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2. 유교정치의 진전
  • 2) 집현전의 설치와 유학자군의 성립

2) 집현전의 설치와 유학자군의 성립

 유교정치는 德治·仁治·禮治를 근본으로 하는 王道政治를 이상으로 한다. 유교정치를 실현하기 위하여는 왕과 신하가 유교에 깊은 교양을 갖는 것이 우선조건이고 유교정치를 할 수 있는 정치체제의 마련이 필수조건이 된다. 다음으로 국가의 모든 의례와 제도는 유교적으로 정비되고 왕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유교에 대한 교양·유교윤리(삼강오륜)가 일반화·생활화되는 것이 유교정치의 이상이고 목표이다. 다시 말하면 유교의 교양을 갖춘 국왕과 儒臣들이 유교정치를 할 수 있는 정치체제하에서 유교적 민본사상에 근거한 덕치·인정을 베풀고, 나라의 모든 의례는 예치에 입각하여 5례(吉禮·嘉禮·賓禮·軍禮·凶禮)에 의하는 것이다. 士庶의 가례는 4례(冠禮·婚禮 喪禮·祭禮)에 따라 행하며 유교윤리가 사서 모두에게 생활화되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 이상적인 유교정치·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상적인 유교정치·사회의 실현은 어려운 일이었다.

 조선왕조는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내세웠으나 유교정치의 실현은 표방만으로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조선 개국초≪조선경국전≫과≪經濟六典≫(태조 6년;1398)으로 국가의 법제적인 틀은 대강 갖추게 되었으나 유교국가의 필수인 유교적인 의례를 갖출 겨를이 없었다. 개국초에는 정치적·사회적 안정이 급선무였다. 정치체제는 고려말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고, 태조대의 정치는 강력한 왕권을 갖출 수 있었던 태조와 그의 신임을 받은 조준·정도전 등 소수 재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유교정치의 기틀은 아직 잡히지 못하였다. 태종대에도 정치적 안정과 왕권강화에 급급하였으므로 유교정치의 실현은 기대할 수 없었다.

 유교정치를 실현하기 위하여는 먼저 국가의 문물제도를 유교적인 것으로 재정비하는 작업이 따라야 하고 유교정치를 담당할 많은 유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대외관계에서도 학자적 관료가 필요했다. 조선왕조는 국초부터 명나라에 대하여 사대관계를 맺어 왔는데, 사대관계에서는 반드시 事大文書(表·箋·咨文)와 사행 그리고 明使의 접대가 따르기 마련이다. 까다로운 사대문서의 작성을 위해 상당한 수준의 유자적 관료(儒臣)가 필요했음은 태조 5·6년의 表箋문제로써 알 수 있다. 명에서 조선에서 보낸 표전문 가운데「輕薄戱侮」한 문구가 있다 하여 표전문을 작성한 사람을 압송하라고 강압하고 트집을 부린 일이 있었다. 사행에도 사신의 학문이 비천하면 그 사신이 받는 모멸은 차치하고 그 영향이 나라에까지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명사가 왔을 때에도 그들을 접대하는 우리 유신들의 학문과 문장이 그들을 압도할 만한 높은 수준에 있어야만 그들을 쉽게 다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그들의 태도는 오만불손해지고 조선을 경시하게 되는 것이었다.121)≪成宗實錄≫권 67, 성종 7년 5월 정사. 그러므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은 조선왕조가 명과 외교관계를 유지하면서 유교국가로 발전하기 위하여 절대 불가결한 조건이었던 것이다.

 조선 건국초에는 이성계를 추종하던 많은 유신들이 있었기 때문에 인재문제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즉 정도전·조준·韓尙質·권근·趙璞 등 많은 인물이 있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태조 7년에「제1차 왕자의 난」으로 죽임을 당하였고 한상질은 정종 2년(1400)에, 조준은 태종 5년(1405)에, 조박은 태종 8년에, 권근은 태종 9년에 차례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사정이 심각해졌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온 큰 유신들이 태종 10년 이전에 거의 모두 사라지게 되자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태종은 인재가 전과 같지 못함을 한탄하게 되었으며 유학을 진흥시키기 위한 시책의 하나로 성균관 유생에 대한 강의를 더욱 충실히 할 것을 성균관 學官들에게 명령 하였다.122)≪太宗實錄≫권 18, 태종 9년 12월 갑진.

