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10. 의식주생활
  • 1) 의생활
  • (4) 고려 후기의 복식

(4) 고려 후기의 복식

 고려는 공민왕 5년(1356)에 이르러 원의 연호를 폐지하고 관제를 고쳤다.1163)≪高麗史≫ 권 39, 世家 39, 공민왕 5년. 원의 간섭을 벗어나, 명과 통교한 것이다. 이에 따라 명은 공민왕 19년 5월 冊封使를 보내 冠服을 내리고, 고려는 본래의 풍습을 따르도록 했다1164)≪高麗史≫ 권 42, 世家 42, 공민왕 19년 5월.. 양상은 고려 초기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데, 사대의 명문을 세우고 왕조의 정통성을 다진다는 것이 그 함축이다. 고려 후기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고려와 명은 관복을 청하고, 관복을 내리기를 거듭하였는데 우왕 13년(1387) 6월에 이르러 호복을 혁파하고 명제를 따르니, 1∼9품의 백관이 紗帽와 團領을 착용하되 직급에 따라 品帶에 차등을 두었다.1165)≪高麗史≫ 권 72, 志 26, 輿服. 대개 이것은 송제를 이어받은 것으로 창업 초기 조선조로 전승된다.

 이 시기에도 일반의 복식생활이 어떠했었는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다만 앞에서 말한 불상복장품인 백저의가 발견됨으로써 비로소 복식의 실물고증이 가능해진 것은 고려시대 복식사연구의 획기적인 일로 꼽힌다.

 우리 복식사에 가장 오래된 遺衣라고 할 백저의는 瑞山郡 雲山面 胎封里 소재 文殊寺 極樂寶殿의 金銅如來像 몸통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1973. 12). 이 때 여러 점의 직물 단편과 보자기·주머니가 함께 나왔고, 불상조영의 발원문에 의해 이것들이 충목왕 2년(1346) 무렵의 것임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백저의의 연대는 고려가 원의 연호를 폐지하기 직전, 원 간섭기 말기의 것이다.

 조사에 의하면 백저의는 기장 111㎝, 화장 42㎝, 소매길이 10.8㎝인 短袖袍形衣로 감은 폭 35㎝에 27올, 12升쯤의 生紵이며, 바느질은 견고하나 그리 정교하지는 못하다. 형태는 목판 깃의 直領交袵, 짧은 소매, 옆의 주름과 트임, 옷 고름이 없는 점 등을 특징으로 꼽을 수가 있다.1166) 柳喜卿,<腹藏遺物>(≪美術資料≫ 18, 國立中央博物館, 1975).

 백저의의 쓰임이 어떠했는지는 자세치가 않으나, 그 모양은≪고려도경≫에 보이는 승복 중 “短紬偏衫”(大德) 또는 “白紵窄衣”(在家和尙)라 한 것에 가장 가까운 듯하다.1167) 徐 兢,≪高麗圖經≫ 권 18, 道敎·釋氏, 阿闍梨大德·在家和尙. 그러나≪고려도경≫에는 국왕 이하 평민에 이르기까지 남녀가 모두 백저포를 입었다는 기록이 눈에 띄므로1168) 徐 兢,≪高麗圖經≫ 권 29, 供張 2, 紵衣. 백저의가 고려시대의 기본복이었음을 알 수가 있는데, 문수사 백저의가 그같은 복식생활의 일단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또한 이 유물에 고름이 없음은 여밈을 띠로 처리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는 우리 옷의 기장이 짧아져서 고름이 생긴 시기를 유추해 보는 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삼국시대에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직조기술은 고려시대로 이어졌다. 삼국시대에 이미 해외로 수출했던 白紵1169)≪三國史記≫ 권 11, 新羅本紀 11, 경문왕 9년 7월.는 색깔이 결백하여 옥과 같다고 하였으며,1170) 徐 兢,≪高麗圖經≫ 권 23, 雜俗 2, 土産. 충렬왕 때에 이르러 花紋細苧布가 처음 나왔다고 한 것1171)≪高麗史≫ 권 30, 世家 30, 충렬왕 15년 4월. 등에 비추어 그 기술이 더욱 발달했음을 짐작케 한다.

 또한 絹織이 상당한 수준에 올랐음은≪고려도경≫에서 文羅·花綾 등을 기교있게 짠다고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견직의 원료는 중국에서 들여오며, 북방 오랑캐의 포로와 귀화인에 의하여 그 기교가 전보다 발달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에도 중국과의 직물교역이 성하여 복식생활을 살찌웠다. 대개 紗羅綾緞 등 고급 견직물을 수입하고, 특산품인 紵麻를 수출한 것인데, 고급 견직물의 밀무역이 성행하고 그로 인한 복식의 사치와 낭비가 지나쳐 물의를 빚기도 했다. 성종 원년(982)에 崔承老가 올린 시무28조에 공복의 옷감이 모두 수입품임을 말하고, 서민은 무늬있는 비단을 입지 못하도록 하여 복식제도의 사치와 검소함을 알맞게 할 것을 건의하고 있음이 그 한 예이다.

 어쨌든 직조기술과 교역의 발달은 고려시대 복식생활을 더욱 다양하게 했을 것으로 짐작되며, 그 일단은 앞에서 설명한 문수사 복장유물로서 확인할 수 있다. 백저의와 함께 발견된 직물류는 紵·綾·絹·紬·緞과 紵 등 여섯 종류에 이르고, 그 무늬도 용·나비·원앙·거북·새 등의 동물문양, 당초·모란·꽃 등의 식물문양, 구름·물결 등의 자연문양 등 12가지, 색깔은 靑·紅·黃 등 11가지로 아주 다양한 것이다.

 끝으로 특기할 것은 고려 후기 목화의 전래인데, 공민왕 12년(1363) 文益漸이 목화씨를 원에서 들여온 것이다.1172)≪太祖實錄≫ 권 14, 태조 7년 6월 정사. 그러나 그 이전에도 무명에 관한 기록이 보이고, 충렬왕 22년(1296)에는 원의 成宗이 무명 411필을 내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1173)≪高麗史≫ 권 31, 世家 31, 충렬왕 22년 12월 신해. 따라서 목화의 재배가 문익점시대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을 가능성도 엿보이나, 목화가 널리 보급되고, 무명이 기본 옷감으로 되는 것은 문익점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인 것이다. 이로써 복식생활이 윤택해짐은 물론, 그 때까지 연면히 이어졌던 우리 옷의 전통은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맞게 된다.

 이처럼 고려시대 복식은 상고복식과 근세의 한복양식을 잇는 가교적 위치를 차지하며, 밖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도 우리 옷의 양식 특성을 잘 간직했던 것으로 평가할 수가 있다.

<李京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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