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 경작한 곡물은 전 시대에 이어 쌀·보리·밀·메밀·조·기장·수수·팔·콩·녹두·율무·깨 등이며 그 중 쌀은 주식곡이면서 물물교환의 가치기준이었고 녹봉의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고려는 초기부터 역대 왕이 미곡증산에 주력하였다.1174) 震檀學會,≪韓國史≫ 中世篇 (乙酉文化社, 1961), 164∼172쪽. 태조 왕건은 백성에 대한 세금을 줄이고 토지제도를 정비하였으며 광종 24년(973) 개간한 농지에 대해서는 세금을 내려주었다. 또 성종 2년(983)에는 籍田을 실시하여 왕이 스스로 권농에 참여하였으며, 성종 6년에는 각 주와 군의 병기를 모아 농구제조에 쓰게 하였다. 현종 9년(1018)에는 북으로부터 온 난민에게 나라에서 소를 대여하고 농구를 보냈으며, 고종 46년(1259)에는 빈민에게 곡식 씨앗을 보내는 등 역대 왕들은 적극적인 권농정책을 시행하였다. 또한 역대에 걸쳐 관개시설을 수축하고, 각 지역에 勸農使를 파견하였으며, 義倉을 확대하고 常平倉을 두어 구휼과 곡가안정에 대처하는 등 농산증대에 힘썼으므로, 양곡증산으로 비축량도 늘어났다.≪高麗史≫ 食貨志에는 “문종이 절검 간소한 생활을 하여 大倉의 곡식이 쌓여 썩을 만큼 자급자족할 수 있는 정치를 폈다”고1175)≪高麗史≫ 권 77, 志 32, 食貨 1. 기록되어 있다.≪高麗圖經≫에서도 “大義倉이 서문 안에 있는데 쌀이 300만이 쌓여 있다”고1176) 徐 兢,≪高麗圖經≫ 권 16, 官府 倉廩. 하였다.
한편 역대로 飯僧行事의 규모가 수만 명에 이르렀고, 당시의 수도 개경에 설치된 상가 長廊에서는 10칸 간격으로 불상과 白米漿을 준비하여 길가는 사람들에게 베풀었다.1177) 徐 兢,≪高麗圖經≫ 권 23, 雜俗 2, 白米漿. 이러한 사례는 숭불사조와 관계가 깊은 것이지만 미곡증산의 배경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어서 이러한 환경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 나라 병과류의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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