 태종 10년 이후 인재의 양성과 유학의 진흥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과제가되었다. 그러나 성균관의 교육만으로는 이 과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유능한 유신들은 성균관에서 교육을 담당하기보다는 정계에서 활동하는 것을 희망하였고, 또한 성균관의 집단교육으로써는 국가의 기둥이 될 큰 학자·정치가를 기를 수 없었다. 그것은 성균관의 체제와 목적이 학자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로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관리후보생을 일정기간 교육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을 진흥시키기 위하여는 학문적 기초가 잡힌 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행정실무가 아닌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는 학술적인 기관이 필요하였다.

 개국초에 文翰과 관련있는 명칭을 가진 기관으로서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 아 修文殿·集賢殿·寶文閣을 두고 大提學·提學을 2품 이상으로 삼고 直提 學·直殿·直閣을 3·4품으로 삼았으나 관서와 직임이 없이 문신에게 관직명만 더해준 것이었으므로123)≪世宗實錄≫권 7, 세종 2년 3월 갑신. 아무 효과가 없었다. 정종 원년 3월에 藏書와 경서의 강론을 그 직무로 하는 집현전을 설치했으나 유명무실했다.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이 시급한 과제로 제기되기 시작한 태종 10년 11월 司諫院에서는 집현전을 개설하고 儒士를 선발하여 이들로 하여금 經史를 강론하게 할 것을 상소로 청하였으나124)≪太宗實錄≫권 20, 태종 10년 11월 계미.
이후 집현전과 관계되는 서술은 崔承熙,<集賢殿硏究(上·下)>(≪歷史學報≫32·33, 1966·1967)에 의한 것임.
시행되지 못하였다. 태종 17년 정월에도 사간원에서 올린 治道의 여러 조목에서 인재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집현전을 설치하고 유능한 문신을 뽑아 그 곳에서 경사를 강론하고 시·문을 짓게 하여 文風을 진작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그 설치를 보지 못하였다. 태종대에 있었던 집현전 설치 요청이 이루어지지 못한 데에는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와 이에 대한 태종의 기피에 원인이 있지 않았을까 한다. 태종대에는 계속 왕권강화에 힘을 기울여 신권이 많이 위축되어 있었으며, 또한 그 왕위는 명분과 정통성에 하자가 있었기 때문에125)崔承熙,<太宗朝의 王權과 政治運營體制>(≪國史館論叢≫30, 國史編纂委員會, 1991), 2∼10쪽 참조. 유신과 경사를 강론하는 자리인 經筵을 기피하여 태종대에는 거의 경연을 폐지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므로 태종에게는 경사를 강론하는 것을 중요한 직무로 삼는 집현전제도가 절실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교정치를 위하여 불가결한 유학자의 양성과 유학의 진흥을 위한 시책은 세종이 즉위한 후에야 이루어졌다. 세종 원년(1419) 2월에 좌의정 朴訔이 집현전에 문신을 뽑아 문풍을 진작시킬 것을 啓請하니 세종은 이를 기꺼이 받아 들였다. 그러나 그 후 이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나 계청이 없었으므로 세종은 그 해 12월에 “일찍이 집현전을 설치하자는 논의가 있더니 어찌 다시 계하지 않는가. 儒士 10여 명을 뽑아 매일 모여 강론하는 것이 좋겠다”126)≪世宗實錄≫권 6, 세종 원년 12월 임오.라고 친히 제의하였다. 그 후 세종 2년 3월에 이조에서 집현전에 祿官을 두자고 계청하여 허락을 받았고 곧이어 집현전이 새로이 설치되고 직제와 직장이 마련되고 관원이 임명되었다.127)≪世宗實錄≫권 7, 세종 2년 3월 갑신. 이 때의 집현전이 세종대의 정치와 문화가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음은 재언할 필요가 없다. 이 때 마련된 집현전의 직제는 다음과 같다.

