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1. 개국초 왕권의 강화와 국정운영체제
  • 3) 태조·태종대의 왕권강화

3) 태조·태종대의 왕권강화

 왕정시대에 국왕으로서의 권위와 권력의 강약 여부는 그 시대에 따라 또는 국왕의 인물 여하와 즉위과정 여하에 따라 혹은 군신관계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왕의 존엄성이 강조되고 있으며, 천명사상·왕권신수설 등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왕권의 내용은 매우 다양할 수 있다. 전제적·무단적·절대적·패도적인 왕권도 있고,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왕도적 왕권도 있고, 신권에 눌려 허약한 왕권도 있다.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정치가 이상적이지만 그러한 시대는 흔하지 않다. 그러나 왕조시대에는 그 시대를 다스리기 위하여 일정한 왕권의 유지가 필요하다. 특히 새 왕조를 개창한 군주에게는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기 위하여 강력한 왕권이 필요한 것으로 이해된다.

 종래에는 개국초 정치권력이 개국공신과 도평의사사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하여 태조 이성계의 왕권은 허약했다고 인식하는 것이 통설화되어 있었다.043)崔承熙, 앞의 글(1987), 133∼134쪽. 그러나 고려말 난국에 무장으로 위명을 떨쳤고 위화도회군 이후에는 군·정의 실권자로서 정국을 주도했으며 마침내 도평의사사와 대소신료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한 이성계의 왕권은 허약할 수 없다. 태조는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다사다난한 초창기의 정치를 적극적으로 펼쳐갔다. 태조의 왕권이 강력한 것이었음을 개국공신 및 원종공신의 선정과정과 도평의사사의 정치기능을 살펴봄으로써 확인해 보겠다.

 공신에게는 정치적인 지위뿐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도 막대한 특전이 주어졌으므로, 공신들은 그 시대 정치적 지배층이 될 수 있었고 중요한 정치세력집단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공신이라 하여 모두 강력한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공신선정을 장악한 주체의 소재에 따라 왕권·공신권의 강약이 좌우되었다. 즉 ① 국왕이 단독으로 공신을 선정했을 경우 강력한 왕권을 예측할 수 있으며, ② 국왕과 공신·중신의 합의로 선정되었을 경우 왕권과 공신권력의 균형적인 상태를 상정할 수 있으며, ③ 일부 공신의 주도하에 공신이 선정되었을 경우 공신세력이 왕권을 압도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靖國功臣(中宗反正功臣) 朴元宗·成希顔·柳順汀 등이 ③의 경우가 될 것이다. 개국공신과 원종공신의 선정은 어느 경우에 해당할 것인가 살펴보자.

 우선 개국공신의 선정은 어떻게 정하여졌는가. 태조 원년 8월 2일에 개국 공신책봉과 관련된 제반 행정적인 업무를 담당할 공신도감이 설치되었다. 8월 20일 태조는 개국공신의 位次를 정하고, 공신에 대한「褒賞之典」을 유사에서 거행하라는 왕명을 우승지 한상경을 통해 도평의사사에 내렸다. 도평의사사에서는 그 왕명을 받고 ‘왕명을 받들어 시행하라’는 出納(태종초부터는 關으로 바뀜)을 공신도감에 내려보냈다. 이 때에 내린 왕명에는 배극렴·조준 등 17명은「決疑定策 推戴寡躬」한 공으로, 윤호·李敏道 등 11명은「參謀與議推戴寡躬」한 공으로, 안경공·金稇 등 l6명은「亂政之時 注意寡躬」한 공으로 공신의 칭호를 내리니 그 포상하는 법과 절차는 유사에서 정하여 거행하라는 것이었다. 공신의 위차를 구분하는 기준은 태조 자신에 대한 공로의 정도에 따른 것이다. 공신의 선정과 등급은 태조의 판단·기준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왕명을 轉載한 도평의사사의 출납을 받은 공신도감에서는 태조의 뜻에 따라 1·2·3등 공신으로 칭할 것과 이에 따른 제반 특전을 정하여 보고하였고, 9월 16일 태조는 공신도감의 보고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공신에게 내려줄 토지 결수와 노비 구수를 공신의 등급에 따라 차등있게 정하여 내려 주었다. 이처럼 개국공신의 선정은 태조의 뜻과 기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044)崔承熙, 위의 글, 135∼138쪽.

 만약 개국공신의 선정을 태조가 공신·도평의사사와 의논하여 결정하였다면, 왕자들 가운데 적어도 방원만은 공신에 들었을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방원은 반이성계파인 정몽주를 제거한 元勳이었고 이성계추대를 위하여 남은과 함께 가장 적극적으로 활약하였으며, 당시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실력을 갖고 있었다. 개국공신이 되기에 충분한 공로가 있었다. 그러나 개국공신의 선정을 태조 단독의 뜻으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방원 등의 공은 인정되나 친자이기 때문에 공신선정에서 제외시킨 것이었다.045)≪太祖實錄≫권 15, 태조 7년 12월 정사. 방원은 개국공신으로 선정해 주지 않은 태조에 대한 불만이 컸을 것이다. 결국 방원이 주도하여「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정종의 즉위 후 방원의 정치권력이 막강하게 되면서 비로소 방원이 개국 1등 공신으로 추록되었다는 사실은, 당초 방원은 공신이 되기를 원했으나 되지 못하였고 그 이유는 태조가 그 선정을 단독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전해준다. 태조 원년 9월 27일에 조견 등 7명을 개국공신으로 추록한 것, 11월에 황희석을 개국공신으로 추가한 것도 태조의 뜻에 의하여 결정되었던 것이다.

