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10. 의식주생활
  • 3) 주생활
  • (2) 제택의 규모와 생활

(2) 제택의 규모와 생활

 다른 시대나 마찬가지로 이 시기에도 家舍가 제도를 넘는 것은 권력 있는 사람들의 무분별한 경영에서 비롯되고 있다.

 최승로는 당시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여러 주·군·현과 정·역·진에서 토호들이 서로 다투어 큰 집을 지으므로 제도를 넘어선 것이 한두 채가 아니라고 하였다. 또 이는 실로 백성들의 고역이며 그 피해 또한 적지 않으니 禮官에게 명하여 가사제도를 정하게 하고 중외에 영을 내려 지키게 하며 지나친 집은 헐어 내어 뒷사람에게 경계해야 한다고 하였다.1222)≪高麗史≫ 권 93, 列傳 6, 崔承老. 선종이 총애하던 신하의 첩인 萬春은 백성을 동원하여 큰 집을 지었으므로 憲府에서 임금에게 탄핵하였으나 반응이 없었다.

 법이 있어도 준수될 그런 형편이 아니었다. 워낙 크고 장려한 집이 많았다. 이런 예도 있었다. 병부상서를 지낸 朴純弼이 동궁 바로 옆에 크게 집을 지었다. 동궁의 月建方에 해당하는 방향이어서 금해야 마땅하였으나 태자는 힘이 없었다. 임금인 명종에게 못하게 말려 줄 것을 호소하자 임금은 내 말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액이 멸하기를 기다리라고 하였다.1223)≪高麗史≫ 권 100, 列傳 13, 朴純弼. 한편 李義旼은 壽德宮 옆에 거대한 제택을 지었다. 아무도 탄핵하는 사람이 없었다.1224)≪高麗史≫ 권 20, 世家 20, 명종 22년 10월. 관료들 집이 그렇게 규모가 큼직큼직 하였으므로 인종은 壽昌宮 옆에 있던 시중 邵台輔의 집을 징발하여 書籍所로 삼고 책과 문서를 모아 보관하면서 유신들로 하여금 당직하게 하였다.1225)≪高麗史≫ 권 16, 世家 16, 인종 7년 8월 무신.

 또 金俊의 집도 대단하였다. 왕을 자기 집에 모시고 싶어 이웃집 여러 채를 헐고 증축하였다. 엄동이나 뙤약볕의 무더위를 가리지 않고 독촉하여 지었는데 높이가 여러 길이요 마당 넓이가 100보나 되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오히려 좁아 규모가 답답하다고 하였다. 집에 쓸 보와 도리와 기둥·서까래는 반드시 아름다운 나무결 무늬가 있는 것만 골라 썼고 특별히 구해다 쓴 색다른 재료는 황금빛과 푸른빛이 서로 어울려 빛나고 장려함이 비할 바 없었으며, 정원의 화초도 기이한 것만 취하였다.1226)≪高麗史≫ 권 130, 列傳 43, 金俊.

 충숙왕이 어느 날 吉昌君 權準의 집을 찾아갔다. 왕이 두루 살피니 참으로 아름다웠다. 왕이 탄식하며 내가 사는 집보다 오히려 좋다고 하고 이후로는 자주 신하들 제택에 머물렀다.1227)≪高麗史≫ 권 35, 世家 35, 충숙왕 12년 11월 병진.
≪高麗史節要≫ 권 24, 충숙왕 12년 11월.

 回回人으로 몽고황실을 배경으로 삼아 충렬왕 때 僉議贊成事를 지낸 張舜龍은 화사하게 제택을 짓고 바깥 담장에 기와와 돌로 화초를 무늬 놓아 맞담을 쌓았다. 당시로는 대단히 아름답다고 평판이 나서 張家牆이란 별칭을 얻었고 그를 추종하여 담장을 쌓는 집도 생겨났다. 오늘의 꽃담에 해당되는데 후에 이 집에 충렬왕이 머물면서 德慈宮이라 하였다.1228)≪高麗史≫ 권 31, 世家 31, 충렬왕 24년 정월 병오 및 권 123, 列傳 36, 印侯·張舜龍·車信.

 제택으로 대표적인 것은 역시 당대를 주름잡던 崔忠獻과 崔瑀(怡)의 저택이었다. 최충헌의 집은 男山에 있었다. 희종은 최충헌을 晋康侯에 봉하고 府를 세우게 하여 興寧府라 하고 흥덕궁을 소속시켰다. 하례하기 위하여 왕자 이하 여러 신하들이 모였는데, 잔치의 성대함이 “삼한 이래로 신하된 자의 집에서 다시 볼 수 없는 정도”였다. 이 집에 왕도 머문 적이 있었다. 당시 柳井洞 최씨댁은 왕궁이나 진배없었다. 최씨는 남산 기슭에 茅亭을 짓고 雙松(또는 盤松)을 심었다. 아름답기도 하고 장려하기도 하였으며, 당대 제일의 문장가 李奎報가 亭記를 지어 찬탄하였다.1229)≪高麗史≫ 권 129, 列傳 42, 崔忠獻.
李奎報,≪東國李相國集≫ 전집 권 23, 記 晋康侯茅亭記.

