蹴鞠은 엄격한 규칙 아래 형식을 갖추어 실시된 것은 아니지만 놀이성을 지닌 공을 차는 경기로 오늘날의 축구와 비교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축국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널리 행해진 것이≪舊唐書≫·≪隋書≫·≪三國史記≫·≪三國遺事≫ 등의 기록을 통하여 확인되는데 놀이의 형식은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의 정조 14년(1790) 韓嶠가 저술한≪武藝圖譜通志≫를 보면 단편적인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仲無頗의<氣毬賦>에서 “저쪽에서 뛰면서 굴러서 蹴鞠을 준다. 어느 발로나 찬다”고 하였다.<初學記>에서는 “鞠은 곧 毬자이다. 오늘날의 蹴鞠은 공놀이로 옛날에는 털을 사용하여 헝클어진 것을 얽어서 하였다”고 하여 털뭉치 등을 발로 차는 즐거운 놀이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불어 넣은 공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다음의 시를 통하여 고려시대의 놀이는 한층 발전된 기구를 사용하였음을 볼 수 있다.
공에 바람을 넣어 사람들이 모여 차다가
바람이 빠져 사람들이 또 헤어지니 쭈그러진 빈 주머니가 남았다.
(李奎報,≪東國李相國集≫ 후집 권 6, 古律詩 偶見氣毬回寓意).
그러나 이러한 단편적인 자료만 가지고 운동의 형식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축국의 전래 경로를 살펴볼 때 중국으로부터 한국을 거쳐 일본에 전파된 시기가 8세기로 들어가기 전이며0909) 羅絢成,≪韓國體育史硏究≫(文泉社, 1979), 151쪽. 계속되는 중국과 교류가 있었음을 염두에 둔다면 고려와 같은 시기 송의 축국을 살펴봄으로써 운동형식을 짐작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북송에서는 두 개의 구문을 사용하는 축국과 한 개의 구문을 사용하는 축국이 행하여졌다. 한 개의 구문을 사용하는 축국은 대체로 북송 말부터 시작하였고 청나라 중엽에 와서는 하지 않게 되었다. 구문의 크기는 높이가 약 3丈 정도이며 많은 5색천이 매어졌다. 북송시대에는 매년 10월 12일에 궁정에서 축국을 하였는데 경기법·인원·복장·승패에 대한 규정은 다음과 같다.0910) 笹島恒輔,≪中國體育史≫(逍遙書院, 1960), 67∼68쪽.
① 경기법-중앙에 세원진 구문의 양쪽에 두 팀이 마주 보고 선다. 먼저 공을 잡은 팀이 패스를 하여 구문을 통과, 상대의 진영에 차 넣는다. 상대는 그 공을 받아 구문을 통과시켜 다시 상대의 진영으로 차 보내는 것을 계속한다. 경기를 하는 동안에는 음악이 연주되었다. ② 인원-10여 명 ③ 복장-좌군은 홍금의, 우군은 청금의를 입으며 주장은 매듭이 긴 幞頭를, 나머지는 짧은 매듭의 복두를 착용한다. ④ 승패규정-승자에게는 銀碗과 錦布를 하사하고 패자의 주장은 鞭打를 당하며 수모를 겪었다.
물론 고려시대의 축국이 반드시 이것과 일치한다고 할 수 없지만 문화의 교류현상에 비추어 볼 때 유사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삼국시대로부터 조선 말기까지 성행된 사실은 병사들의 훈련에서 시작된 것이 시대가 변천하여 가는데 따라 흥미있는 오락경기로 대치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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