 개국공신의 선정이 배극렴·조준·정도전 등과 같은 공신·중신 등과 합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태조의 의지와 기준에 의해서 정해졌다는 사실은 개국공신의 출신지역·신분·직업의 다양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046)韓永愚,<朝鮮開國功臣의 出身에 대한 硏究>(≪朝鮮前期社會經濟硏究≫, 乙酉文化社, 1983), 117∼180쪽. 즉 개국 공신의 출신지역은 전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으며, 문인·무인·평민·잡직인·승려 등 잡다하다. 이성계의 친인척과 고려 권귀출신이 있는가 하면 향리·평민·서자 등 그 출신성분도 다양하며, 女眞人·漢人·元人의 귀화인도 있다. 만약 사대부 출신 또는 중신들의 합의로 공신이 선정되었다면 공신들의 출신지역과 신분·직업이 한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30여 년을 무인·무장·재상을 겪었고 추대되기까지 출신지역과 신분·직업이 다양한 사람들이 이성계를 따르고 협력하고 동조했기 때문에, 이성계가 선정한 개국공신의 성분이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된다. 또한 개국공신의 성분이 다양했다는 사실은 이들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집단화할 응집력이 결여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즉 개국공신들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결집하여 왕권을 견제 또는 압도할 수 있는 상태는 상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원종공신은 태조 원년 10월부터 태조 6년 12월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약 1,400여 명이 선정되었다.047)崔承熙, 앞의 글(1987), 139∼143쪽.
朴天植,≪朝鮮建國功臣의 硏究≫(全南大 博士學位論文, 1985).
이들에 대한 정치적, 사회경제적 특권은 개국공신에 비길 바가 못되나 개국의 동조세력으로서, 지배신분으로서의 신분적 보장을 해준 것이다. 원종공신록권과≪태조실록≫에 의하면 원종공신 선정의 주체는 태조였으며, 선정의 기준은 이성계가 즉위하기까지 자신에 대한 공로의 유무에 두고 있으며, 원종공신 선정을 위하여 도평의사사나 공신·중신들과 논의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048)예외로 태조 6년 12월 權近과 偰長壽가 상서하여 원종공신에 넣어줄 것을 간청하므로 도평의사사에 내려 의논하여 보고하게 한 후 원종공신의 끝에 넣어 준 일이 있다(崔承熙, 위의 글, 142쪽 참조). 이들 원종공신의 신분·직업·출신을 보면, 군관직·왕실의 인척·동북면 출신의 태조휘하·동북면 여진인·내료잡직·공신가족·고려관인·동서반 전현직 등 다양하다.049)朴天植, 앞의 책, 157∼198쪽. 이들은 이성계가 무인·무장·재상을 거쳐 즉위하기까지 30여 년간, 그를 따르고 협력하고 동조해준 사람들이었고, 태조는 자신의 기준으로 선정하고 등급을 매겼던 것이다. 이처럼 개국공신과 원종공신을 태조가 직접 그의 기준에 의하여 선정했다는 사실은 그의 왕권이 결코 개국공신에 눌릴 수밖에 없는 허약한 것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 都評議使司의 정치권력은 왕권을 압도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 아니었다. 태조 원년 7월의 문무백관 제도를 보면, 도평의사사는 문하부·삼사·중추원의 2품 이상(28명)으로 구성되는 합좌기관으로서 국가최고기관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도평의사사가 강력한 정치권력을 가진 기구였는가를 살피려면, 실제 정치상의 활동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도평의사사의 정치활동의 중심이 된 것은 ‘국정의 상달’과 ‘왕명의 봉행’으로 구분할 수 있다. 국정을 상달하는 형식은 ① 上請하는 경우 ② 啓聞 또는 上言하는 경우, ③ 각 관부와 지방관의 보고에 의거하여 계문하는 경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상달의 내용은 국정 전반에 걸친 것으로서, 태조는 그의 판단에 따라 상달한 것을 재결하였고 그 가운데 쉽게 결정하기 곤란한 중요한 문제는 다시 도평의사사에 내려 심의하여 보고하도록 명하고 있다. 각 관부와 지방관의 보고가 도평의사사를 경유하여 상달된 것은 당시 정치의 한 관행이었으며, 상달된 것이 대부분 그대로 재가되었다고 하여 그것을 왕권과 결부시킬 성질의 것은 아니다.050)崔承熙, 앞의 글(1987), 144∼145쪽.

