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7. 무용과 연극
  • 1) 산대잡극
  • (1) 연등회·팔관회와 백희

(1) 연등회·팔관회와 백희

 고려의 수도 開城은 정치도시요 관인도시로 백성을 위한 오락장도 점포도 없고 사찰의 종소리와 독경소리만 들렸으므로 백성들의 흥겨운 분위기는 없었다. 다만 국가명절과 각종 불교행사에서 음악·가무·백희 등으로 제불과 천지신명을 즐겁게 하여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빌었으며, 이런 국가적 행사를 통하여 군신이 함께 즐기고, 일반 백성들까지도 이를 즐길 수 있었다.

 고려의 演戱文化는 4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신라 이래의 八關會와 燃燈會 등의 불교법회 후에 민속예능이 행해지던 시기이고, 제2기는 예종 11년(1114)에 송으로부터 새로운 악기와 大晟雅樂이 수입되어 宮中舞樂의 중국양식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민중의 호흡과는 동떨어진 궁중무악이 주가 되어버린 시기이다. 제3기는 그보다 백년 뒤인 1220년대의 몽고침입에 따라 전래된 雜戱와 삼국시대 이래의 민속연예가 충렬왕(1274∼1308) 무렵부터 궁중에서 연출된 시기이다. 제4기는 고려 말에 공민왕(1351∼1374)이 명의 雅樂을 수입하여 제2기로 복귀함에 따라 막을 내린다.0836) 金東旭,≪國文學史≫(日新社, 1976), 98∼99쪽.

 고려시대에 행해지던 국가제전의 큰 행사로는 팔관회와 연등회를 들 수 있다. 고려속절인 元正·上元·上巳·寒食·端午·秋夕·重九·冬至·八關 등 아홉 가지 명절 중에서 상원에 행하던 연등회(나중에는 2월 연등으로 되고, 말기에는 4월 8일에 거행)는 불사에 관한 제전이요, 仲冬에 행하던 팔관회는 토속신에 대한 제전이었다. 두 행사는 그 대상이 다를 뿐 의식절차면에서 보면 다같이 小會日과 大會日이 있어 등불을 찬란히 밝히고, 綵棚을 설치하고, 주과와 음악·가무·백희로 대축연을 베풀고, 제불과 천지신명을 즐겁게 하여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기원하는 제전이다.0837)≪高麗史≫ 권 69, 志 23, 禮 11. 팔관회는 원래 불교의 八戒0838) 속세에 있으면서 佛敎를 믿는 남자(優婆塞)와 여자(優婆尼)가 지켜야 할 여덟 가지 戒行 즉 不殺生戒·不偸盜戒·不邪淫戒·不妄語戒·不飮酒戒의 5戒와 함께 不坐高大廣牀戒·不著花鬘瓔珞戒·不習歌舞戱樂戒의 3戒를 더한 八關齋戒를 말한다.에 기초한 행사였으나 점차 불교색채를 떠나 도교의 색채를 띤 국가행사가 되어 고구려의「東盟」이나 부여의「迎鼓」등 고대의 祭天儀禮와 신라의 八關會를 통합한 민족적 수확제의 성격을 지닌 의례가 되어 갔다.0839) 三品彰英,<古代祭政と穀靈信仰>(≪三品彰英論文集≫ 5, 平凡社, 1980), 205∼206쪽.

 본래, 國仙(花郞)이 歌舞百戱로서 龍天을 환희에 넘치게 함으로써 복을 비는 것이 팔관회의 본질이므로0840) 李惠求,≪韓國音樂序說≫(서울大 出版部, 1967), 293∼296쪽. 조선조 궁중의 驅儺에서 處容歌舞로 재앙을 물리쳤고, 지금도 민간에서 무당이 가무에 의해 굿을 하는 것과도 본질적으로 통하는 신라 이래의 仙風(國風)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태조 원년(918)에 신라의 유풍인 팔관회를 부활시켰고, 그 四仙樂部의 고사와 선풍의 취지인 天靈과 五嶽0841) 金剛山·妙香山·智異山·白頭山·三角山.과 명산·대천과 龍神을 제사지내고, 龍天을 환열케 하여 안녕을 비는 일을 계승하였으며, 선풍인 팔관회와 事佛하는 연등회를 구별하였다. 그 후로 유교주의를 취한 성종(981∼997)은 이를 폐지했으나 다시 현종(1010∼1031) 때부터 부활되어 국가적 연중행사로 계속되었다.≪高麗史≫에 보면 팔관회의 최성기는 靖宗(1035∼1046)에서 의종(1147∼1170)에 이르는 130년간이고, 명종(1171∼1197)에서 고종(1214∼1259)까지의 90년간은 쇠퇴기이며, 원종(1260∼1274) 이후를 종말기라고 볼 수 있다. 공양왕 3년(1391) 2월에는 고려 최후의 팔관회가 거행되지만, 의종 때 이미 신라 팔관회의 위풍인 국선(화랑)은 없어지고, 세속인인 귀족이나 가산이 풍족한 집의 자제들이 이를 대행하게 되어 종교적 제례에서 세속인의 백희를 수반하는 의식으로 변모하여 차차 세속화되어 갔다.