領殿事(정1품)·大提學(정2품)·提學(종2품)·副提學(정3품)·直提學(종3품)·直殿(정4품)·應敎(종4품)·校理(정5품)·副校理(종5품)·修撰(정6품)·副修撰(종6품)·博士(정7품)·著作(정8품)·正字(정9품)

 위의 관직에서 제학 이상은 대신들의 兼官이고 부제학 이하는 녹관(전임직)이다. 녹관으로서 申檣·金赭는 직제학으로, 魚變甲·金尙直은 응교로, 偰循·兪尙智는 교리로, 兪孝通·安止는 수찬으로, 金墩·崔萬理는 박사로 임명되었다. 녹관의 모든 관직을 채우지는 않았으나 녹관으로 임명된 위의 10명은 모두 경연관을 겸하였다. 세종은 재주와 덕행이 있고 연소한 문신을 택하여 집현전의 녹관으로 임명하고 오로지 經史를 강론하는 일에 종사하도록 했으니 유능한 젊은 학자들을 장차 유교정치에 요긴하게 쓸 인물로 크게 키우기 위한 원대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종의 집현전관에 대한 관심과 대우는 특별한 것이었다. 집현전에 결원이 생기면 집현전당상·이조당상과 의정부 대신이 의논하여 천거하였고, 집현전관은 각 품의 班頭(首席)에 두었고, 사헌부의 규찰을 받지 않게 하였으며 서적을 인쇄하면 먼저 집현전학자들에게 내려주었다. 이처럼 집현전관은 여러 가지 특전과 신분의 보장을 받는 가운데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賜暇讀書를 내려주었다. 세종 8년에 세종이 權採·辛石堅·南秀文 등 젊은 집현전 학자들을 불러 사가독서를 내리면서 이르기를 “내가 너희를 집현전관으로 임명한 것은 젊고 장래성이 있어 그 독서(학문)가 좋은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기 직사에 얽매어 독서에 전념할 겨를이 없었다. 이제부터는 本殿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전심으로 독서하여 좋은 성과를 내서 나의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128)≪世宗實錄≫권 34, 세종 8년 12월 경오.고 하였다. 이 후에도 종종 젊은 집현전 학자들에게 사가독서를 내렸으며 그것은 후에 讀書堂 제도가 되었다.129)金庠基,<讀書堂考>(≪震檀學報≫17, 1955). 여기서 세종의 인재양성의 원대한 계획의 일단을 볼 수 있으며, 그가 집현전 학자에 대하여 얼마나 큰 관심과 기대를 갖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집현전은 학자양성·학문연구를 위한 기관이었기 때문에 일단 집현전관으로 임명되면 장기근속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 즉 집현전관은 박사·저작·정자 등 하위직으로 임명되면 다른 관서로 전직되는 일이 거의 없이 직제학·부제학에 이르렀던 것이다. 세종 10년대 후반부터 집현전 학자 가운데 政曹·臺諫으로 나아가기를 희망하는 경향이 생기자 세종은 ‘專業學術 期以終身’130)≪世宗實錄≫권 63, 세종 16년 3월 정유.하라고 강경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10년∼20년 집현전에만 근속하는 학자가 많았다. 최만리도 20년 이상 집현전에 근속한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집현전의 최고의 녹관인 부제학 또는 직제학에서 수년이 경과된 후에야 6조·의정부·승정원·대간 등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이처럼 집현전관을 오랫동안 근속시킴으로써 집현전은 학자양성·학문연구기관으로서의 사명을 다할 수 있었으며 그 동안에 그들은 당대 최고수준의 학자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집현전은 학자양성·학문연구기관으로서의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많은 인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세종 2년 처음 집현전을 설치했을 때에 10명이었던 것이 4년에 15명으로, 8년에 16명으로, 17년초에 22명으로, 17년 7월에 32명으로 계속 증원되었다가 너무 많다는 여론이 있어 18년 윤 6월부터는 20명으로 고정되었다. 당시 의정부의 관원이 영의정을 비롯하여 12명이었고 각 조의 관원은 직사가 많은 호·병·형조를 제외하면 9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사헌부도 監察을 빼면 6명, 사간원은 5명에 불과했던 것을 감안하면 집현전관의 정원은 당시의 정치체제로서는 특례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집현전을 학자양성·학문연구기관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집현전의 직무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집현전의 학술적인 기능은 설치 초기부터 정해졌고 집현전이 혁파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經筵과 書筵의 담당이었다. 경연은 왕과 유신이 경서와 사서를 강론하는 자리로서, 국왕으로 하여금 유교적 교양을 쌓고 사서를 통하여 역대 治·亂의 역사를 익혀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연은 장차 왕이 될 세자의 교육을 위한 것이다. 군주의 유교적 교양과 역사에 대한 지식은 유교정치를 펴는 데 불가결한 것으로 경연과 서연의 중요성은 재언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세종 2년 집현전이 처음 설치되었을 때에는 집현전관 10명 전원이 경연관을 겸하였고 정원이 32명이었던 때에는 22명이 경연관을, 10명은 서연관을 겸했으며, 정원이 20명으로 고정된 후에는 경연과 서연에 각각 10명씩 배정되었다. 경연에서는 주로 유교경서와 사서가 강의되었으나 때로 중요한 정치문제도 의견이 교환되었으므로 경연은 일종의 학술과 정치 세미나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따라서 경연관은 학문과 정치에 대하여 상당한 수준의 식견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세종의 입장에서 보면 경연은 자신의 학문과 정치에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경연을 전담하다시피한 집현전관들의 학문적 능력을 파악할 수 있고 그들의 학문을 격려하고 자극을 주는 자리가 되기도 했다.

