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2. 유교정치의 진전
  • 1) 유교정치의 표방

1) 유교정치의 표방

 유교는 삼국시대 이래 정치지배층의 기본적인 교양이 되어왔고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러나 유교가 국가정치의 지도이념으로 정착된 것은 조선시대부터였다.

 13세기말 元으로부터 신유학인 朱子學(宋學·程朱學·性理學으로도 부름)이 전래되기 이전의 우리 나라의 유학은 소위 漢唐儒學으로서 당시 유학의 목표는 첫째 유교경전과 역사를 밝게 익히고, 정치·법률의 제도를 잘 배워서 그것을 정치에 적용할 만한 훌륭한 관리가 되는 일과 詞賦와 문장을 능하게 하는 데 있었다.114)玄相允,≪朝鮮儒學史≫(民衆書舘, 1949), 14쪽. 그러나 13세기말 安珦(1243∼1306)이 당시 원에서 성행하던 주자학을 들여와 연구한 이후 白頤正·李齊賢을 거쳐서 李崇仁·李穡·鄭夢周·吉再·鄭道傳·權近 등 쟁쟁한 주자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따라서 여말 선초의 유학의 경향은 漢·唐流의 학풍과 주자학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宋學流의 학풍을 아울러 갖고 있었다고 하겠다. 공민왕대에 成均館과 과거제도가 부흥되면서 주자학은 하나의 관학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새로운 정치철학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으며, 공민왕 이후 과거를 통하여 주자학을 학습한 신진관료들이 관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주자학이 고려에 처음 수용될 때에는 유학자들은 불교에 대하여 전면적인 배척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교리상 서로 통하는 점을 들어 유·불 양립의 가능성을 내세우기도 하였으나 유학자들은 점차 불교사원의 폐단과 승려들의 비행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공민왕 원년(1352)에 이색(1328∼1396)은 사찰의 남설과 승려의 과다 등을 들어 상소로 논란한 바 있으나 이는 사원과 승려의 폐단을 지적했던 것이며 불교 자체에 대한 배척은 아니었다. 이색의 공적은 척불운동에서보다 揚儒운동에 있었다. 이색은 공민왕 16년에 성균관 大司成이 되자 金九容·정몽주·朴宣中·이숭인 등 쟁쟁한 인물들로 하여금 學官을 겸하게 하여 성균관을 중심으로 주자학이 크게 일어나게 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고려말 척불운동은 항상 성균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元·明 교체기에 있어서 친명의 노선을 따른 정몽주·朴尙衷·정도전·김구용·이숭인·권근 등은 사상적으로는 斥佛揚儒의 선봉이었다. 정몽주(1337∼1392)는 당시 儒者들의 존경을 받던 큰 유학자로서 향교를 새로 세우고 처음으로≪朱子家禮≫에 따라 士庶로 하여금 家廟를 세울 것을 권하는 등 유교진흥에 공이 큰 인물이지만 척불운동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강력한 척불운동은 공양왕 3년(1391) 4월 공양왕이 求言敎書를 내린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115)≪高麗史節要≫권 35, 공양왕 3년 4월·5월. 구언에 따라 5월부터 大司成 金子粹·成均館博士 金貂·政堂文學 정도전 등 이성계일파는 상소를 올려 불교가 민폐의 최대 원인이라 주장하고 군량과 국가재정의 궁핍이 심각하였던 당시에 불교사원의 경제적 비대와 전횡, 승려의 과다와 비생산성이 문제라고 불교를 공격하였다. 이 때 가장 활발히 척불을 주장한 사람은 정도전(1342∼1398)으로서 그는 척불의 실제적 근거를 정치·경제적인 면에서 굳게 파악한 척불운동의 제일인자라고 할 수 있다.

 유학자·신진사대부들이 새로운 관료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그들은 고려사회의 사상적 배경이었던 불교를 비판·부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진관료들 사이에도 분열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그들이 차지한 처지의 차이에서 연유되기도 했고 다른 한면에서는 주자학이 지닌 모순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였다. 주자학에서는 인륜, 특히 명분을 절대시하였으며 한편으로 정치현실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정치인으로서의 실천을 중요시하였다. 그리하여 고려말의 유학자·관료 중에는 고려왕조에 충성을 고수하려는 자들과 고려왕조의 정치·사회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국의 건설에 적극 참여하려는 자들 사이에 대립을 보게 되었다. 정몽주·길재 등은 전자의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정도전·趙浚 등은 후자의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그와 같은 대립은 있었으나, 고려말의 신진관료들은 주자학으로 교양되었고 불교를 배척하였으며 權門勢族이나 구세력과는 이하관계가 상반되었으므로 구사회·구질서를 부정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되었다. 이들에 의하여 李成桂가 왕으로 추대를 받아 조선왕조가 개국되었으므로 조선왕조는 유교를 정치지도이념으로 삼는 유교국가로서의 앞날이 전망되었던 것이다.