 그러면 신라 이래의 팔관회와 상원의 연등회에서 놀이로 벌이던 가무백희 또는 잡희가 어떠한 내용이었던가. 신라의 가무백희가 崔致遠의 시<鄕樂雜詠五首>에 5伎로 집성되어 있듯이 고려의 백희는 牧隱 李穡(1328∼1396)의 시<山臺雜劇>과<驅儺行>에서 그 내용을 일부나마 살필 수 있다. 또 현존한 남사당패의 풍물놀이,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이), 덜미(꼭두각시놀음) 같은 고정된 공연목록에서도 조선시대를 거쳐 전해온 잡희의 잔존을 볼 수 있다. 팔관회와 연등회 그 밖의 나라의 경사에는 채붕을 설치하고 이러한 가무백희를 상연하였다.

 綵棚이란 5색비단 장막을 늘어뜨린 다락으로, 나무로 단을 엮어 만든 일종의 장식무대라고 할 수 있다. 기록에는 신라 진흥왕 때 시작된 팔관회에 “두 개의 綵棚을 설치하고 百戱歌舞를 봉정하여 복을 빌었다”고0842)≪增補文獻備考≫ 권 107, 樂考 18 散樂. 하였고, 신라의 전통을 계승한 고려 태조 원년의 팔관회에는 높이가 각각 다섯 길이 넘는 두 개의 채붕을 설치하였다고0843)≪高麗史≫ 권 69, 志 23, 禮 11, 仲冬八關會儀, 태조 원년 11월. 하였다. 山形 또는 산과 같이 높은 채붕은 山臺라고도 불렀다. 고려시대에는 채붕이라는 말을 많이 쓴데 비하여 조선시대 문헌에는 山棚·綵棚·山臺가 함께 쓰여지고 있다. 조선조에 이르러 그 규모가 더욱 커지고 내용도 복잡해진 데서 산대라는 말을 더 많이 쓰게 된 것 같다. 그러나≪고려사≫에도 이미 ‘山臺樂人’0844)≪高麗史≫ 권 69, 志 23, 禮 11, 上元燃燈會儀. ‘山臺色’0845)≪高麗史≫ 권 77, 志 31, 百官 2.이란 말이 보인다. 바로 上元 燃燈會儀에서 百戱雜技를 연행하는 사람을 산대악인이라고 칭하였고, 충렬왕 5년(1279) 庭殿山臺色을 燃燈都監에 병합시켰다는 기록이 보인다. 아마도 이것은 고려왕조의 발전에 따라 신라유습이 점차로 소멸되고, 고려사회에 알맞은 새로운 형식의 등장을 말하는 것 같다. 고려 초에는 채붕이 양측에 병립되고, 각종 假作物도 진열된 가운데서 여러 가지 연희가 상연되었다. 따라서 채붕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장식물일 뿐 아니라 그것을 중심으로 하여 각종의 장식 치레를 하였으므로 사치와 기이한 볼거리를 다투었다. 그리고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色絲와 色紙·色布로 대문·다리·도로 등에 장식을 하고, 그것이 더욱 발전하여 奇花異草를 장식하였으며, 또 鳥獸·人物·輪車雜像 등에 이르기까지 장치를 하니 화려한 색채는 더욱 농후하게 되어 갔다.0846) 梁在淵,<山臺戱에 就하여>(≪中央大學校三十周年紀念論文集≫, 1955). 고려시대 채붕의 예를 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高宗 32년 4월 8일에 (崔)怡가 燃燈으로 綵棚을 맺고 伎樂百戱를 베풀어 밤새도록 즐기니 都人의 士女들도 구경하는 자가 담과 같이 둘러섰다. 5월에 종실과 司空 이상 및 宰樞에게 향연하였는데 채붕을 맺어 산을 만들고, 비단 장막을 베풀어 휘장을 벌이고, 가운데 그네를 매어 文綉 綵花로 장식하고 큰 분 네 개를 두어 氷峯으로 채우니 분은 모두 은테를 두르고 螺鈿하였고, 큰 항아리 네 개에 名花 10여 품을 꽂아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하였다. 伎樂百戱를 베풀고 八坊廂工人 1,350여 인은 사람마다 모두 성장하여 뜰에 들어와 주악하니 絃歌鼓吹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怡가 8방상에 백금을 각각 3근씩 주고 또 伶官과 兩部의 伎女와 才人에게 金帛을 주니 그 비용이 鉅萬이었다(≪高麗史≫ 권 129, 列傳 42, 崔忠獻 附 怡).