 都堂의 ‘왕명의 봉행’을 보면, 태조는 당시 정치상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도당의 상달에 대한 재가만으로 그치지 않고 수시로 도당에 왕명을 내려 국정을 이끌어 갔다. 태조는 도당에서 상달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도당에 명령을 내리고 있으며, 그 내용은 공신선정, 赴役·축성문제, 군사문제, 천도문제, 형벌문제 등을 비롯하여 개국초에 해결해야 될 중요한 문제들이었으며, 그 왕명은 강력한 왕권이 뒷받침된 것이었다. 도당은 그러한 왕명을 받들어 시행한 것이다. 즉 태조는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당시의 당면과제를 찾아 이의 시행을 도당에 하명하는 적극적인 정치를 하였던 것이다.051)崔承熙, 위의 글, 145∼147쪽.

 다음, 태종의 왕권강화에 대하여 살펴보자. 태종은 군주로서 명분·정통성에 취약성이 있었으므로 왕위·왕권을 유지하는데 부담이 있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왕위의 정당성 확보와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태종 왕권의 취약성은 그의 왕위의 비정통성과 도덕성의 결여와 관계있 다.052)태종왕권의 취약성에 관한 것은 崔承凞,<太宗朝의 王權과 政治運營體制>(≪國史館論叢≫30, 國史編纂委員會, 1991), 2∼10쪽 참조. 우선 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자. 그는 공민왕 16년(1367)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우왕 9년(1383) 17세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우왕 14년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일파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그 배경으로 공양왕 2년(1390)에 密直司代言이 되었고, 1392년 26세로 정몽주를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또 이성계를 새 왕조의 국왕으로 추대하는 일을 선두에서 추진한 것도 그였다. 그 시대의 거물이었던 정몽주를 살해할 수 있었고 이성계를 추대하는 데 앞장설 수 있었던 잔인성·비도덕성·과단성은 그 이후에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그의 행동 성향을 예측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방원의 기질과 성향은 태조와 康妃, 개국공신 모두에게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생각을 갖게 하였을 것이다. 가장 어린 芳碩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 태조와 중신들의 합의가 이루어진 것도 방원의 왕위에 대한 야욕을 미리 포기시키기 위한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방원은 방석이 세자로 책봉된 이후 계속 소외되었다. 특히 태조는 조준·정도전·남은 등 몇몇 재신중심의 정치를 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개국공신과 종친들은 정치권력에서 소외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태조와 정도전 등에 대한 방원의 불만은 증폭되어 갔다. 결국 태조 7년(1398) 8월 방원이 앞장 서서「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거사 당일 현장에 있던 사람은 芳果·芳毅·芳幹·李和·李伯卿·李良祜·李天祐·沈悰·李居易·李叔蕃·閔無咎·閔無疾·李茂·趙英茂·馬天牧·趙璞·辛克禮·徐益·文彬·沈龜齡 등이었다. 그 구성을 보면, 한씨소생 왕자와 종친, 방원의 처남과 인척, 방원계 무인 등이었다. 그러나 거사를 주도한 것은 방원이었고 방과·방의·방간 세 형들은 소극적 내지 방관적이었다. 이 난으로 정도전·남은·李濟·沈孝生·張至和·李懃 등 개국공신과 방석·방번 등 강씨소생 왕자들이 살해되었다. 방원의 위세는 대신들을 압도하였고, 당시의 고관들은 방원을 세자로 삼을 것을 태조에게 청했으나 사양하였고, 방과가 세자로 정해졌다. 태조 7년 9월 태조는 세자에게 전위하였다. 이렇게 즉위한 정종의 왕권은 무력하였고 실권은 방원에게 있었다. 따라서 제1차 왕자의 난과 관련된 定社功臣의 선정은 실제 방원의 의사에 의하여 결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방원은 그의 위세가 정종의 왕권을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일단 장차의 그의 위상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그의 개국의 공을 공식화할 필요를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정종이 즉위한 지 3개월 후인 12월에 방원은 방의·방간 두 형과 함께 개국 1등공신으로 추록되는데, 이는 그를 개국공신으로 책봉하지 않은 태조에 대한 불만의 표시이며, 공식적으로 개국공신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한 것이었다.

 정종 2년(1400) 정월「제2차 왕자의 난」으로 방간을 兎山으로 쫓아낸 후로 방원의 진로를 방해할 아무것도 없었다. 2월 방원은 세자로 책봉되었고 동시에 軍國重事를 맡아 다스리게 되었으니 방원에게 정치실권이 넘어간 것이 다.053)≪定宗實錄≫권 3, 정종 2년 2월 기해.

 세자가 된 이후 방원은 머지않아 올 그의 시대를 위한 개혁에 착수했다. 그 하나가 사병의 혁파였다. 개국초 종친과 공신에게 허락된 사병은 당시 불안한 정치·사회적 상황에서 예측할 수 없는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그것이「왕자의 난」과 같은 정변에 이용되었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장애요소가 되었다. 방원으로서는 장차 그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사병의 혁파가 필수적이었다. 사병혁파의 건의는 대간에 의하여 제기되었으나, 그것은 방원이 뜻한 바였다. “정종자 세자과 의논하여 곧 시행하게 하였다”054)≪定宗實錄≫권 4, 정종 2년 4월 신축.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방원의 의지에 의한 것이 분명하다.

