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7. 무용과 연극
  • 4) 재인과 광대

4) 재인과 광대

 고려시대의 배우 특히 탈놀이를 하는 자를 廣大라고 부른다는 기록은≪고려사≫에서 찾을 수 있다. 충숙왕이 한때 왕위를 빼앗겼을 적에 한 이야기로 아래와 같은 것이 보인다.

옛날에 小廣大가 大廣大를 따라 물을 건너는데 배가 없는지라 여러 大廣大에게 말하기를 ‘나는 작아서 물의 깊고 옅음을 알기가 어려운데 그대들은 키가 크니 마땅히 먼저 물의 깊이를 측량해 보라’하였다. 모두들 그럴 것이라 하고 물에 들어갔다가 모두 빠져 죽으니, 홀로 小廣大만이 죽음을 면하였다. 지금 그러한 小廣大들이 우리 나라에 있으니 全英甫와 朴盧中이 바로 그들이다. 나를 禍網에 두고 태연히 앉아서 보고만 있으니 무엇이 이와 다르겠는가 하였다. 우리 나라말에 가면을 쓰고 놀이하는 사람을 廣大라고 한다(≪高麗史≫ 권 124, 列傳 37, 全英甫).

 또 高麗俗謠인<雙花店>에도 “조고맛간 삿기廣大”란 말이 보인다. 그리고≪고려사≫ 열전 崔怡條에서 “또 伶官과 兩部의 伎女와 才人에게 金帛을 주니 그 비용이 巨萬이었다”라고 하여 優人으로서 재인을 들고 있다. 광대는 가면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점차 가면을 쓰고 탈놀이를 하는 배우를 가리키게 되고, 다시 조선 후기에는 판소리 창우를 광대라고 하고, 땅재주나 기타 곡예 등을 하는 자를 재인이라고 하여 분업형태가 된다.

 배우를 가리켜 광대·재인이라고 부른 외에「楊水尺」이니「禾尺」·「水尺」 등이 있었다. 송대의 孫穆이 숙종 8년(1103)에 고려에 왔다가 지은≪鷄林類事≫에는 “倡曰水作”이라 하고, 또 “尺曰作”이라고 하였다. 丁若鏞의≪雅言覺非≫(권 3)에는 “水尺은 官妓의 별명이다. 지금 官婢汲水者를 巫玆伊라고 칭하는 것과 같다. 글로서 이를 풀어 보면 수척이니 巫는 水요, 玆는 尺이다. 汲水로서 얻은 것이 아니고, 妓의 古名에서 옮겨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시≪吏讀便覽≫에는 “水賜(伊), 音은 무수리, 뜻은 官婢의 一”이라고 보인다. 이를 종합하여 보면「水作」과 「水尺」·「禾尺」은 다같이「수자」 또는「무자이」의 한자표기이며, 후세에 수척은 관기, 汲水婢와 汲水漢의 별명이 되기도 하여 이들 노비와 창우와의 계급적 친근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또≪계림유사≫에는 “倡人의 아이를 故作이라고 하고, 樂工도 역시 故作이라고 하는데 倡人의 아이들이 樂工이 된다”고 하였는데, 창우와 악공의 친근성을 짐작할 수 있다.≪고려사≫에 보면 靖宗 11년(1045)에 악공의 자손은 과거를 볼 수 없게 하였고, 문종 7년(1053)에는 악공은 자식에게 세습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당시 천민층에 속하였던 악공과 창우의 사회적 신분제한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그대로 조선시대 말기까지 답습되었다.

