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1. 개국초 왕권의 강화와 국정운영체제
  • 2) 개국과 그 기초작업

2) 개국과 그 기초작업

 1392년 7원 17일 이성계는 개경 수창궁에서 새 왕조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이 새 왕조는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개혁파유신과 이에 동조한 세력의 승리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새 왕조의 정치이념은 억불숭유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과전법체제와 대명 사대관계는 이미 정해진 방향이었다. 또한 고려말 권문세족과 국가로부터 가혹한 착취와 억압을 받았던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도 새 왕조의 과제였고 또 백성들은 그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면 개혁의지와 희망을 가지고 출발한 새 왕조는 그 기초를 마련하기 위하여 어떤 일들을 펼쳐갔는가.

 개국 직후 가장 긴급한 일은 반대세력으로부터 왕위와 정권을 지킬 군사권의 장악이었다. 이성계는 그 일파의 추대를 받아 새 왕조의 왕이 되었으나 정적들로부터의 반격 위협은 언제나 있었던 것이다. 태조가 즉위한 다음날 義興親軍衛를 설치하고 종친과 대신들에게 각 도의 군사를 영솔하게 한 것은 반대세력으로부터 정권을 보위하기 위한 조처였다.006)≪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7월 정유.

 태조 원년 7월 28일 태조는 온 국민에게 교서를 반포하였다. 이 교서에서 태조는 그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경위를 밝히고 우선 급격한 변혁으로 초래될 정치적·사회적 불안을 줄이기 위하여 “국호는 그대로 고려라 하고 儀章과 법제는 전조의 것을 모두 그대로 따른다”라고 선언하고, 구체적으로 정치·사회의 현안문제 해결과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줄 것을 선언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① 종묘·사직제도를 정하는 일, ② 왕족·왕씨에 대한 처리문제, ③ 문무과의 실시, ④ 관혼상제를 정하는 일, ⑤ 수령의 엄선, ⑥ 忠·孝·義·烈의 旌閭, ⑦ 鰥·寡·孤·獨에 대한 賑恤·除役, ⑧ 外吏의 上京從役폐지, ⑨ 궁중 창고의 회계 출납에 대한 감찰, ⑩ 驛館의 사사로운 이용 금지, ⑪ 騎船軍의 부담감축, ⑫ 호포 폐지, ⑬ 國屯田 폐지, ⑭ 형률은 大明律을 적용, ⑮ 토지제도는 과전법에 의함, ⑯ 경상도 載船貢物의 폐지, ⑰ 우현보·이색 등 반이성계세력에 대한 징계, ⑱ 범죄자에 대한 사면령 등으로 되어 있다. 이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국가와 왕실의 위상정립(①), 민심의 안정(②), 인사제도의 화립(③·⑤), 유교윤리의 수립(④·⑥), 피지배층에게 고통과 부담을 주었던 각종 제도의 폐지(⑧·⑪·⑫·⑬·⑯), 형률의 일원화(⑭), 토지·재정제도의 정립(⑨·⑮), 반이성계파의 제거(⑰) 등으로서 새 왕조의 정치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 즉위교서를 지은 사람은 정도전으로서 개혁파유신들의 개혁정치의 방향을 엿볼 수 있다.

 교서를 선포한 7월 28일에 문무백관의 제도가 정해졌다. 관직제도는 대체로 고려의 제도를 따랐으나 명칭이나 내용은 필요에 따라 조정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먼저 東班(文班)에는 정1품에서 종9품에 이르는 18품계의 散階와 그 명칭이 정해졌는데, 산계의 명칭은 고려시대의 그것과 크게 다르다. 문반의 핵심이 되는 정치기구로는 都評議使司·門下府·三司·中樞院이 있다. 도평의사사는 합좌기관으로 문하부·삼사·중추원의 2품 이상으로 구성되었으며 관직의 명칭·직품·인원수 등은 재조정되었다. 이 밖에 예문춘추관·경연관·세자관속·사헌부·개성부·6조·상서원·성균관 등을 비롯하여 40여 개의 부서가 있으나 대개 고려말의 관제를 따른 것이다. 西班(武班)에는 정3품 折衝將軍으로부터 종8품 修義副尉에 이르는 12품계의 산계가 정해졌는데 武散階의 명칭도 고려의 것을 따르지 않고 새롭게 정하였다. 무반직으로는 義興親軍左右衛를 비롯한 10위를 두고, 이에 속한 무반직을 정하고 있다. 이 밖에 문무반직과 구별하여 內侍府·掖庭署·典樂署·雅樂署 등을 별도로 두고 있다.