 개성에는 행정구획으로 8坊廂이 있었는데 방상마다 兩部樂 즉 唐樂과 鄕樂이 소속되어 있어, 권신인 최이가 이들 공인 즉 악인들을 동원하여 연등 때 호화로운 잔치를 베푼 것을 말하고 있다.

 태조 원년에 신라유습을 부활시킨 팔관회는 채붕과 輪燈·香燈과 같은 시설뿐만 아니라 팔관회에서 놀이되던 백희가무도 함께 계승한 것은 “其四仙樂部 龍鳳象馬車船 皆新羅故事”0847)≪高麗史≫ 권 69, 志 23, 禮 11, 仲冬八關會儀.라고 한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즉 4仙樂部는 신라의 팔관회를 계승한 고려 건국 초의 팔관회에서 국선 화랑들의 음악가무가 중요한 일부를 차지하였던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해 “4仙樂部라고 함이 역시 國仙團의 악극부, 얼른 말하자면 國家敎會專屬聖樂隊 내지 聖劇團쯤의 의미를 가지게 한 말”이라고 하여 음악대 혹은 연극단으로 유추한 견해도 있으나0848) 崔南善,≪朝鮮常識問答≫(東明社, 1947), 321쪽. 이것을 조선조까지 전해온 4仙舞로 본 견해도 있다.0849) 張師勛,≪韓國傳統舞踊硏究≫(一志社, 1977), 305∼380쪽에 의하면 李秉岐는 “四仙은 신라 때 수려한 山水를 찾아 다니며 학문과 마음을 닦던 永郞·述郞·安祥·南石行을 가리켜 말한다. 금강산에 舞仙臺가 있는데 이곳에서 4사람이 醉舞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 춤은 순조 때 그 옛날 4仙이 와서 놀 만큼 태평성대라는 내용의 노래를 지어 부르며 춤춘다”고 하였다. 한편 성경린,≪한국의 무용≫(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6), 81∼83쪽에서도 그 견해를 따르고 있다. 한편 李仁老의≪破閑集≫에 보면 “겨울에 八關會를 열고 良家의 아이 넷을 뽑아 霓衣를 입혀 줄지어 뜰에서 춤추게 하였다”0850) 李仁老,≪破閑集≫ 권 하.고 하여 4선무가 추어진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4선악부라고 한 것은 협의의 무용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국선 화랑도들이 담당하였던 광의의 歌樂舞 전반을 가리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즉 이어서 龍鳳象馬車船이라고 한 것은 이제까지 채붕 즉 산대의 장식물로만 생각되어 왔으나 이것은 팔관회에서 연희된 散樂雜戱의 내용으로도 볼 수 있겠다. 「龍」은 용놀이로 중국의 魚龍之戱0851)≪晋書≫ 권 23, 志 13, 樂下.(漢代 元旦에 놀던 잡희)에 비정할 수 있고, 「鳳」은 학춤과 같은 鳳凰舞일 수 있고, 「象」은 張衡의≪西京賦≫에 보이는 “白象行孕”과 같은 코끼리놀이로 볼 때 龍鳳象놀이는 일종의 假面戱로 불 수 있겠다. 「馬車」는 仙車놀이 또는 舞輪伎와 같은 놀이로 볼 수 있겠고0852) 張 衡,≪西京賦≫.
≪舊唐書≫ 권 26, 音樂志 2.
「船」은 조선시대 말기까지 궁중연회 때 상연되던 呈才船遊樂이나 敎坊諸譜에 보이는 船樂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이와 같은 잡희와 신라 이래의 劍舞·無㝵舞·處容舞·五伎 등이 5색 비단으로 장식된 높이 50여 척의 채붕에서 상연되던 정경을 생각한다면 10세기 초 신라유습을 계승하였다는 고려 팔관회나 기타의 나라잔치에서 상연되던 가무백희의 종류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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