 사병혁파와 동시에 이루어진 정치기구의 개혁도 방원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도평의사사를 개혁하여 의정부를 설치하고, 중추원을 고쳐 三軍府로 하고, 삼군부의 직을 가진 자는 오직 삼군부에만 근무하게 하고 의정부에는 합좌하지 못하게 하였다.055)위와 같음. 이는 정부와 군부의 분리를 의미하며, 의정부의 기능이 도평의사사보다 축소·약화되었음을 뜻한다. 방원은 장차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중요한 과제를 그가 즉위하기 전에 마쳤던 것이다.

 정종은 더 이상 실권없는 자리를 유지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정종 2년 11월, 방원이 세자로 책봉된 지 10개월 만에 정종은 방원에게 선위하였고, 이틀 후에 방원은 수창궁에서 즉위하였다. 그런데 방원에 대한 세자책봉과 정종의 선위는 상왕(태조)과 의논없이 이루어졌다. 국가의 가장 중대한 왕위계승 문제가 태조를 소외시킨 가운데 이루어진 것은 정종의 뜻이라기 보다는 방원과 친방원계의 의지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태종의 왕위는 두 차례의 정변을 일으켜 골육상잔의 비극을 연출하고 비상한 방법으로 획득한 것이므로 명분·정통성·도덕성에 하자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즉위 후에는 왕위의 정당성과 왕권의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태종의 왕위와 왕권의 취약성으로 인한 사건들을 살펴보는 것도 그 사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태조는 정종 2년 7월에 그의 공신(開國·原從) 가운데 방원의 거사(왕자의 난)에 협력하여 정사공신이 된 趙溫·趙英茂·李茂를 배은·불충한 죄로 처벌할 것을 방원에게 요구하여 일단 그들을 유배보내게 했다.056)≪定宗實錄≫권 5, 정종 2년 7월 을축. 태조는 그가 개국공신에 책봉하고 卿相의 지위까지 내려준 조온·조영무가「제1차 왕자의 난」 당시 禁兵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난을 일으킨 방원에게 내응한 것을 배은망덕한 행위로 질책했다. 또 이무는 원종공신을 내려주었고, 정도전·남은 등과 한파였다가 난이 일어났을 때「中立觀變」하다가 방원파가 승리하자 방원에 붙은 불충한 자로 질책하고 있다. 태조의 조온·조영무 등에 대한 질책은 두 차례의 정변을 통해 세자의 자리에 오른 방원에 대한 질책이 포함된 것이며, 방원의 세자위에 대하여 태조의 심기가 불편했음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정종 2년 11월, 정종의 방원에 대한 선위를 정종의 신하 가운데 상당수는 부당한 것으로 보았다. 태종 원년(1401) 2월 그들은 선위반대운동을 벌이다가 31명이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고 그 중 26명은 외방에 自願安置되었다.057)≪太宗實錄≫권 1, 태종 원년 2월 신묘. 탄핵된 사람들의 일부를 들어보면, 判恭安府事 鄭南晋·檢校參贊門下府事 金仁 貴·前密直提學 盧龜山·戶曹典書 裵仲倫·禮曹典書 盧弼·前典書 李臣彦·判司僕寺事 鄭漸·前大將軍 盧元湜·前將軍 張仁悅·崔石 등 전현직 문무고관들이었다. 이처럼 다수의 사람들이 태종의 즉위를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여 처벌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들 외에도 많은 관료들이 정종의 선위, 태종의 즉위를 부당하게 생각했을 것으로 추측케 한다. 이 사건도 태종 왕위의 명분·정통·도덕성의 결여와 관계있는 것으로 보인다.

 태종 2년 2월에 내린 申聞鼓 설치에 관한 교서의 서두에는 민원을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표명했으나, 그보다 근본적인 목적은 반왕세력을 색출·제거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모역자를 고한 자에게 내리는 상으로 전 200결·노비 20구를 주고, 유직자에게는 3등을 올려 錄用하고 무직자에게는 곧바로 6품을 주며, 公私賤口에게는 ‘許通爲良’하여 곧바로 7품을 주며, 범인의 가옥·재산·노비·우마를 모두 주겠다고 하였다.058)≪太宗實錄≫권 3, 태종 2년 2월 기유. 이와 같은 상은 佐命 1등공신을 능가하는 것으로, 이는 태종의 반왕세력에 대한 불안의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며 왕위의 취약성과 관계있는 것으로 보인다.