 태조 원년(1392) 7월의 관제는 방원(태종)이 세자로 있었을 때 그리고 그가 왕으로 즉위한 후에 이루어진 수차의 관제개혁을 통하여 議政府·六曹 중심의 관직체계·정치체계로 바뀌어 가지만 이 때에 정해진 산직체계와 관직은 상당 부분 그대로 존속되었다.

 다음 태조와 그를 추대한 관료들이 해야 할 일은 그들의 개국 사실을 명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었다. 대명관계는 계속 난제였던 바 새 왕조를 개창한 이성계와 그 신료들로서는 명이 새 왕조와 이성계의 즉위를 인정하느냐 여부가 매우 중요하고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이성계가 즉위한 다음날인 7월 18일 도평의사사와 대소신료·한량·기로 등의 요청을 받아들여 知密直司事 越胖을 명에 보내 역성혁명의 불가피성과 이성계 추대사실을 알리게 하였다.007)위와 같음. 이어 8월 29일에 다시 전 密直使 趙琳을 명에 보내 이성계의 즉위를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008)≪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8월 무인. 조반은 10월 22일에, 조림은 11월 27일에 새 왕조의 개창과 이성계의 추대 사실을 명으로부터 인정받고 돌아왔다.009)≪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10월 경오·11월 갑진. 일단 이웃 강대국인 명으로부터 역성혁명 사실과 이성계추대 사실을 인정받은 것은 새 왕조의 정치적 안정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조반·조림을 명에 파견한 목적이었다. 명에서는 새 왕조를 독립적인 나라로 인정하였다.010)≪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11월 갑진.

 다음 국호문제를 살펴보자. 태조의 즉위교서에 보이듯이 국호를 그대로「고려」로 쓴다고 했고, 태조 원년 8월 조림을 사절로 명에 파견했을 때에도 외교문서에 이성계의 직함을 權知高麗國事라고 썼다. 고려라고 국호를 그대로 쓴 것은 급격한 변혁에서 초래될 수 있는 정치·사회적 불안정을 피하기 위한 뜻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림이 귀국하면서 가져온 명 예부의 咨文안에 “국호는 어떻게 고쳤는지 급히 보고하라”라는 내용이 있어 국호제정을 서두르게 되었다. 조림이 귀국한 날 기로와 백관을 都堂에 모아 국호를 의논하여「朝鮮」·「和寧」두 개의 후보를 정하였고, 그 이틀 후에 藝文館學士 韓尙質을 명에 파견하여 이 가운데 하나를 택해 줄 것을 청하였다.011)≪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11월 병오.「조선」은 우리 나라의 오래된 국호였던 단군조선·기자조선에서 취한 것이고,「화령」은 태조 이성계의 고향인 영흥의 옛 이름이었다. 태조 2년 2월 15일 奏聞使 한상질이 귀국하면서 가져온 예부의 자문에는 “동이의 국호는 오직 조선이라 칭한 것이 아름답고 또한 그 유래가 오래니 그 이름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라는 명 태조의 뜻이 전달되었다. 태조는 즉각 교서를 내려 국호를「조선」으로 선포하였다.012)≪太祖實錄≫권 3, 태조 2년 2월 경인. 이처럼 새 왕조의 국호는 태조 2년 2월 15일에 조선으로 결정된 것이다.

