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6. 음악
  • 2) 향악
  • (1) 향악과 향악정재

가. 신라향악의 전통과 그 방향

 통일신라의 향악전통이 고려에 거의 그대로 전승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태조의 十訓要가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태조의 10훈요 가운데 여섯 번째가 팔관과 연등의 전통에 관한 것인데, 신라의 팔관과 연등의 전통을 잘 전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0736)≪高麗史≫ 권 2, 世家 2, 태조 26년 4월. 팔관회는 진흥왕(540∼575) 때 신라의 전통적 제천의식에 불교적 요소를 가미시켜 만든 遺風으로서 나라와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던 국가적 규모의 행사였다. 연등회 역시 신라전통의 하나로 고려왕조에 전승된 유풍인데, 절에서 등불을 밝히고 임금과 백성이 노래와 춤으로 나라의 태평과 안녕을 기원하던 국가적 규모의 행사였다. 팔관회와 연등회는 모든 신라 가무의 전통을 고려왕조에 전승시키는 데 중요한 행사였으므로, 음악과 무용을 포함한 신라의 향악이 그런 행사에 아주 필수적이었다.

 신라화랑 國仙이 歌舞百戱로서 龍神을 기쁘게 하여 복을 비는 의식이 바로 팔관회였는데, 팔관회의 이런 仙風은 연등회와 성격상으로 구별되었다.0737) 李惠求,<의례상으로 본 팔관회>(≪韓國音樂序說≫, 서울大 出版部, 1967), 277∼296쪽. 팔관회의 가무백희는 신라 仙郞인 국선에 의해서 거행되었으므로, 가무백희의 공연에는 南石行·述郞·永郞·安詳의 四仙樂部0738)≪高麗史≫ 권 69, 志 23, 禮 1, 태조 원년 11월.가 반드시 포함되었다. 팔관회의 이런 가무백회의 전통이 고려 초기에는 잘 전승되다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점 역사적 변천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팔관회의 가무백희를 연출했던 국선이 고려 초기 이후부터 차츰 사라지게 되어 예종 때에는 구하기 어려워지자, 의종 때에는 국선을 양반이나 부잣집 사람으로 대치시키게 되었고, 팔관회의 유풍은 차츰 세속화되었다.0739) 李惠求, 앞의 책, 296쪽 이처럼 팔관회의 가무전통을 포함한 신라의 향악은 고려시대를 거치는 동안 조금씩 변천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조가 후대에게 내린 10훈요 중에 첫번째가 부처의 호위에 감사하고 절을 많이 창건하라는 내용이고0740)≪高麗史≫ 권 2, 世家 2, 태조 26년 4월. 보면, 신라풍의 梵唄가 고려왕조에 잘 전승되었음이 분명하다. 공민왕 때 신돈이 演福寺에서 승려 300명을 뽑아서 의식을 거행하고 범패를 공연했다는 기록이 그 실례의 하나이다.0741)≪高麗史≫ 권 132, 列傳 45, 辛旽. 고려의 범패는 중국풍이 아니고 신라풍이라는 사실이 “그들의 범패로 말하자면 사투리여서 전혀 분간할 수가 없었다”는≪고려도경≫의 기록에 의해서 확인된다.0742) 徐 兢,≪高麗圖經≫ 권 18, 釋氏.

 ≪고려사≫ 악지에 신라·고구려·백제의 향악으로 총 13곡명이 전하므로, 삼국의 향악곡들이 고려시대에 연주되었고, 또 악보에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향악곡들은 東京·木州·余那山·長漢城·利見臺 등의 5곡이었고, 禪雲山·無等山·方等山·井邑·智異山 등 5곡이 백제의 향악곡이었으며, 고구려의 향악곡은 來遠城·延陽·溟州 3곡이었다.0743)≪高麗史≫ 권 71, 志 25, 樂 2, 三國俗樂. 삼국의 향악곡들이 대다수 지명과 관련된 점을 상기할 때, 여러 지방의 백성들에 의해서 연주되었던 민요형태의 노래를 바탕으로 삼아 예술적으로 다듬은 성악곡이라고 보면 무난할 것이다. 통일신라를 거쳐서 고려왕조에 전승된 삼국의 향악곡 중에서 방등산이 태종 2년(1402) 사대부를 위한 공사연에서 노래로 불린 사실로0744)≪太宗實錄≫ 권 3, 태종 2년 6월 정사. 미루어 보건대 삼국의 향악곡들은 고려시대에도 널리 연주되었고, 그 일부분은 조선왕조에도 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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