 楊水尺은 고려 말기에는 화척이라고 하였고, 조선조 세종 때부터는 白丁이라고 개칭하여 양민화정책을 썼으나, 백정도 도로 천칭화되고,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대개 집단적 거주로 특수부락을 이루고 있었다.≪고려사≫ 최충헌전0872)≪高麗史≫ 권 129, 列傳 42, 崔忠獻 고종 3년.이나 ≪아언각비≫에 보면 양수척은 본시 국가의 호적과 부역에서도 제외된 존재로서 자유롭게 이주하며 생업을 영위하던 유랑민이다. 그들은 대개 사냥과 고리만들기, 나중에는 屠殺과 肉商 등을 생업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들 중 특히 柳器匠家는 기녀를 내는 본가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양수척과 배우와의 관계를 말하여 주는 것 같다. 사가들의 견해는 양수척은 “반수렵민족인 女眞人系나 유목민족인 契丹人系의 자손들로도 생각된다”0873) 李丙燾,≪韓國史(中世篇)≫(乙酉文化社, 1961), 346쪽.고 하였는데, 그들은 북방 유목민족계의 投化人들로 구성된 고려사회의 소수민족에서 유래된 것 같다. 이들이 일본의 중세 유랑연예인들인 구구쯔(傀儡子)와 자주 비교되어 왔었고, 다같이 집시(gypsy)의 후예가 아닌가 추측되기도 하였다.0874) 河竹繁俊,≪日本演劇全史≫(岩波書店, 1959), 67∼68쪽.

 고려는 거란·여진·몽고 등 북방민족의 침입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이들 민족이 세운 요·금·원 등 여러 나라가 흥망을 되풀이하는 동안 많은 유민들이 고려에 귀화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민속적 연희가 고려잡희 속에 혼입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예종 12년(1117) 8월, 왕이 南京(현재의 京畿道 楊州郡)에 갔을 때 그 곳에 흩어져 살던 거란투화인들이「契丹歌舞雜戱」를 보여준 일이 있다.0875)≪高麗史≫ 권 14, 世家 14, 예종 12년 8월 정묘. 그리고 충렬왕 이후 원의 부마국이 된 뒤로는 원을 통하여 유라시아 대륙문화와의 교류는 더욱 직접적인 것이 되었다. 또 충렬왕 9년(1283) 8월에는 원의 남녀 창우가 내조하니 米 3석을 하사하였고, 大殿의 연회에서 원의 우인들이 백희를 놀았으므로 白銀 3근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0876)≪高麗史≫ 권 29, 世家 29, 충렬왕 9년 8월 을사·기유. 李睟光(1563∼1629)의≪芝峰類說≫도 우리 나라 연희에 미친 대륙의 영향에 대해 “우리 나라 呈才人은 본래 중국의 俳優·幻術者流인데, 고려 말 魯國大長公主가 올 때 따라온 것이라고 전한다”고 하였다. 의종 때 상정된 法駕衛杖 즉 임금이 거동할 때의 의장을 보면 安國伎(Bokara伎)·高昌伎(Turfan지방伎)·天竺伎(印度伎)·잡기가 들어 있고, 燃燈衛仗에는 안국기와 잡기가 들어 있어 이 때까지 서역악이 존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0877)≪高麗史≫ 권 72, 志 26, 輿服 法駕衛仗.