 조선이라는 국호가 명 태조의 선택으로 정해졌다는 사실은 개국초 조선의 자주성을 의심케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조선이 명에 대하여 이와 같은 자세를 취한 것은 조선의 외교정책의 일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새 왕조를 개창한 이성계일파는 아직 나라의 기틀과 정치기반을 확립하지 못하였으므로 명의 인정을 받는 일은 나라와 정치의 안정을 위하여 필요한 일이었다. 그들이 정신적으로도 명에 대하여 사대주의에 빠진 것이 아니었음은 조선이 개국한 직후부터 태조와 정도전 등에 의하여 요동정벌계획이 계속 추진된 사실로써도 확인할 수 있다.013)崔承熙,<朝鮮太祖의 王權과 政治運營>(≪震檀學報≫64, 1987), 153∼159쪽.

 다음 國都의 新定문제이다. 개성은 왕씨와 권문세족의 뿌리가 깊이 박혀있 는 곳이어서 새 왕조를 개창한 이성계일파로서는 구도를 벗어나서 새 국가의 면목과 인심을 일신할 새 도읍을 건설할 필요가 있었을 뿐 아니라, 고려 전 시대를 풍미하던 음양도참설에도 구도가 불길하다 하였으므로 태조로서는 개성을 벗어나는 일이 급선무였을 것이다. 이에 태조는 즉위한 지 26일 밖에 되지 않은 8월 13일에 도평의사사에 漢陽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명령하였다.014)≪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8월 임술. 그러나 한양천도에 대한 이의가 있었음인지 그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일단 중단된 것 같다. 태조의 중신들은 이미 모두 개성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므로 천도의 의지가 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태조가 친히 새 도읍 자리를 찾아 나섰다. 태조 2년(1393) 정월 태조는 공주 계룡산 아래를 신도 자리로 예정하고 친히 계룡산의 형세를 보기 위하여 출발하였다.015)≪太祖實錄≫권 3, 태조 2년 정월 을축. 도중에 태조는 중신들이 천도의 의지가 약한 것을 느끼고 이르기를 “천도는 경들 역시 하고자 하지 않는다. 예로부터 역성으로 천명을 받은 왕은 반드시 도읍을 옮겼다. 지금 내가 급히 계룡을 보는 것은 친히 신도를 정하고자 함이다”라고 하고, “세자가 비록 뜻을 이어 천도하려 해도 대신이 저지하면 어찌 할 수 있겠는가”016)≪太祖實錄≫권 3, 태조 2년 2월 병자.라고 하였다. 대신들 중에는 천도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상당히 있었으나 태조는 천도를 자신이 이루어야 할 과제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태조 2년 2월 계룡산에 이르러 신도의 산수를 살피고 漕運과 교통의 편부와 종묘·사직·궁전·朝市가 들어설 자리를 측량하게 하였고, 金湊와 同知中樞 朴永忠, 前密直 崔七夕 등에게 신도의 건설을 감독하게 하였다.017)≪太祖實錄≫권 3, 태조 2년 2월 계미·갑신·을유·무자. 이렇게 공주 계룡산 신도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태조 2년 12월 京畿左右道都觀察使 河崙의 상언에 따라 신도의 역사가 혁파되었다. 상언의 요점은, “도읍은 마땅히 나라 가운데 있어야 하는데 계룡산은 남쪽에 치우쳐 있고 동북 면과도 막혀 있으며, 풍수지리상으로도 좋지 못하여 천도하기에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태조는 이 상언을 정도전·남재 등으로 하여금 검토하게 한 후에 신도의 역사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018)≪太祖實錄≫권 4, 태조 2년 12월 임오.