 태종 2년의 趙思義亂은 친태조세력의 반태종난이라 할 수 있다. 이 난을 평정한 후 安邊大都護府는 監務로, 永興府는 知官으로 격하되었고 조사의·康顯·趙洪 등 많은 사람이 복주되었다.059)≪太宗實錄≫권 4, 태종 2년 12월 을축·정묘. 이 난은 태종의 왕위·왕권이 불안한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며, 태종 왕위의 명분·정통성의 결여와 관계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태종 4년 10월 李居易와 그 아들 佇가 鎭州로 유배되고 廢庶人된 사건이 있었다.060)≪太宗實錄≫권 8, 태종 4년 10월 병술. 이거이와 저는 정사·좌명 1등공신이었으며, 저는 태조의 맏사위였고 거이의 둘째 아들 伯剛은 태종의 맏사위였으므로 이거이는 왕실과 연혼을 한 태종의 가장 가까운 공신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이거이가 태종 원년에 태종과 그의 왕자들을 제거하고 정종을 다시 세우려는 모역을 했다는 사실을 태종이 들춰내어 문제를 삼은 것이다.061)崔承熙,<太宗末 世子廢立事件의 政治史的 意義>(≪李載龒博士還曆紀念韓國史學論叢≫, 1991), 307∼308쪽. 태종의 사돈이요 공신인 이거이가 태종을 제거할 역모를 꾀하였다면 그것은 결국 태종 왕위의 명분·정통성의 결여와 태종의 도덕성에 대한 불신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태종 6년과 9년에 있었던 전위 표명도 그의 왕권·왕위의 취약성, 명분·정통성의 결여와 관계있는 것으로 보인다.062)崔承熙, 위의 글, 303∼304쪽. 태종 6년 8월 태종은 자못 완강하게 선위를 관철하려는 모습을 보였으나, 이것은 군신의 禪位挽留進言을 계산에 넣은 것이었고, 이를 통하여 그의 왕위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한편 그의 선위를 바라는 반왕세력을 노출시켜 제거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위표명 동기가 ‘災異屢見’인데 이는 선위의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다. 또한 당시 태종은 40세의 장년이었고, 太上王(태조)과 上王(정종)이 모두 살아 있었으며, 세자는 나이 13세로서 행동거지가 불민하였으므로, 선위에 필요한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태종은 이미 헤아리고 있었을 것이다. 태종은 선위의 뜻을 閔霽(태종의 장인)·하륜·조영무·이숙번 등 측근에 알리고 그들로 하여금 선위반대 여론을 일으키도록 유도하였고, 한편으로는 국새를 세자궁에 가져다 놓는 등 자못 확고한 의지를 보이다가 문득 모후 한씨가 꿈에 나타난 것을 구실로 9일 만에 선위의 뜻을 철회하였다. 태종의 선위 표명은 선위를 반대하는 여론을 유도할 수 있었고 이로써 그의 왕위를 계속 유지하는 데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선위파동의 부산물로서 태종의 처남 민무구·무질(모두 정사 2등, 좌명 1등공신)과 신극례(정사 2등, 좌명 1등공신)가 반왕세력으로 노출되어 탄핵을 받고 제거되었다.063)崔承熙, 위의 글, 305쪽.

 태종 6년 9월 前護軍 李云界의 옥사, 태종 10년 7월 鄭仁壽·韓龍의 옥사도 태종 왕위의 명분·정통성의 결여와 관계있는 것으로 보인다.064)崔承熙, 앞의 글(1991a), 9쪽. 태종은 이후에도 전위에 대한 정신적 강박을 받으면서까지 그가 왕위를 계속 유지하는 데 대한 정당성을 세자의 失行과 품위손상에서 구하고 있으며, 반왕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사직을 지킨다는 구실로 왕위보존의 정당성을 찾고 있다.

 태종대에 보이는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태종의 왕위·왕권의 취약성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태종이 왕권을 강화·유지하기 위하여 한 첫번째 일은 그의 왕권을 위협하는 정치세력을 억제·제거하는 일이었다. 당시 정치세력으로서는 공신세력, 척족 閔氏系세력, 관료세력, 친세자세력 등을 상정할 수 있다.

 첫째, 공신세력에 대하여도 억제하였다. 開國·定社·佐命功臣 등 조선개국의 공신은 정치세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집단이었다. 그러나 태종은 공신집단이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을 견제·억압·제거하는 방법으로 나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대 개국공신 가운데 정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자는 조준·정도 전·남은 등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중 정도전·남은 등은「제1차 왕자 의 난」으로 살해당하였다. 그러나 개국공신으로서 방원에 협력하여 그 난 이 후에 정사공신이 된 자가 13명이나 되었고, 다시「제2차 왕자의 난」을 거치 고 방원이 즉위한 후에 좌명공신이 된 자가 6명이었다. 즉 태조의 공신으로 서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거쳐 태종의 공신(정사·좌명)이 된 자는 趙英茂(정사 1등, 좌명 1등), 李和(정사 1등, 좌명 2등), 黃居正(좌명 3등), 李之蘭(정사 2등, 좌명 3등), 趙璞(정사 1등, 좌명 4등), 趙溫(정사 2등, 좌명 4등) 등 6명이다. 그들의 성분을 보면 이화(종친)·조박(문신)을 제외하면 대개 무인계로서 태종대에 이들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없었으며 이 밖에 개국공신들의 상당수는 살해되었거나 권력체계에서 밀려났다.

