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10. 의식주생활
  • 3) 주생활
  • (1) 백성의 살림

(1) 백성의 살림

 妙淸의 난, 무신집권과 권력을 둘러싼 무신들의 상쟁, 몽고침입, 홍건적의 습격 등 고려 후기에 발생한 안팎의 시련으로 인해 백성1209)≪高麗史≫ 권 93, 列傳 6, 崔承老. “최승로가 아뢰기를 … 사람마다 절 짓기 좋아하니 그 수가 심히 많다. 또 중외의 승도들이 사사로이 살 집을 다투어 지으면서 州郡의 長吏들에게 부탁하여 인부를 징발하여 부리는데 급하기가 公役보다도 더하니 사람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원컨대 엄히 다스려 금단하여 백성들이 노역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에서 최승로의 백성이란 개념을 받아들였다.들은 고달펐다. 그들은 궁실이나 관아, 군사시설 그리고 무수한 사원건축에 수시로 동원되고 부역하였으므로, 자기들 집은 급한 대로 꾸리고 사는 정도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였지만 고려 말기엔 잦은 왜구의 노략질까지 겹쳐 백성들은 쉴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따라서 전문 기술인력을 초빙하고 멋부려 짓는 일은 백성들로서는 엄두도 못낼 형편이었다. 그들은 주변에서 채집하거나 쉽게 얻을 수 있는 자재로 여럿의 힘을 합쳐 집을 짓고 거기에 살았다.

 그런 집들은 대부분 원초적이어서 옛적에 짓던 집이나 진배없었다. 굽은 나무 삭정이, 고샅의 나무등걸, 장대와 굵은 나무등치, 이엉, 억새, 지릅, 갈대와 싸리, 시누대, 수숫대와 나무껍질, 흙과 여물 그리고 알맞은 돌 등이 요긴하게 쓰이던 건축재료이다. 세우고 건너 지르고 묶고 꽂아 가며 집짓기는 완성된다. 이는 지금도 시골집에서 볼 수 있는 구조와 아주 흡사한데, 태고적부터 오늘에 이어지고 있는 것이며 어느 시대에나 지어지던 집의 한 유형이다.

 선사시대의 집이 지표 아래에 기반을 마련하였던 것이라면 시대가 흐르면서 차츰 지표에 가깝게 기반이 상승하고, 마침내 지표 위에 나타났다가 지표로부터 점점 높아져 가는 경향에 따라 형상이 달라진다. 고려 후기의 건축도 그런 흐름 속에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北境개척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므로 통일신라기에 비하여 북방영토가 확장된다. 그 영향으로 인해 집의 형상은 유형으로 분류하여 볼 때 한층 다양하게 되고 이성계의 선대가 거처하였다고 하는 陶穴而居1210)≪太祖實錄≫ 권 1, 總書.의 종류까지 등장하였다. 이것은 다분히 대륙적이며 고구려의 옛 땅에서 볼 수 있는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부·남부지역의 경우, 지역적 특성에 따른 집의 구조가 전기와 유사하였고 그것은 후대에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 전기에도 그랬지만 후기에도 백성들이 집을 지을 때 국가보조 등의 혜택은 거의 없었다. 큰물이 져서 마을이 휩쓸려 갔다던가1211)≪高麗史≫ 권 53, 志 7, 五行 1, 의종 19년 6월 병신. 불이 나서 수많은 집이 연소되거나,1212)≪高麗史≫ 권 28, 世家 28, 충렬왕 2년 윤3월 경자. 권세 있는 宰臣이 자기 집을 확장하려 이웃 백성들의 집을 헐었다던가1213)≪高麗史≫ 권 129, 列傳 42, 崔忠獻 附 怡. 궁궐을 짓기 위하여 헐어 냈다던가1214)≪高麗史≫ 권 18, 世家 18, 의종 20년 4월 갑오. 등의 사례가 발생하였을 때 구휼의 차원에서 일부 보조가 있는 정도였다. 외국에서 투화하거나 내부한 자에게 집을 내리거나 공헌한 백성에게는 賜家제도도 있었다. 이는 이미 있던 집을 내주게 하는 소유권의 이동이었으므로 그들을 위하여 국가에서 따로 짓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백성의 집은 자연히 질박할 수밖에 없었다. 도성내도 마찬가지였다. 송나라의 사신으로 開京에 와서 머물며 견문한 徐兢의 눈에 비친 백성의 집도 소박한 것이었다.1215) 徐 兢,≪高麗圖經≫ 권 3, 城邑 民居.

 개경은 광활하고 평탄한 고장이 아니라 높고 낮은 산이 연이어 있는 지형이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그런 지형에 도읍하여서 낮은 산의 중턱이나 기슭에 터 잡고 궁전을 비롯한 중요한 건축물들이 들어서야 했다. 도성의 북부는 산이 더 많고 동부와 남부가 비교적 평탄한데 편평한 자리는 市廛과 관아와 사원이 차지하였다. 따라서 백성의 집은 그들을 피해야 했으므로 주로 산기슭에 자리잡았다.