 다음 천도 예정지로 삼은 것은 毋岳(현재 서대문구 신촌동·연회동 일대)이었다. 태조 3년 8월 태조는 무악을 친히 보기 위하여 도평의사사와 臺省·刑曹 각 1명을 거느리고 갔다.019)≪太祖實錄≫권 6, 태조 3년 8월 을해. 무악에 이르러 정도할 땅을 살피는데 書雲觀의 관원 尹莘達, 劉旱雨 등이 아뢰기를 ‘풍수지리의 법으로 보건대 이 땅을 도읍으로 삼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라고 하여 결정을 짓지 못하였다.020)≪太祖實錄≫권 6, 태조 3년 8월 무인. 태조는 다시 여러 재상들에게 천도할 만한 곳을 의논하여 올리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정도전·成石璘·정총·하륜·李稷 등이 의견을 개진하였으나 의견이 분분하고 오히려 천도를 바라지 않는 경향이 많아 태조의 심기는 매우 불편한 가운데 南京(漢陽)에 이르렀다.021)≪太祖實錄≫권 6, 태조 3년 8월 기묘. 태조는 남경의 지세를 살피고 그가 尊信하던 王師 自超(無學)에게 자문을 구하니, 자초가 대답하기를 “이 땅은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은 펀펀하고 넓어 성읍으로 마땅합니다. 그러나 중의를 따라 정하십시오”라고 하였다. 태조가 여러 재상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니 모두 “반드시 천도하고자 하시면 이 곳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하륜이 홀로 반대하였으나 태조는 일단 중의에 따라 한양으로 도읍을 결정한 셈이 되었다.022)≪太祖實錄≫권 6, 태조 3년 8월 경진. 대부분의 중신들은 천도를 원치 않았으나 태조는 자초의 자문을 받아 한양으로 도읍을 결정하면서 재상들의 동의를 받았다. 천도는 국가의 중대사이고, 국가의 재정적 부담은 물론이고 그 역사에 동원될 백성들의 고통이 따르게 되는 것이므로 중신들의 동의를 받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태조는 3년 9월 1일 新都宮闕造成都監을 두었고 곧 이어 權仲和·정도전·沈德符·김주·남은·이직 등 중신을 한양에 보내 廟社·궁궐·朝市·도로의 터를 정하게 하고 그 지도를 만들어 올리게 하였으며, 심덕부·김주는 한양에 머물면서 도읍의 건설을 관리하게 했다.023)≪太祖實錄≫권 6, 태조 3년 9월 무술·병오·경신. 그리고 아직 신도의 기초공사도 이루어지기 전인 10월에 한양으로 천도하였다.024)≪太祖實錄≫권 6, 태조 3년 10월 신묘. 궁궐이 이루어지기 전이었으므로 옛 한양부의 객사를 이궁으로 삼았다.025)≪太祖實錄≫권 6, 태조 3년 8월 갑오. 11월에 태조는 도평의사사와 서운관의 관원들을 거느리고 종묘·사직을 건설할 땅을 살폈고, 다음날 工作局을 설치하였다.026)≪太祖實錄≫권 6, 태조 3년 11월 무술·기해. 12월부터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태조 4년 9월에 일단 종묘·사직·궁전이 준공되었고,027)≪太祖實錄≫권 8, 태조 4년 9월. 5년 정월부터 9월까지 도성과 4대문 4소문이 준공되었다. 태조 4년 6월 한양부를 한성부로 개칭하였고028)≪太祖實錄≫권 7, 태조 4년 6월 무진. 5년 4월에는 5部 52坊으로 구획하고 방의 명칭을 정하였다.029)≪太祖實錄≫권 9, 태조 5년 4월 병오. 이처럼 신도 한성의 규모가 대략 갖추어졌다. 그러나 태조 7년(1398) 8월에「제1차 왕자의 난」을 겪은 후 정종은 그 원년(1399) 3월에 구도 개성으로 환도하였다. 태종 5년(1405) 10월에 한성으로 재천도한 후 한성의 시설은 더욱 정비되었고, 이후 한성은 조선왕조 500년간 도읍으로서 정치·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다음, 개국공신을 책봉하였다. 조선이 개국되고 이성계가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협력과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바로 조선개국의 원동력이었다. 따라서 태조가 그들에게 일정한 정치·사회·경제적 특전을 내리는 것은 군신간의 단결과 화합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으며 개국초 정치기반의 안정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태조는 개국공신의 책봉에 앞서 개국주도세력에 대해 封爵하였다. 문무백관의 관제가 정해진 원년 7월 28일에 裵克廉은 翊戴補祚功臣門下左侍中星山伯으로, 조준은 佐命開國功臣門下右侍中平壤伯으로, 李和는 佐命開國功臣商議門下府事義興親軍衛都節制使義安伯으로, 金士衡은 佐命功臣門下侍郎贊成事判八衛事上洛君으로, 정도전은 佐命功臣門下待郎贊成事義興親軍衛節制使奉化君으로 봉작되었고, 이 밖에 鄭熙啓·李之蘭·남은·金仁贊·張思吉·정총·越琦·조인옥·黃希碩·남재 등이 佐命 또는 補祚功臣으로서 封君되었다.030)≪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7월 정미. 이들 중 조기·황희석(2등)을 제외하면 두달 후 개국공신 책봉 때에 모두 1등공신으로 錄勳된 터이지만, 이에 앞서 그를 추대한 중신들에 대한 봉작은 그들을 안