 태종의 공신들도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공신의 정치세력화를 꺼려 미리 억제·제거한 때문으로 생각된다. 앞에서 언급한 이거이·이저 사건은 공신의 정치세력화를 억제하려는 태종의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065)崔承熙, 위의 글, 11∼12쪽. 이 사건은 태종에 의하여 제기된 것이었고, 이거이의 진술은 묵살되었으며 조영무의 증언만 사실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거이는 끝까지 그의 역모사실을 부정하였으므로, 그 사건이 태종과 조영무에 의한 조작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결국 이거이와 같이 왕실과 연혼관계를 맺은 공신을 거세함으로써 다른 유력한 공신들에 대하여도 경계·근신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척족 민씨계의 제거이다. 閔無咎·無疾 형제는 태종비인 靜妃의 동기요 정사·좌명공신이었으므로 다른 공신들보다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하였다. 민무구 형제의 정치세력은 태종 즉위 직후부터 드러나고 있다. 태종 원년(1401) 정월 초하루 태종이 朝賀를 받고 康安殿에서 연회를 베풀 때 상장군 李膺(좌명 4등공신)이 반열의 차례를 어겼다고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는데, 태종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이는 필시 민무구가 憲司를 사주하여 한 것이다”066)≪太宗實錄≫권 1, 태종 원년 정월 신유.라고 하였다. 즉 민무구 등은 사헌부를 사주하여 그들이 꺼리는 자를 탄핵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적으로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태종초부터 있어 온 태종과 정비 간의 불화관계는 민씨형제들의 태종에 대한 불만·혐오의 마음을 품게 하였을 것이며,067)金成俊,<太宗의 外戚除去에 대하여>(≪歷史學報≫17·18, 1962), 573쪽. 태종으로서는 민씨세력을 반왕세력으로 의심하고 두려워하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태종 6년 8월에 태종이 內禪을 표명했다가 철회한지 1년이 지난 태종 7년 7월 민무구·무질 형제와 辛克禮 등이 반왕세력으로 탄핵을 받았다.068)金成俊, 위의 글, 581∼594쪽.
崔承熙, 앞의 글(1991b), 305쪽.
그 당시 領議政府事 이화 등이 민무구·무질 등에게 죄를 주도록 청한 상소는 다음과 같다.

지난해 전하께서 내선하고자 할 때 온나라 臣民이 痛心해 마지 않았으나 무구 등은 다행으로 생각하여 기뻐하는 안색을 보였고, 전하께서 여망을 좇아 복위한 후에 온나라 신민이 忻慶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무구 등은 도리어 걱정하였습니다. 대개 어린 세자를 끼고 威福을 부리고자 한 것이니 불충한 자취가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太宗實錄≫권 14, 태종 7년 6월 신유).

 그리고 계속하여 무구 등이 일찍이 세자를 제외한 왕자들을 제거할 것을 기도하였고, 또 태종이 끝내 그들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두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탄핵했다.

 중앙은 물론 지방에도 민무구 형제와 연결된 세력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태종 8년 9월 대간은 交章하여 무질 등에 朋比한 자들의 죄를 청하고 있는데 그 서두에 ‘자고로 逆亂之臣은 반드시 먼저 그 당을 심은 후에 반역을 했다’069)≪太宗實錄≫권 16, 태종 8년 9월 경오.라 하고 前鷄林府尹 李殷·星州牧使 尹臨·知善州事 尹愷·知淸道 郡事 康海珍과 8명의 영남지방 수령들이 무질에게 붕비·아부했다고 탄핵되었다. 당시 민무질은 대구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영남지방의 수령들까지도 무질에게 붕비·아부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민씨계 세력을 위험한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민무구 형제와 관련된 정치파동은 태종 10년 3월 민무구 형제가 賜死될 때까지 거의 3년을 끌었고, 趙瑚·趙希閔·李茂·李之誠·尹穆·李彬·柳沂 등 많은 희생자를 냈다.070)金成俊, 앞의 글, 581∼594쪽. 척신·공신의 강력한 정치세력을 억제·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태종 9년 9월에 외척에게 봉군하지 못하게 명령한 것071)≪太宗實錄≫권 18, 태종 9년 9월 무인.도 그 정책의 일환 이었다. 외척이 권력을 부리는 데서 오는 폐단을 방지하는 길은 외척세력의 싹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태종은 믿고 있었다.072)≪太宗實錄≫권 22, 태종 l1년 12월 무오. 민무구 형제와 이에 黨附한 세력에 대한 제거는 그의 의지의 실천으로 이해된다.

 민무구 형제와 그에 연계된 세력에 대한 숙청이 있은 지 5년 후인 태종 15년 4월에 그들의 아우인 閔無恤·無悔의 옥사가 일어났고, 다음해 정월에 무 휼형제는 각각 貶所에서 自盡하였다.073)金成俊, 앞의 글, 594∼602쪽. 이 옥사의 발단은 태종 15년 4월 무회가 廉致庸의 노비소송사건에 개입한 데서 시작되었고, 그 해 6월 세자가 무휼형제에게 치명적인 일을 태종에게 고함으로써 무휼형제를 사지로 몰고 갔다. 세자가 태종에게 고한 것은, 2년 전에 무회가 세자에게 ‘무구·무질 두 형은 모반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죄없이 죽었다’074)≪太宗實錄≫권 29, 태종 15년 6월 신미.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후 무휼형제가 자진할 때까지 대간은 물론이고 3공신(개국·정사·좌명)·의정 부·6조에서 그들의 불충한 죄를 계속 탄핵·청죄하였다. 태종은 무휼형제를 불러 그들이 그러한 발언을 한 사실이 있는지를 물었으나 두 사람은 부정하였다. 당시 태종은 세자를 불신하고 있었는데,075)崔承熙, 앞의 글(1991b), 313∼315쪽. 무휼형제에 대한 세자의 말은 인정하고, 이를 부정하는 무휼형제의 증언은 무시되었다. 세자의 보고가 없었더라도 태종은 이들 형제를 머지않아 제거할 뜻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결국 태종은 척족 민씨 형제와 그 동조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효과를 얻었다.