 고려의 사회계급을 상류층(지배층)·서민층(양민)·천민층의 셋으로 나눌 때 천민계급은 津尺(津丁), 驛丁, 楊水尺(후의 禾尺), 才人(廣大), 工匠, 樂工, 奴婢, 部曲·鄕·島民, 商人 등이다.0878) 李丙燾, 앞의 책, 330∼347쪽. 고려의 악공과 배우들은 大樂署·管絃房 또는 敎坊에 소속되어 있었는데≪고려사≫에서 兩部樂官 또는 兩部伶官이라고 부른 것이 이들 鄕唐兩部의 악공과 배우들을 가리킨 것이다. 의종 때 상정된 西南京巡幸回駕奉迎衛杖에 의하면 서경과 남경을 순행하고 돌아오는 임금을 맞이할 때, 교방악관 100인이 좌우로 나뉘어 서고, 안국기 40인, 잡극기 160인이 각각 좌우로 나뉘어 서며, 吹角軍士 10인이 수레 앞에, 吹螺軍士 10인은 수레 뒤에 각각 나뉘어 섰다0879)≪高麗史≫ 권 72, 志 26, 輿服, 儀衛 西京南京巡幸回駕奉迎衛仗.고 한다. 이를 보면 回駕奉迎臺에는 교방악관과 안국기와 함께 160인의 雜劇伎人이 따로 들어 있다. 이것이 산대잡극의 배우들이며, 그 후의≪고려사≫의 용례로 보아 이들이 악관과 구별하여 영관이라고 부른 우인 또는 창우이며, 연극적인 행사를 전담한 직업적인 배우의 일단으로 보인다. 그들은 規式之戱와 笑謔之戱를 함께 놀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양부악관·양부영관이라 하는 이들 악공과 창우들은 관에 매인 천역이지만 이들 외에 상당수의 악공과 창우들이 민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민간의 그들에 대한 경제적 뒷받침은 충분히 존재하였다고 보인다. 즉 충혜왕 때에는 나희에 백공을 노역시키고 시중의 물자를 징발하여 그 비용에 충당하였으므로 시중의 전포가 모두 문을 닫을 정도였고,0880)≪高麗史≫ 권 124, 列傳 37, 盧英瑞 附 宋明理. ≪宋史≫ 高麗傳에 의하면 팔관회에 크게 잔치를 벌이는데 상인들이 비단으로 장막을 쳐 100필에 이르고 서로 부를 자랑하였다.

 고려는 개국 이래 농업생산의 발달과 함께 수공업과 상업도 점차 발전하였다. 수공업은 물론 관청수공업이 민간수공업보다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고, 상업은 개성이 국내 최대의 교역시장이었으며 상점도 점차 상설되었고, 지방에는 鄕市가 설치되었다. 대외무역은 역시 국가적 무역이 중심이었으나 개인적 무역도 행하여졌다. 이러한 市井 공상인들의 성장과 함께 그들의 오락적 요구에서 직업적 배우의 출현이 가능하게 되고, 가무백희도 10세기 이전의 단순한 가무백희에서 조희 즉 소학지희로 발전하게 된다. 우왕 13년(1387)에는 中秋에 6道의 창우를 東江에 모아 백희를 베풀게 하였는데,0881)≪高麗史≫ 권 136, 列傳 49, 신우 13년 8월. 이러한 내용을 보아 즉 직업적 배우가 전국적으로 많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 공양왕 원년(1389)에는 晉州優人 君萬이 虎患을 당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그 뼈를 거두어 장사지낸 일이 있다.0882)≪高麗史≫ 권 121, 列傳 34, 君萬. 權近(1352∼1409)이 지은≪陽村集≫에는 이 이야기가 좀더 자세히 다루어져 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우인 군만은 진주사람으로 伶優君子의 아들로서 그 아버지의 호환을 당하여 혼자서 범을 잡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이웃 고을 固城에 사는 선비 일곱 형제의 불효에 대해 “伶人이 아는 것은 詼謔이고 선비가 지키는 것은 예절인데, 선비된 자들 일곱이 도리어 영인 하나만 못하니 그 죄가 여섯”이라고 하였다.0883) 權 近,≪陽村集≫ 권 21, 傳, 優人孝子君萬. 여기에서 우리는 우왕 당시 지방도시인 진주고을에도 직업배우(伶人)가 있었으며, 그들은 詼謔 즉 익살과 재담을 주로 하는 조희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신정권기의 문신 李奎報(1168∼1241)가 창우에 대하여 지은 시에서 그 당시 창우들의 위치가 어떠한가 짐작할 수 있다. 普光寺주지 通師가 자랑하는 古笛을 찬양하는 시에 이어서 절에 모인 사람 10여 명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노는데, 마침 대궐에서 나온 큰 광대 두 사람이 놀이판에 이르자 광대놀이까지 겹치게 되었다고 하는 序가 있고, 끝부분에 가서 “너희들 놀음을 빌어 취중에 노래부른다”는 구절이 있다.0884) 李奎報,≪東國李相國集≫ 전집 권 8, 古律詩 題通師古笛. 또<燈夕入闕有感>에서 못난 선비는 광대들만 못하다고 한탄하기도 하였다.0885) 李奎報,≪東國李相國集≫ 전집 권 10, 古律詩 燈夕入闕有感. 한편 이규보는 다음의 시를 통해 당시 꼭두놀음(오늘의 꼭두각시놀음)을 본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조물주의 사람놀리기 꼭두놀음이나 진배 없고