 심시키고 대우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찾으려는 태조의 배려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태조는 그 22일 후인 8월 20일에 그를 추대한 공로를 3등급으로 나누어 개국공신 44명을 결정하여 도평의사사에 내렸다.031)≪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8월 기사 및 李和開國功臣錄券 참조. 9월 16일 공신도감에서는 태조의 명에 따라 3등급의 공신호와 그에 따른 특전의 규모를 정하여 왕에게 올려 윤허를 받았고 태조는 공신들에게 토지와 노비를 차등있게 내렸다.032)≪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9월 갑오 및 위의 錄券 참조. 25일 후에 태조는 개국공신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공신교서와 錄券을 각각 내려 주었다.033)≪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9월 을해. 이 때 책봉된 개국공신에는 1등공신에 문하좌시중 배극렴·문하우시중 조준·문하시랑찬성사 김사형·정도전 등 16명, 2등공신에 判三司事 尹虎 등 11명, 3등공신에 都承旨 安景恭 등 16명이었고, 공신책봉 전에 죽은 김인찬은 특별히 1등공신에 넣어 44명이 개국공신으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그 11일 후인 9월 27일에 태조는 上將軍 趙狷(2등), 韓尙敬·任彦忠·黃居正·張思靖·韓忠·閔汝翼(이상 3등) 등 7명을 개국공신으로 추록하였고,034)≪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9월 을사. 11월에 황희석을 개국공신 2등으로 추록하였다.035)≪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11월 병신. 이리하여 개국공신은 52명이 되었다. 태조 원년 9월 28일 개국공신들이 모여 국왕에게 충성하고 공신간에 화합·협력·단결할 것을 천지신명에 맹세하였다.036)≪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9월 병오. 공신을 책봉하는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태조로서는 그를 추대한 자들에 대하여 경제적 또는 경제외적 특전을 주어 충성스러운 신하로 묶어놓고, 공신들 간에는 서로 화합·단결하게 함으로써 왕권의 확립과 정치의 안정을 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태조가 즉위하기까지 그에게 협력한 사람은 개국공신 52명으로 그 친 것이 아니었고 수없이 많았다. 그들에 대한 보답을 위하여 태조 원년 10월부터 6년 10월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原從功臣으로 책봉된 사람이 1,400여 명에 이르고 있다.037)崔承熙, 앞의 글, 139∼143쪽. 이들에 대한 특전은 개국공신의 그것과 비교하면 적은 것이기는 했지만 이들도 정치적으로 불안한 개국초에 정치적 안정세력으로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개국공신과 원종공신이 태조에 의해서 선정된 것이었으므로 태조와 공신간에 굳은 군신관계가 성립될 수 있었고 그것은 개국초의 정치안정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왕족 왕씨의 존재는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일파로서는 큰 부담이었으며 왕씨의 제거는 정치적 안정을 위하여 불가피한 것으로 보았다. 앞서 살핀 즉위교서에서 태조는 “王瑀(7男 芳蕃의 장인)에게 麻田郡을 주고 歸義君으로 봉하여 왕씨 선대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나머지 자손들은 외방에서 편한 대로 살게 하며, 그 처자와 僮僕들은 옛날처럼 모여 살게 한다”고 선언하고 그들에 대한 보호를 약속했다. 이 조처는 왕씨세력의 반항과 민심의 동요를 완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왕씨세력 제거의 기회는 태조 3년(1394) 정월에 포착되었다. 東萊縣令 金可行·鹽場官 朴仲質 등이 새 왕조의 안위와 왕씨의 운명을 密陽에 사는 맹인 李興茂에게 점친 사실이 드러나고 여기에 參贊門下府事 朴葳가 관련된 사건이 일어났다.038)≪太祖實錄≫권 5, 태조 3년 정월 병진. 이 일은 당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안한 상태였음을 전해주고 있다. 박위를 제외한 김가행·박중질·이흥무 세 사람은 모두 邊郡에 杖流되었으며, 이를 구실로 대간은 즉각 왕씨제거를 청하였다.039)崔承熙,≪朝鮮初期言官·言論硏究≫(서울大 出版部, 1976), 106∼109쪽. 그러나 즉위교서에서 왕씨의 보호를 약속한 태조는 대간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대간과 형조의 왕씨제거를 위한 상소는 계속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태조 3년 2월 王和·王琚·僧 釋能 등의 모역혐의를 잡고 더욱 강력하게 왕씨제거를 강청하였다. 태조 3년 4월까지 대간·형조는 10여 차례의 상소를 통하여 왕씨제거를 위한 여론을 고조시켰고, 태조는 중신의 의견을 수합하는 절차를 거쳐 중의에 따라 마지못하여 왕씨를 제거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왕우 3부자는 이씨와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왕씨 선세의 제사를 위하여 살려두었으나 공양왕과 그 두 아들은 교살하였고 그 밖의 왕씨들은 모두 색출하여 죽이도록 하였다.040)崔承熙, 위의 책, 107∼109쪽. 이처럼 새 왕조의 정치적 안정에 장애요소로 생각했던 왕씨의 제거를 언론·여론·중의에 따른 것처럼 처리했다. 이성계일파의 고도한 정치술수로 이루어진 잔인한 왕씨제거작전이었다.