 셋째, 관료군의 정치세력화를 억제하였다. 태종조의 관료들은 개국공신계·고려구신계·태종공신계·종친계·척족계 등 다양한 계파로 구성되어 있었다. 태종은 이들이 강력한 정치세력 집단으로 성장하는 것을 억제하는 방책으로 이들 계파 가운데 유력한 자들을 균형있게 탁용하여 상호 견제하게 함으로써 강력한 정치세력이 되는 것도 억제하고 왕권도 강화하였다. 태종은 같은 그의 공신이라도 그 출신·계파가 다른 사람들을 함께 정승에 임명하여 서로 견제하게 함으로써 국정이 지체되는 폐단이 있었으나, 정치세력화를 방지하고 왕권을 유지하는 데는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 7년 5월말에 태종은 형조·사헌부·사간원 등 3성에 국정의 문제점을 숨기지 말고 진언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사헌부에서는 좌정승 하륜과 우정승 조영무가 매사에 대립하는 데서 오는 폐단을 해결할 방법을 다음과 같이 상소하고 있다.

좌정승 하륜·우정승 조영무는 매번 議事하는 때를 당하면 양자의 의견이 같지 않아 드디어 전하께서 재상을 임명한 뜻을 저버리고 있고…바라건대 전하께서 ‘同寅協恭’의 뜻을 생각하고 ‘四時代序之道’를 본받아 교대로 재상에 임명하여 함께 재직하지 못하게 하면, 정사를 의논함에 모순이 없어질 뿐 아니라 각기 익힌 바를 다 하게 되어 정사가 이루어질 것이며 체통이 바르게 되고 조정이 높아질 것입니다(≪太宗實錄≫권 13, 태종 7년 6월 계미).

 하륜과 조영무는 모든 정치논의에 의견이 대립되어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양 정승을 동시에 쓰지 말고 교대로 쓰도록 하자는 것이다. 하륜은 고려구신계요 태종공신이며, 조영무는 개국공신이요 태종공신이다. 전자는 문신인데 후자는 무인출신이다. 계파·출신이 다른 사람들을 함께 재상으로 임명하여 그들간의 대립을 적절히 조정함으로써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李叔蕃(정사 2등, 좌명 1등)은 태종공신이지만 민무구 형제와는 평소 꺼리는 사이였고076)≪太宗實錄≫권 18, 태종 9년 9월 임신. 고려 구신계인 이무·하륜과도 대립하였다.077)金成俊, 앞의 글, 604∼607쪽. 그런데 이숙번의 고려 구신계 또는 민씨 형제에 대한 공격은 태종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태종이 선위한 직후 이숙번에 대한 술회 중에 “叔蕃承我意攻無咎等甚力”078)≪世宗實錄≫권 2, 세종 즉위년 10월 갑진.이라 한 것은 이숙번이 태종의 뜻에 따라 민무구 등을 제거하는 데 앞장 섰다는 사실을 전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태종은 이숙번이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은 막았다.079)≪太宗實錄≫권 18, 태종 9년 9월 임신조에 보면, 태종은 尹柢가 이숙번을 가까이하는 것을 알고 그를 불러 이르기를 “경은 어찌 이숙번에 당부하는가”라고 경계하고 있는데 이는 이숙번이 붕당을 조직한 것이 아니라 朋比의 조짐을 미리 막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숙번의 정치적 역할은 태종의 뜻에 따라서 하륜 등 고려 구신계를 견제하고 민무구 형제 등을 제거한 것으로 끝났다. 결국 태종 16년 6월 이숙번은 불충·무례의 죄를 쓰고 농장으로 출거하게 되었고, 공신·대신·대간 등의 탄핵을 받아 공신록권과 직첩까지 수취당하였다.080)≪太宗實錄≫권 31, 태종 16년 6월 갑자·기사·경오·신사. 이숙번이 거세된 것은 태종 16년 6월, 가뭄으로 왕과 대신들이 매일 ‘弭災之議’를 올리고 있었으나 이숙번은 병을 칭탁하고 여러 달 동안 대궐에 나오지 않은 것을 단서로 하고 있다. 태종은 이를 구실로 이숙번의 불경·무례한 여섯가지 일을 들어 책망하였고 이에 따라 탄핵이 빗발치듯했고 마침내 거세되었다.