달인은 꼭두 보길 제 몸 보듯하네

인생이나 꼭두놀음은 같은 것이라

결국은 누가 참이요 누가 참이 아니런가

굽혔다 폈다 찡그렸다 펴는 모습 거의 사람 같으니

누구의 솜씨로 똑같게 만들었나

사람도 한 기운을 따라 꿈틀거리며 사는데

그 기운 빠지면 꼭두놀음 마친 것 같을 뿐이네

 (李奎報,≪東國李相國集≫ 후집 권 3, 古律詩 觀弄幻有作).

 여기에서 말하는「弄幻」은 꼭두놀음, 오늘에 전하는 꼭두각시놀음 같은 傀儡戱를 가리킨 것이 분명하며, 조물주의 솜씨와 비교할 만큼 꼭두놀이군의 재주가 교묘하다는 것은 직업적인 대잡이(꼭두각시 조종사)의 솜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또 그 놀이 자체도 인생에 비유될 만큼 꼭두놀음의 미묘함을 직접 보고서 시를 쓴 것이 분명하다. 또 다른 시에서도 꼭두놀음을 읊고 있다.0886) 李奎報,≪東國李相國集≫ 전집 권 12, 古律詩 復答幷序. 이 시는 벗에게 주는 긴 화답시의 서두인데, 꼭두놀음과 조물주의 조화를 비교하였고, “온갖 형태 순식간에 없어지는데”라는 구절은 오늘의 꼭두각시놀음에서도 볼 수 있는 울긋불긋한 인형들의 단청과 소도구들을 묘사한 것 같으며, 특히 꼭두각시놀음의 끝장면에서 순식간에 절을 짓고 허는 것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이규보의 시<老巫篇>에서는 고려 중기의 무속을 짐작할 수 있고, 그것이 오늘의 京畿巫俗과 거의 같은 정형성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위에서 인용한 시에서도 오늘날 남사당놀이의 하나로 전해오는 덜미, 즉 꼭두각시놀음(일명 朴僉知놀음)이 이미 그 당시 흔히 볼 수 있었던 놀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0887) 조동일,<이규보가 본 꼭두각시놀음>(≪民俗文化≫ 3, 東亞大 韓國民俗文化硏究所, 1981).

 고려는 무신란과 몽고의 침입을 겪은 뒤 더욱 하층문화가 궁중에까지 진출하는 현상을 보였다. 당시의 관리와 장군들, 왕까지 직업적 배우들의 놀이를 모방하여 여러 가지 놀이를 하였음은 앞에서도 인용한 바가 있지만, 고종 때 宋景仁은 내전의 曲宴에서 처용희를 하되 “취함을 타서 戱舞하는데 조금도 부끄러운 빛이 없었다”0888)≪高麗史≫ 권 23, 世家 23, 고종 23년 2월 임인.고 한다. 또 충렬왕 때 상장군 鄭仁卿이 주유희를 하였고, 장군 簡弘이 창우희를 한 것과0889)≪高麗史≫ 권 30, 世家 30, 충렬왕 14년 9월 임자. 고종 때 御史中丞 장군 林宰가 창우무를 추었으며,0890)≪高麗史≫ 권 129, 列傳 42, 崔忠獻 附 怡 고종 33년. 우왕은 처용가면을 쓰고 놀이하였다.0891)≪高麗史≫ 권 135, 列傳 49, 신우 12년 정월.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하여 볼 때 고려사회의 상하층에 일반화되었던 戱劇에 대한 好尙과 아울러 당시의 직업적인 배우들의 사회적 지위를 짐작할 수 있다 하겠다.

<李杜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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