 즉위교서에서 ‘儀章法制 一依前朝故事’라고 하였으나 새 왕조는 새 왕조로서의 정치구조·법제의 정리가 불가피하였다. 태조 3년에 정도전이 찬진한≪조선경국전≫은 새 왕조의 이상적인 정치체제·법제를 제시한 것이며, 태조 6년 조준 등에 의해서≪經濟六典≫이 편찬되어 새 왕조의 법제의 틀이 대강 갖추어졌다. 반이성계파 인사들에 대한 숙청은 즉위교서 끝에 기재된 56명으로써 대개 마무리되었으나, 반이성계파의 숙청은 계속되었다. 태조 2년 정월 李行의 숙청은 그가 고려말에 藝文春秋館學士로 있을 때에 기록한 史草에 이성계에게 불리한 기사를 썼다는 사실때문이었다.041)≪太祖實錄≫권 3, 태조 2년 정월 무오. 새 왕조에 대한 유언비어도 철저히 단속되었다. 태조 원년 9월 李扶와 許晐 등이 이성계에게 불리한 요언을 퍼트려 衆心을 현혹했다는 죄로써 대간의 탄핵을 받아 유배된 사실은 그 한 예이다.042)≪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9월 갑오.

 태조 원년 8월 태조가 즉위한지 한 달만에 康氏소생 芳碩을 서둘러 세자로 책봉한 것은 태조나 중신들로서는 장차 일어날 수 있는 왕자들 간의 왕위계승 분쟁을 예방하여 나라의 기틀을 안정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방원 등 강력한 실력의 韓氏소생 왕자들을 소외시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태조 7년의「제1차 왕자의 난」의 씨앗을 뿌려놓은 것이 되었고, 태조시대의 종말을 속히 오게 한 실마리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