 최충헌의 아들 최우는 아버지와 같이 살지 않고 따로 집을 짓고 나가 살았다. 집이 배고개에 있었는데 희종은 궁에 공역이 있는 동안 점장이의 말을 좇아 최우의 집에 머물렀다. 최충헌이 나서서 어가를 맞아드리고 왕자와 재추들이 수행하였는데, 錦繡로 綵棚을 가설하고 그 무대에서 胡漢들이 놀이를 벌렸다. 집의 꾸밈은 사치를 극도로 하여서 그 형용을 낱낱이 설명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1230)≪高麗史≫ 권 21, 世家 21, 희종 4년 2월 을묘 및 권 129, 列傳 42, 崔忠獻.
≪高麗史節要≫ 권 14, 희종 4년 을묘.

 고종 32년(1245) 여름 4월 초파일에는 최우가 연등회를 열어 종실·재추들을 초빙하고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산의 모습으로 結綵하고 비단장막을 둘러치고 그 안에 그네를 매었다. 비단과 꽃을 써서 아름답게 치장하여 보는 이의 눈을 현란하게 하였다. 그런 중에 갖은 놀이가 재인들에 의하여 벌어졌다. 八坊의 廂工 1,350여 명이 잘 차려 입고 풍악을 울리니 온통 천지가 진동하는 듯하였다.1231)≪高麗史≫ 권 129, 列傳 42, 崔忠獻 附 怡.
≪高麗史節要≫ 권 15, 고종 16년 9월.

 최우는 주변의 살림집 수백 채를 헐어 내고 그 자리에 동서로 수백 보에 달하는 격구장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평탄하기가 마치 바둑판 같았다.1232)≪高麗史≫ 권 129, 列傳 42, 崔忠獻 附 怡.
≪高麗史節要≫ 권 15, 고종 16년 9월.
최충헌은 전에 또 다른 제택을 지은 바 있었다. 백여 채의 백성들 집을 허물 정도로 굉장한 집을 지어 담장의 둘레가 몇 리나 되었다. 따로 별당을 짓고 十字閣이라 하였다.1233)≪高麗史≫ 권 129, 列傳 42, 崔忠獻.
≪高麗史節要≫ 권 14, 희종 6년 4월.

 의종은 규모가 큰 집을 억제하라고 유사에게 명을 내리고,1234)≪高麗史≫ 권 18, 世家 18, 의종 18년 7월 임진. 그는 신하들의 제택 중에 뛰어나게 좋은 자리에 지은 멋진 집을 빼앗아 이궁으로 삼기도 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鄭諴의 집이다. 궁궐의 동쪽에 있고 부속건물인 廊廡만 200여 칸에 이르며 금벽으로 치장하여 대단히 찬란하였다. 의종은 慶明宮이라 하였다.1235)≪高麗史≫ 권 18, 世家 18, 의종 11년 12월 계축 및 권 122, 列傳 35, 鄭誠. 또 같은 해에 翼陽侯의 집을 징발하여 수덕궁이라 하고 거기에 天寧殿을 덧지었다. 그 밖에도 시중 王冲의 집을 安昌宮, 전 참지정사 金正純의 집을 靜和宮, 평장사 庾弼의 집을 連昌宮, 추밀원부사 金巨公의 집을 瑞豊宮이라 하였다.1236)≪高麗史≫ 권 18, 世家 18, 의종 11년 4월 병신.

 의종은 신하의 집에 자주 거처하였다. 그만큼 제택들이 규모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처마를 중첨으로 구성하고 창호를 통달하게 갖추고1237) 徐 兢,≪高麗圖經≫ 권 6, 宮殿 2, 臨川閣. 장려하게 축대를 쌓았다. 신하의 제택을 빼앗아 만든 館北宮에는 窟室로 축대를 만든 것이 있었다.1238)≪中京誌≫ 권 4, 宮殿, 館北宮.. 석가산을 쌓아 아름답게 꾸미기도 하였다. 의종은 수창궁 북원에 가산을 석축한 바 있었다.1239)≪高麗史節要≫ 권 11, 의종 6년 4월. 의종은 이름 높은 여러 정자를 짓고 장려하게 가꾸었고 유명한 養怡亭에는 康津가마에서 구어 온 청자로 기와를 이어 지붕을 완성시키기도 하였다.1240)≪高麗史≫ 권 18, 世家 18, 의종 11년 4월. 이는 호사의 극치이지만 이로 인하여 마침내 鄭仲夫의 난이 야기되고 그로 인하여 고려의 정정은 혼미한 흐름에 빠지고 말았다.

 鄭夢周의 집은 조선조에 崧陽書院이 된다.1241) 鄭夢周,≪圃隱集≫ 권 4, 年譜. 그러나 대부분의 대소 신하들은 불교를 신봉하여서 집에 부처를 두고 안녕과 영달을 기원하는 것이 보통이었다.1242) 李奎報,≪東國李相國集≫후집 권 11, 記 朴樞府有嘉堂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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