 그 주변에는 연꽃을 양각하여 2구를 채우고 넓은 바깥 공간에는 如意頭紋과 飛雲紋을 배치하여 전체가 시원스러워 보인다.

 1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는 충렬왕 31년(1305)의 大德銘금고, 藥師寺금고(1322, 일본 京都 智恩寺 소장), 충숙왕 14년(1327) 泰定銘금고 등이 있는데, 점차 문양이 조잡해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搖鈴은 불교의식에서 목탁과 같이 독경할 때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 밀교계통에서 널리 쓰였다. 고려시대에는 금동 또는 청동제요령이 남아 있다.

 이 중 松廣寺에 소장되어 있는 금동요령의 긴 몸통은 4각형으로 각 면이 팽창되어 거의 원형에 가깝고, 각 면에는 구획선 안에 위를 향한 용 한 마리씩을 양각하였는데 그 수법은 대담하다. 어깨에는 각 면에 밑으로 늘어진 연꽃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금동요령은 몸통이 마치 서양종과 같고 위에 4鈷形의 손잡이 끝이 있으며 8夌形을 이룬 각 능단에는 보살상과 사천왕상·인왕상을 양각하고, 손잡이에는 굵은 마디가 있고 마디 위에 鬼面 4구를 양각한 금동요령도 있다. 이러한 요령은 악귀의 접근을 막는다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다.

 그 외에도 원의 라마교 영향을 받은 舍利器도 고려 말에 제작되었다. 강원도 금강산 월출봉에서 발견된 銀製鍍金舍利器와 外函은 李成桂가 공양왕 3년(1391)에 시납한 것이다. 그것은 사리기 안에 원통을 안치하고 그 안에 사리용기를 넣었는데, 이 원통과 함께 발견된 청동바리에 홍무 24년의 年記와 이성계가 시납한 사유를 기록한 명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사리기는 라마탑 같이 위가 넓고 밑이 좁아진 구형이고, 사방에 여래상을 1구씩 조각하고 그 사이에는 어깨에 양각된 伏蓮에서 늘어지는 장식이 있고, 꼭대기에는 4중의 傘蓋形相輪이 있다. 밑에는 은판을 오려서 만든 3중의 仰蓮이 있고, 이 전체를 받치는 받침에는 2단에 복련이 양각되고 굽은 眼象을 조각하여 8개의 발을 만들었다.

 이 사리기를 넣었던 외함은 8각의 원통모양이다. 원통 하단에는 당초무늬가 양각되고 8각의 각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이 있으며, 각 면에는 1구의 여래상을 음각하고 위에서 수식이 내려와 있다. 뚜껑도 8각으로 이루어져 있고, 기왓골은 2중으로 되어 있다. 한편 이를 받치고 있는 둥근 받침은 복련과 앙련을 연결한 것이다. 이 사리기와 외함의 여래상과 문양은 고려시대 불상과 문양의 특징이 남아 있다.

 또 다른 라마탑형식의 사리탑이 1958년경 강원도에서 발견되었다. 전체 외형이 밑이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졌고, 기단·탑신·상륜의 각 부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은 거의 원추형을 이루었고 중간에 앙련과 복련을 바로 연결하였고 그 위에 구형의 탑신부가 있다. 탑신 위에는 얇은 동판이 있는데, 그 형식이 斗出星形으로 敬天寺石塔의 기단 평면과 동일하다.

 이들 사리탑·사리기가 원의 라마탑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은 금강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발견된 사리기나 불상에서 원의 양식이 나타나는 점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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