 1392년 7월 17일 이성계는 새 왕조의 왕으로 즉위하였고 그 12일 후에 즉위교서를 내렸다.116)≪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7월 정미. 즉위교서의 서두에서 이성계는 그가 왕으로 즉위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설명하고 국호를 그대로 고려라 하고 儀章과 법제는 모두 전조(고려)의 故事를 그대로 따른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급격한 변혁으로 인한 정치적·사회적 동요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즉위교서는 17조목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에는 새 왕조의 기본적 정치방향과 백성의 편익을 위한 약속이 있고, 禹玄寶·李穡 등 56인의 반이성계파 인물에 대한 처벌과 死罪를 제외한 범죄자들에 대한 특사령이 있다. 그 중 네번째 조목은 “冠婚喪祭는 국가의 큰 법이니 예조에 명하여 경전을 詳究하고 고금을 참작하여 법(著令)으로 정하고 이로써 인륜을 후하게 하고 풍속을 바로 잡도록 하겠다”라는 것이었다. 여섯번째 조목은 “忠臣·孝子·義夫·節婦는 풍속에 관계되니 권장하는 바가 있다. 그 곳의 官司에서 訽訪하여 申聞하면 우대하여 뽑아쓰고 門閭에 旌表하겠다”라는 것이었다. 전자는≪주자가례≫와 관련있는 조목으로 보인다. 당시 士庶의 가례는 재래의 방식과 불교식이 함께 내려왔을 것인데 갑자기≪주자가례≫에 의한다고 선언하면 이에 대한 거부·저항·마찰·충돌이 예상되었으므로 이를 피하여 완곡하게 경전과 고금을 참작하여 관혼상제의 의례·제도를 정하겠다고 했으나 결국≪주자가례≫, 유교적 의례에 의할 것임을 표명한 것이다. 후자는 유교의 도덕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三綱을 권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사서의 일상 의식을≪주자가례≫에 의하고 사회의 도덕규범을 삼강으로 삼는 유교사회, 유교정치를 지향할 것을 즉위교서에서 표명한 것이다. 그런데 즉위교서는 정도전이 製進한 것을 태조가 검토한 후 반포한 것이므로 유교사회의 건설은 태조의 의지이기도 하지만 정도전 등 유신들의 열망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개국과 태조대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정도전은 새 왕조의 이상적인 정치·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목적에서 태조 3년(1394)에≪朝鮮經國 典≫을 私撰하여 태조에게 올렸다.≪조선경국전≫에서 정도전은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체제와 제도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 방향은 유교정치·유교사회의 건설을 위한 것이었다.117)鄭道傳,≪三峰集≫권 7, 朝鮮經國與. 유교정치는 德治·仁治·王道政治의 실현을 이상으로 한다. 정도전은≪조선경국전≫에서 정치의 근본을「仁」이라 강조하고 있으며, 仁政은 人君의 마음을 바로잡은 후에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118)鄭道傳,≪三峰集≫권 7, 朝鮮經國典, 定國本.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체제는 周代의 冢宰 즉 재상 중심의 제도였다. 이 제도에서는 총재에게 정치의 실권이 부여된다. 총재의 직책은 위로는 인군을 받들어 올바른 인군으로 인도하고 아래로는 백관을 총괄하고 만민을 다스리는 무거운 책임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정치의 성쇠 여부는 총재의 賢否에 달려 있고 賢君 여부는 총재를 잘 선택하였는가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人主之職 在擇一相’119)鄭道傳,≪三峰集≫권 7, 朝鮮經國典, 宰相年表.이라고 논하고 있다. 이는 군주의 覇道·獨裁政治를 방지하고 자신과 같은 재상들에 의하여 주도되는 정치를 유교정치의 이상적인 체제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태조 4년에 정도전이≪經濟文鑑≫을 찬진한 것도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체제를 실현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며,≪경제문감≫상을「재상」만으로 구성한 것을 미루어 보더라도120)鄭道傳,≪三峰集≫권 5, 經濟文鑑 上, 宰相. 그의 재상중심정치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정도전을 비롯하여 이성계를 추대한 유학자적 관료들의 학문·사상의 경향과 그들의 유교정치 실현을 위한 계속적인 노력으로 조선왕조는 국초부터 유교를 정치의 지도이념으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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