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6. 음악
  • 1) 왕립음악기관의 제도와 활동범위
  • (2) 왕립음악기관의 음악인과 활동범위

(2) 왕립음악기관의 음악인과 활동범위

 대악서와 관현방은 모두 실제로 음악과 무용을 맡았던 연주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음악연주를 담당했던 음악인은 악공과 악사들이었고, 무용은 敎坊女妓들에 의해서 연주되었다. 왕립음악기관의 음악인들은 여러 명칭으로 불리었는데, 工人이 가장 널리 사용된 듯하고, 樂工과 伶人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도 하였다.0725) 宋芳松,≪韓國古代音樂史硏究≫(一志社, 1985), 338·360∼361·366쪽 참조. 아악서를 제외한 대악서와 관현방에는 많은 수의 女妓들이 소속되었는데, 이들이 궁중에서 공연한 노래와 춤은 敎坊樂·妓樂·女樂으로 기록되었다.0726) 宋芳松, 위의 책, 339·341·364쪽. 이러한 공연활동에 관련된 여기들은 妓·官妓·娼妓로 기록되었고, 또 敎坊이라고도 불렀다.0727) 宋芳松, 위의 책, 338·341·376쪽.

 나라의 큰 행사가 있을 경우에는 대악서 소속의 악공과 관현방 소속의 악공이 함께 음악활동을 전개하였다.0728)≪高麗史≫ 권 18, 世家 18, 의종 21년 4월 무인 및 권 19, 世家 19, 의종 24년 정월 신사. 대악서 소속의 여기들은 비록 왕의 전용이었지만, 악공의 경우처럼 국가적인 행사에서는 관현방 소속의 여기와 함께 노래와 춤을 추었다. 대악서와 관현방 소속의 악공들 중에서 많은 경력을 쌓은 후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높은 지위가 바로 樂師였다. 이러한 고려시대 악공과 여기의 전통은 조선왕조의 음악기관에 그대로 전승되었다.

 악공이나 악사의 사회적 신분은 후대로 내려갈수록 차츰 낮아졌기 때문에, 나중에는 사회적으로 천시되는 계층인 맹인이나 巫師의 자손 중에서 악공이 선발되었다.0729) 宋芳松, 앞의 책(1988), 50∼58쪽 참조. 그래도 악공의 최고지위였던 악사는 악공보다는 높은 사회적 대접을 받았음(<표 2>)이 확인되지만, 악사의 녹봉은 대악서의 令(종7품)에 비해서 1/3 수준이었다.0730) 宋芳松, 위의 책(1988), 57쪽. 이러한 악공이나 악사의 전통은 거의 그대로 조선왕조의 왕립음악기관으로 전승되어 사회적으로 악공이나 악사들이 제대로 대우를 못받았지만, 궁중에서의 활동범위는 다양하였다.

 고려시대 국가적인 규모로 거행되었던 제례의식은 여섯 가지로 구분될 수 있는데, 圜丘·社稷·太廟·先農·先蠶·文宣王廟가 그것이다. 원구는 天壇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제례의식이고, 땅신과 곡신신에게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가 사직이며, 역대 고려왕의 위패를 모신 종묘에서 지내는 제사가 태묘였다. 선농은 농사신 神農氏에게 지내는 제례의식이고, 양잠을 처음으로 시작했다는 西陵氏에게 지내는 제사가 선잠이며, 문선왕묘는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서 제사하는 의식을 뜻한다.

 여섯 가지 제례의식에 따르는 음악의 종류가 각각 달랐고, 또 제사절차에 사용된 제례음악 역시 서로 구분되었다.0731)≪高麗史≫ 권 70, 志 24, 樂 1, 雅樂 登歌軒架樂迭奏節度. 예종 11년(1116) 大晟雅樂이 송나라에서 고려조정에 소개된 이후에도, 향악이 여러 제례의식에서 연주되었다. 원구·사직·태묘·선농·문선왕묘의 亞獻·終獻·送神의 절차에서 아악이 연주된 것이 아니라 향악이 연주되었다.0732)≪高麗史≫ 권 71, 志 25, 樂 2, 用俗樂節度. 그리고 제례의식을 거행하는 시일도 여섯 가지로 서로 달랐으니, 예컨대 태묘에서 정기적으로 지낸 時享은 매년 음력 2월·5월·8월·11월 네 번이었으며, 1년 동안의 농사일을 고하는 臘享은 동지 이후 세 번째 戊日에 제사를 지냈다. 태묘의 제향처럼 원구·사직·선농·선잠·문선왕묘의 제향일이 서로 달랐음은 물론이다.

 제례의식 이외에 악공과 악사들의 음악활동과 관련된 궁중의식은 바로 朝儀와 宴享이다. 궁중에서 임금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일정한 의식절차에 따라서 거행하는 조회의식이 바로 조의이다. 천자의 뜻을 알리는 詔書를 영접할 때, 태후를 책봉할 때, 왕후와 왕태자를 책봉할 때, 중국에 表文을 올릴 때 등 기타 여러 조의에서 왕립음악기관의 악공과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하였다. 이러한 경우에 연주된 음악은 궁전뜰에 벌여 놓은 軒架에 의해서만 연주되었고,0733)≪高麗史≫ 권 70, 志 24, 樂 1, 雅樂 用鼓吹樂節度. 의식절차에 따라서 행진계통의 음악인 鼓吹樂이 사이사이에 연주되기도 했다.

 궁중에서 열리는 여러 잔치 곧 연향은 왕립음악기관의 樂歌舞와 관련되었다. 태후 책봉 후에 군신을 위한 잔치, 태자나 왕후의 책봉을 마친 후의 잔치, 왕이 군신을 위해 베푼 잔치 등과 같은 연향이 거행될 때마다 음악이 연주되었는데, 이런 연향에서도 제례의식의 경우처럼 헌가에서만 음악이 연주되었다. 공식적인 궁중연향 이외 燃燈會나 八關會와 같은 국가적 규모의 행사에서도 왕립음악기관의 연주활동이 필수적이었다. 실례를 들자면, 문종 27년(1073)의 연등회에 왕이 참석했을 때, 敎坊女弟子 眞卿이 踏沙行歌舞를 연주했고, 같은 해 팔관회를 왕이 참관했을 때에는 교방여제자 楚英이 抛毬樂과 九張機別伎를 연주하였다.0734)≪高麗史≫ 권 71, 志 25, 樂 2, 用俗樂節度. 답사행가무·포구락·구장기별기와 같은 춤은 모두 唐樂呈才였음을 상기할 때, 정재반주의 음악은 당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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