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9. 민속
  • 2) 민속놀이
  • (4) 오락적 내용

가. 위기

 「圍碁」는「바둑」·「奕棋」·「博奕」·「手談」이라고 하는 오락으로 두 사람이 흰 돌과 검은 돌로 바둑판에 돌을 벌여 집을 많이 짓는 것으로 승부를 낸다. 이 오락은 오래 전부터 우리 민족이 즐겼던 것으로 나타나는데≪구당서≫에는 “고구려사람은 圍棊·投壺의 노름을 좋아하고 蹴鞠에 능하다”1124)≪舊唐書≫ 권 199, 列傳 149 상, 東夷 高麗.하였고≪北史≫에는 “백제에서는 投壺·樗蒲·弄珠·握槊 등의 잡희가 있는데 바둑을 더욱 소중히 여겼다”1125)≪北史≫ 권 94, 列傳 82, 百濟.고 하였다. 삼국시대에 이어 고려시대에도 바둑은 매우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 왕을 비롯한 상류층에서는 오락으로서 교제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공민왕은 특히 바둑을 좋아하여 술내기와 시쓰기 등 내기도 하였다.1126)≪高麗史≫권 41, 世家 41, 공민왕 17년 6월 기미·22년 9월 무진. 충렬왕 때 바둑의 명인으로 曹允通이 있었다. 원의 世祖가 바둑 잘 두는 사람을 불러서 시험하였는데 윤통이 이기므로 역마를 타고 마음대로 왕래하도록 허락하였다.1127)≪高麗史≫권 123, 列傳 26, 曹允通. 또한 郭氏 성을 가진 어린이가 바둑을 잘 두어 늘 晉陽公 앞에서 두었다고 한다. 이규보는 이를 두고서 시를 지었다.1128) 李奎報,≪東國李相國集≫후집 권 10, 古律詩 神童國手詩.

 고려시대에는 신하들 사이에 바둑과 주색에 빠진 폐해가 생기고, 민간에서도 내기바둑으로 아내까지 빼앗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에 중국상인 賀頭綱이 있었는데 바둑을 잘 두었다. 그가 한번은 禮成江에 갔다가 어떤 아름다운 부인을 보고서 바둑으로 내기를 걸어서 그녀의 남편과 바둑을 두어 거짓으로 져서 물건을 갑절로 치뤄주었다. 그녀의 남편은 이롭다 생각하여 아내를 걸었다. 頭綱은 단번에 이겨 배에다 싣고 가버렸고, 그 남편은 한에 차서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배가 바다 가운데 이르자 뱅뱅 돌고 나가지 않아서 점을 쳤더니 ‘節婦에 감동되었으니 그 여인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배는 반드시 파선하리라’하므로 뱃사람들이 두려워하여 頭綱에게 권해서 그녀를 돌려보냈다. 그 부인이 역시 노래를 지었는데 후편이 그것이다(≪高麗史≫ 권 71, 志 25 樂 2, 俗樂 禮成江).

 바둑은 말없이 손으로 두며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므로, 서로 손으로 대화한다고 하여 이숭인은「수담」이라고 했다.1129) 李崇仁,≪陶隱先生詩集≫ 권 1, 觀人圍碁. 이색 역시 바둑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가지고 예전 바둑알의 모양과 이치에 대해서 글을 남겼다.1130) 李 穡,≪牧隱詩藁≫권 1, 記, 記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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