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8. 체육
  • 1) 격구

1) 격구

 擊毬는 말을 타고 공을 치는 폴로(Polo)형식의 경기를 말한다. 격구는 馬術의 변형된 형태로, 원래 武藝24般의 하나인 마술에 부수하여 실시된 것이지만 무예훈련의 차원보다는 스포츠화된 것이다.

 격구에 관한 최초의 기사는 고려 태조 원년(918) 尙州의 적장 阿字盖가 사자를 보내어 귀순하려 하자 왕이 그를 맞이하는 의식의 연습을 毬庭에서 하게 하였다는 것이다.0892)≪高麗史≫ 권 1, 世家 1, 태종 원년 9월 갑오. 이것을 보면 개국 초에 궁전의 일부 또는 외곽에 격구를 위한 毬場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당시에 격구경기를 공개적으로 하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격구의 기원과 전래계통을 살펴보면 중국에서는 唐 太宗(626∼649) 때부터 擊毬戱 혹은 打毬(馬毬, Polo)가 있었다. 그 발원은 페르시아로, 그 후 서쪽으로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동쪽으로는 터어키로 전파되고 다시 중국의 西藏과 인도 등 각지로 전파되었다.0893) 吳文忠,≪體育史≫(正中書房, 1982), 297쪽. 즉 격구가 당을 거쳐 고구려를 비롯하여 신라·백제에 전래된 것은 7세기 중엽으로 이미 삼국시대부터 격구를 행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고려시대에 더욱 활발하게 실시한 것으로 나타난다.≪高麗史≫에는 태조에서부터 15대 숙종까지 188년간 구장을 승려의 공양·친초·양재 또는 군신의 하례장 등으로 사용하였다는 기사가 있다지만, 물론 이 구장은 본래 설치의 목적대로 사용되었다고 하겠다.

 예종 5년(1110)에는 왕이 두 번 神騎軍의 격구를 친히 사열하고 하사품을 내렸으며, 동왕 11년에는 왕이 西京에 행어하였을 때 왕을 환영하기 위한 행사중에 부녀로 하여금 말을 달리어 격구를 하게 하였으나 왕이 하지 못하게 명하여 여자의 격구는 드디어 없어지고 말았다.0894)≪高麗史≫ 권 14, 世家 14, 예종 11년 4월 신묘. 부녀자까지도 격구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이 경기의 보편화 정도를 대변하는 것이라 하겠다. 18대 의종은 특히 격구를 좋아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의 격구기술을 다시 시험하지 말라고 하며 공을 치는데 따를 자가 없었을 만큼 명수였다.0895)≪高麗史≫ 권 17, 世家 17, 의종 원년 5월 정해. 또 가뭄이 들었을 때에도 격구를 하고 諫官이 간하는 것을 쉽게 듣지 않다가 마침내 말을 다 내보내고 日官으로 하여금 북문을 막아버리도록 하였다.0896)≪高麗史≫ 권 17, 世家 17, 의종 6년 4월 신사. 한편 기마와 격구를 좋아한 왕은 奇卓誠을 뽑아 牽龍을 삼고 항상 가까이에 두었다고 한다.0897)≪高麗史≫ 권 100, 列傳 13, 奇卓誠. 윗사람이 좋아하면 아랫사람들도 역시 좋아하게 되어 신하들도 격구에 탐닉하고 열심히 하는 자가 많았을 것이다.

 고종 때의 집권자였던 崔怡는 인근의 집 100여 동을 헐어내고 구장을 축조하였는데, 동서로 수백 보나 되고 평탄하기가 바둑판과 같았으며 격구할 때마다 동네사람으로 하여금 물을 뿌려 먼지가 일지 않게 하였다.0898)≪高麗史≫ 권 129, 列傳 42, 崔忠獻 附 怡 고종 16년. 이 기사로 미루어 격구의 수준과 규모를 짐작케 한다.

 그리고 재상들 가운데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마구를 장식하였는데 말안장 하나의 값이 여염집 열 채의 재산에 해당되는 등 그 사치스러움이 백성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끼쳐 충숙왕 원년(1314)에는 금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기에 대한 열의는 막지 못하여 관리들 사이에는 사찰 등지에서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경기를 치르는 경우도 있었고 끝내는 부활되었으나 공민왕 23년(1374)에 다시 법으로 금하기도 하였다. 한편 원나라는 단오날이 되면 고려와 격구시합을 하였다고0899)≪武藝圖譜通志≫ 권 4, 馬上才. 하며≪고려사≫에 의하면 宋和가 격구하는 모습을 보고 元帝가 「神助」거나 「幻術」이라 할 정도로 놀라워했다고 한다.0900)≪高麗史≫ 권 124, 列傳 37, 尹秀 附 吉甫. 고려의 격구 수준이 높았음과 동시에 동아시아에서의 스포츠교류를 증명한다. 다음은 격구경기를 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高麗 때 매번 단오절에 무관으로 연소자 및 귀족의 자제를 미리 뽑아 擊毬의 禮를 가르쳤다. 그날에 이르러서 九逵의 傍에 龍鳳帳殿을 설치하고 殿 앞 좌우로 각각 200보쯤 길 가운데 毬門을 세운다. … 두 팀으로 나누어 좌우에 선다. 기생 한 사람이 공을 들고 들어오는데 걸음을 주악에 맞추고 殿 앞에 이르면 노래를 부른다. 노래가 끝나면 물러나가고 역시 주악에 맞추어 공을 길 가운데로 던진다. 좌우의 팀은 모두 말을 달려서 공을 다툰다. 맨 먼저 쳐서 맞힌 자를 首擊이라 하고 나머지는 모두 물러선다. 도읍의 남녀 구경꾼이 산처럼 모였다(≪龍飛御天歌≫권 6, 제43장).

 또한 격구는 실시하는 장소와 그 참가자의 신분에 따라 성격을 달리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의종 때 왕이 北園에서 놀며 기사에 격구를 명하였으며, 공민왕 때 왕이 奉先寺 松岡까지 걸어가서 격구를 관전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서 볼 때 북원과 같은 광대한 장소에서는 군사들이 무예훈련의 한 방편으로 실시하고, 내정 또는 산사 등에서는 상류층 조신들이 여가를 즐기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던 것 같다. 따라서 후자의 경우가 더욱 스포츠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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