 태종 16년에 이르러 이숙번이 거세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숙번이 태종에게 더 이상 이용될 가치가 없어졌고 오히려 부담이 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당시 태종이 꺼리던 민무구 등 민씨척족과 그 동조세력은 제거되었다. 그리고 이숙번이 태종에게 큰 부담이 된 것은 태종 9년 8월 태종이 두번째로 內禪을 표명했을 때 이를 만류한 이숙번은 선위 시기를 묻는 태종에게 50세(태종 16년)에 선위해도 늦지 않겠다고 답변한 바 있다.081)≪太宗實錄≫권 18, 태종 9년 8월 임자. 결국 이숙번은 태종의 재위기간을 태종 16년까지로 한정시켜준 셈이 되었다. 태종 16년에 세자의 나이 23세가 되었으니 태종으로서는 계속 왕위에 있을 명분이 약해졌고, 이숙번이 부담스러워졌던 것이다. 태종은 그의 왕위를 계속 유지할 명분을 세 자의 失行에서 찾았고,082)崔承熙, 앞의 글(1991b), 310∼321쪽.「50세 선위」라는 이숙번증후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이숙번을 거세해 버렸던 것으로 이해된다.

 하륜은 정치세력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수를 다 할 수 있었다. 하륜은 고려말 반이성계파의 거물인 이색의 제자이나 閔霽(태종의 장인)와의 친분으로 방원에게 인도되었고, 또 태종공신이 되어 태종대 정치와 제도정비에 기여하였다. 그는 민무구 형제 탄핵이 계속되는 동안 민씨의 당여로 탄핵되기도 했으나 정승직을 계속하였다. 그가 천수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태종의 신망을 받았고 또 민씨세력에 대하여 동정은 하면서도 당여는 되지 않았으며, 뚜렷한 당여도 거느리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륜은 어떤 정치세력에도 가담하지 않았고 정치세력을 거느리지도 않았다. 태종 2년에 민제는 하륜이 자주 제도재혁에 관여하는 것을 꺼려하여 아들 무구·무질과 말하는 가운데 “나라사람들이 하륜을 정도전에 비교한다. 사람들이 하륜을 꺼림이 이와 같으니 오래지 않아 환을 당할 것이다”083)≪太宗實錄≫권 3, 태종 2년 정월 경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하륜은 천수를 다했고 민제의 네 아들과 고려 구신계의 많은 사람들은 희생당하였던 것이다.

 넷째, 친세자세력도 반왕세력으로 억제·제거하였다. 세자가 장성하자 세자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머지않아 왕위에 오를 것이 약속되어 있는 세자에 대한 관심은 당연한 것이지만, 태종으로서는 세자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그의 퇴위를 바라는 반왕세력으로 인식한 것 같다.

 태종 13년 정월 우정승 조영무·完原府院君 李良祐·完山君 李天祐·都摠制 李和英·趙涓·閔無恤·花山君 張思靖·同知摠制 柳殷之 등 대신·공신·종친 등 유력자들이 세자에게 몰래 매를 바친 것을 태종은 알고 있었다.084)≪太宗實錄≫권 25, 태종 13년 정월 정유. 태종은 유력자들이 자신 몰래 세자에게 환심작전을 쓰는 데 대하여 배신감과 왕위에 대한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점차 태종은 친세자세력을 반왕세력으로 경계하게 된 것 같다.

 태종 15년이 되면 세자에게 출입하는 사람들에 대한 태종의 경계가 더욱심해지고 있다. 태종 15년 정월에는 세자전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규찰하지 못했다는 죄로 敬承府의 小尹과 丞을 파직·좌천시켰다.085)≪太宗實錄≫권 29, 태종 15년 정월 을축. 곧 이어 태종은 세자 賓客 李來와 卞季良을 경연청에 불러 세자가 근래 憸小와 가까이하고 있으나 이를 막지 못한 것을 힐책하면서 “서연의 小儒들은 (세자가) 장차 그들의 임금이 될 것이므로 畏縮되어 간하지 못하고 대간 역시 그러하다”086)≪太宗實錄≫권 29, 태종 15년 정월 정묘.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분위기를 태종은 그의 왕위·왕권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였을 것이며, 세자 주변에 모여드는 사람들도 그의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하였을 것이다.

 태종은 동왕 16년 9월, 具宗秀를 杖 100을 치고 鏡城郡으로 유배하였고 李五方을 장 100을 치고 공주관노에 속하게 했는데, 세자궁을 넘어 들어간 죄 였다.087)具宗秀 등의 옥사에 대하여는 崔承熙, 앞의 글(1991b), 315∼319쪽 참조. 구종수가 유배된 이후에도 대간의 청죄는 계속되었고 세자의 실행도 계속 들춰졌다. 태종 17년 2월 실행을 계속하던 세자가 개과천선하겠다는 뜻을 보이기 위하여 사실대로 고함에 따라서 태종은 구종수 등의 세자와의 交結관계를 자세히 알게 되었고, 구종수의 두 형인 宗之·宗猷 등도 의금부에 하옥시켜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한편 구종수 등이 이숙번과 安置處에서 사통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나 이숙번을 延安府에서 압령하게 하였고, 며칠 후 이숙번과 구종수를 의금부 옥에 가두고 그들이 사통한 죄를 심문하였다. 그 결과 이숙번은 외방에 자원 안치하게 하였고, 구종수·종지·종유 세 형제와 이오방은 참하고 가산을 적몰하였다. 세자와 교결한 이들의 목적은 즉위한 후 덕을 보기 위한 것이었으나 태종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죄는 모반·대역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태종은 세자의 실행을 들춰내고 친세자세력을 억제·제거함으로써 그의 왕위를 정당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효과를 함께 얻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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