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7. 무용과 연극
  • 2) 나희

2) 나희

 喜禮인 연등회와 팔관회에서 채붕을 시설하고 백희가무를 연행하였을 뿐더러 凶禮에 속하는 儺禮에서도 채붕은 시설하지 않았지만 백희는 역시 연행되었음을 이색의 시<驅儺行>의 내용으로 보아 알 수 있다.

 나례는 가면을 쓴 사람들이 일정한 연장(창과 방패)을 들고 주문을 외면서 귀신을 쫓는 동작을 하는 행사로, 원래 일종의 假面戱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귀신쫓는 辟邪進慶의 행사가 우리 나라에서도 옛부터 행하여져 왔었으나 궁중나례는 중국나례의 영향을 받아 그 형식이 갖추어졌다. 靖宗 6년(1040)에는 이미 歲終儺禮가 거행된 사실이≪고려사≫ 禮志 季冬大儺儀條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전래는 보다 앞선다고 추정된다.≪고려사≫ 예지의 계동대나의와≪後漢書≫ 禮儀志에 보이는 나례를 비교하여 보면, 고려의 나례는 중국의 그것을 고려의 특수사정에 적합하도록 다소 변경하였을 뿐 2∼3세기경의 후한에서 거행되던 나례와 기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중국에서처럼 춘하추동의 네 계절마다 거행된 것이 아니고, 세종나례만 거행되었고, 특기할 만한 것은 處容歌舞가 祭舞로서 구나의식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나례의식이 한국화된 것을 볼 수 있겠다. 팔관회의에서 따로 의례를 갖추지 않고 가무백희로 기복한 것과 같이 宮中驅儺에서 처용가무가 등장하기에 이르고, 이 나례는 그대로 조선조에도 계승되었다.

 나례는 점차 疫鬼를 쫓는 종교적 의식에만 그치지 않고, 다분히 관중을 즐겁게 하는 구경거리 즉 연극적 행사로 발전하여 나례가 세속화함에 따라 儺戱로 변하여 갔다. 여기에서 優人 또는 倡優라고 불리던 직업적 배우가 발생하였고 그들이 공연한 優戱 또는 雜戱가 나희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12세기 초의 기록에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서 나희의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면 예종 11년(1116) 12월 己丑大儺의 기록일 것이다.

睿宗 11년 12월 己丑에 크게 儺禮를 하였다. 이에 앞서 宦者가 儺戱者를 좌우로 나누어 승부를 구하니, 왕이 또 親王에게 명하여 이를 나누어 주관케 한지라 모든 倡優 雜伎와 外官의 遊妓에 이르기까지 징발당하지 않음이 없어 遠近이 다 모여들고, 旌旗가 길에 뻗쳐 禁中에 가득 찼다. 이 날에 諫官이 閣門에 叩頭하여 간절하게 간하니 이에 명하여 그 심히 해괴한 자를 쫓아 내었으나 저녁이 되어 다시 모여들었다. 왕이 장차 樂을 관람코자 하니 좌우가 분연히 다투어 먼저 才伎를 보이고자 하여 도무지 조리가 없는지라 다시 백여 인을 쫓아내었다(≪高麗史≫ 권 64, 志 18, 禮 6).

 이 기록은 고려 전기의 궁중나례에서 환관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심지어 친왕에게 좌우의 승부를 주관케 하였고, 倡優·雜伎人·外官의 遊妓까지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나희의 정경을 가장 방불하게 전하는 것은 이색의 시<구나행>일 것이다. 제1구에서 제14구까지는 제1부를 이루는 종교적 행사를 읊은 것으로 나례 절차인 12神과 倡師와 侲子들이 역귀를 쫓는 의식을 묘사하였다. 12신은 12支神(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을 말하는 것으로 12신은 각기 제 가면을 쓰고 분장하였는데, 가령 子神은 쥐의 가면을 쓰고, 쥐의 모습으로 분장한 것이다. 창사와 진자도 각각 가면을 썼는데, 12세에서 16세 사이의 아이들 24인을 1대로 만들어, 아이 초라니탈을 쓰고, 붉은 옷을 입고, 22인의 악공 중 한 사람은 方相假面을 쓰고, 熊皮와 玄衣朱裳을 입고, 오른손에 창, 왼손에 방패를 들고, 방상씨로 분장하여 역귀를 쫓았다. 제15구 이하는 제2부로서 구나가 끝나면 여러 배우(群伶)들이 입장하여 상연하는 가무백희를 읊고 있다. 즉 五方鬼舞는 祭舞로서 前度處容舞에 비정한 의견도 있으나 이것은 후세의 五廣大놀이의 五方神將舞와 같은 것일 것이며, 白澤舞는 神獸舞 즉 사자춤을 가리킨다. 이같은 벽사의 제무에 이어 대륙 전래의 散樂인 呑刀와 吐火의 奇伎를 놀고, 이어서 혹은 검고 혹은 누런 탈을 쓴 西胡人의 탈춤과 老人星(壽星神)의 탈을 쓴 중국계의 춤을 보이고, 화교상인들의 양걸이(장대타기)의 날렵한 재주를 놀고, 後度處容舞에 이어 만석중놀이와 같은 꼭두놀음과 魚龍漫衍의 잡희 즉 百獸舞를 논다.0860) 李惠求,≪韓國音樂硏究≫(國民音樂硏究會, 1957), 294∼315쪽.

 이같이 고려 말 곧 14세기 중엽에 행해진 구나는 나례의식인 驅儺部와 제무와 잡기와 각종 놀이를 곁들인 儺戱部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은 신라 말의 崔致遠(857∼?)이<鄕樂雜詠五首>에서 읊은 五伎와도 대응되며, 또 조선시대 成俔(1439∼1504)의<觀儺詩>의 내용과도 연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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