 산기슭의 집은 시골집과 유사하다. 숲이 우거진 시골에서는 지붕에 나무껍질을 벗겨다 잇기도 하는데, 최상의 것은 떡갈나무 껍질이었다. 충숙왕도 그런 시골집을 본떠 임시로 머무를 行在所의 집을 짓기도 하였다.1216)≪高麗史≫ 권 35, 世家 35 충숙왕 16년 정월. 우리에겐 그런 기법이 남아 있지 않지만 일본에는 회나무 속껍질을 벗겨 지붕을 잇는 기술이 전승되고 있다. 아주 얇게 종이처럼 속껍질을 손질하여 수십 겹을 겹친다. 그것으로 지붕을 이어 두터운 지붕이 되면 수십년간 견딜 만하다. 궁궐이나 사원 또는 신사의 중심건물 지붕도 그렇게 만든다. 일본은 삼국시대 이래 선진문화를 흡수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 기법도 도입한 것이라면 고려시대 떡갈나무 껍질을 잇는 기술과 연계시켜 볼 수 있다. 서긍이 본 도성건물 중에 이런 떡갈나무 껍질을 이은 집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조선조에 굴피집이라고 하여 나무껍질 표피까지 한꺼번에 덮던 방식과는 다른 유형이다. 아주 고급스럽다. 그래서 호사하는 충숙왕도 그것을 이은 행재소에서 만족스럽게 머물고 있었다.

 도성내에 집이 즐비하여 어디에서나 집을 볼 수 있었다. 공민왕 때 홍건적 침입이라는 지독한 전란으로 도성내 집이 반으로 줄어버리고 말았다. 집이 헐리거나 불타버린 빈터를 부자들이 재빨리 점유하는 바람에 가난한 백성들은 집을 짓고 싶어도 할 수 없어 전쟁 이전과 같은 볼 만한 구경거리를 다시는 이룩하지 못하였다.1217)≪高麗史≫ 권 85, 志 39, 刑法 2, 공민왕 4년 3월.

 집이 열 채 있으면 그 중 두어 채는 기와집이라고 서긍은 말하였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충선왕은 도성내 초가를 전부 기와로 이으라고 지시하였다. 五部의 민가 전부를 기와로 이으라는 분부이고 개인이 경영하는 기와굴을 금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1218)≪高麗史≫ 권 33, 世家 33, 충선왕 원년 8월 신해.

 백성들은 구들을 놓은 온돌방에서 혹독한 겨울을 지냈다. 집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 서긍은 보편적인 크기가 “不過兩椽”이라고≪高麗圖經≫에 쓰고 있다. 이 글은 신라시대나 마찬가지로 아직도 1室1棟制이어서 단위건물은 규모가 적었고 그런 건물 여러 채가 한 집의 경내에 벌여 놓여져 있었다고 해석해야 한다. 이런 추세는 삼국시대에도 마찬가지였는데, 그것은 고구려고분의 벽화에 묘사된 내용으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조에도 계승되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흐름에 속한다.

 ≪高麗史≫의 여러 군데서 凉樓의 명칭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조선의 태조 李成桂가 壽昌宮에 지은 凉廳1219) 申榮勳,<朝鮮初 凉廳考>(≪건축역사연구≫ 1, 1992).을 닮은 마루깐 다락집이라 보이는데, 이 양루가 살림집에도 채택되었다고 생각된다. 고려시대 살림집터 발굴성과가 아직 축적되어 있지 않아 당시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자료는 아주 미약하다.1220) 평안북도 신의주시 위화도에서 1959년에 고려시대 집터가 발굴되었는데, 구들을 놓은 방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또 그릇으로 사용하였다고 보이는 질그릇과 연장들이 같이 나왔다. 화려하거나 웅장한 규모는 아니다(서국태,<신의주시 상단리의 고려 집자리>,≪고고민속≫1, 1966).

 문경의 새재 길가에 원터라 전하는 곳이 있어 발굴하였더니 고려시대 건물터가 나타났다. 고래 켜서 구들을 들였던 흔적과 함께 당시 사용하였던 은제 방울·동제 가위·숟가락과 머리빗 등이 나왔다. 한쪽에 디딜방아를 설치하였던 자리가 있고 다른 건물자리에서는 말굽쇠와 말굽에 박았던 징도 출토되었다.1221) 洪思俊·申榮勳·李東寧,≪傳鳥嶺院址發掘調査報告書≫(聞慶郡, 1985).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방물들이 나와서 당시 생활의 일면이 밝혀졌는데 조선조의 살림살이와 유사하다.

 질그릇 깨진 조각이 무수히 수습되었다. 다른 곳을 발굴할 때에도 질그릇 조각은 많이 모아진다. 궁궐·사찰·성곽의 터에서도 자기편보다 도기편이 더 많이 수집된다. 이는 질그릇이 생활용구의 기본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하여도 좋을 것이다. 백성들의 살림살이도 그와 같았다고 하겠다.

 목기의 사용도 보편적 경향이었다. 칠을 입힌 것은 역시 고급스러운 것에 속하였다. 식기류는 더구나 그랬다. 철기·동기는 때로 금·은제와 더불어 사용을 못하게 하기도 하였다. 버들로 엮은 것을 공급하는 천민들이 있었다. 鄕이나 部曲에서 공급하였는데 쇠를 다루어 솥을 주물하고 갖바치가 신발을 만드는 등 생활용구의 제조와 공급이 다양하였으므로 유물을 남긴 유형들과 함께 적지 않은 용품들이 사용되었다고 보여진다.

 光明頭(등잔걸이) 등의 유품에서 조명용으로 관솔이나 기름이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밀납의 초도 있었다. 이런 것은 통일신라나 조선조와 유사하므로 당시 살림살이나 생활하는 터수는 그전이나 뒷시대에 살던 백성들과 거의 같았으리라고 믿어진다.

 고분과 도요지에서 출토되는 각종 陶製와 자기의 유형은 참으로 다양하다. 문화생활에 요긴하게 쓰였을 것으로 멋부린 것도 적지 않다.≪고려도경≫에 개경에서 직접 체험한 일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서긍이 경험한 내용을 보면 기물의 종류가 대단히 다양함을 알 수 있다. 당시의 문화생활 수준이 신라통일기 보다 저하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