 집현전관은 명과의 외교관계에 불가결한 외교문서(表·箋·咨文)의 작성과 명사의 접대도 담당하였고, 과거에 시험관으로도 참여하였다. 또한 春秋館職을 겸하였을 뿐 아니라 나라와 궁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록하는 史官도 겸하였고 왕명을 작성하는 知製敎도 겸하였다. 위에서 든 일들은 모두 문신·학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또한 세종 10년대부터는 古制연구와 편찬사업 등 학술적인 사업을 주도하였다. 이처럼 집현전관들의 직무가 학술과 관계있는 것이었음에도 세종은 집현전관이 직무에 얽매어 학문에 전념할 수 없다고 염려하여 사가독서를 내리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집현전 출신들은 큰 학자로 성장했고 이들에 의하여 유교정치의 기틀이 마련되었으며 세종대 문화의 수준을 그 전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세종 20년대부터 집현전은 학술적인 기관이면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세종은 일찍부터 신병으로 고통을 받아오다가 세종 19년(1437)에는 건강을 이유로 세자로 하여금 서무를 재결하게 하려 하였다. 이 때의 의도는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이루지 못하였으나 동 24년에는 많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詹事院을 설치하였다. 첨사원은 세자로 하여금 서무를 처결하게 하기 위하여 설치한 왕자의 관부이다. 그런데 첨사원의 관원인 詹事·同詹事의 후보로는 서연관이 가장 유리하였는데 당시 서연관 10명은 모두 집현전관이 겸하고 있었으므로 자연히 집현전관이 대개 청사를 겸하게 되었다. 따라서 집현전관은 직접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세종 25년 이후 세자의 섭정이 이루어졌다. 즉 세자로 하여금 모든 신하들이 한 달에 네 번 正殿에서 임금께 문안드리고 정사를 아뢰는 朝參을 받게 하였다. 또 세자가 南面해서 조회받게 하고 1품 이하 모든 신하로 하여금 稱臣하게 하였으며 서연에서 진강할 때에 4품 이상의 문무관을 매일 돌려 가며 참여케 하였다.

 세종 27년 정월 세종이 內禪의 뜻을 표한 후에 세자의 본격적인 섭정이 시작되었다. 세자는 繼照堂에서 조참을 받았고 서무를 재결하였으며 정사를 돌보게 되었다. 3품 이하의 제수에는 세자의 圈點을 받아야 했다. 이와 같이 세자의 섭정이 이루어지면서 세자와 가장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첨사·서연관 즉 집현전관은 자연히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집현전의 언론·정치상의 활동이 활발하게 되었다. 세종 25년 이후 집현전은 언론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의정부·6조·사헌부·사간원과 함께 국정논의에 직접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학술적인 기관이었던 집현전은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기관으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세종의 재위기간 동안에는 집현전관의 정조·대간으로의 전출은 억제되었다. 세종이 세상을 떠나고 문종이 즉위하면서 사태는 일변하여 집현전관의 대간 또는 다른 정치기관으로의 전출이 크게 늘어났고 집현전도 정치기관화되어갔다.

 집현전의 역사적 공훈의 중요한 하나는 많은 학자적 관료(유신)를 배출하여 세종대는 물론 그 이후의 정치와 문화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동력을 마련해준 데 있다. 세종 2년부터 집현전이 혁파된 세조 2년(1456)까지 37년 동안 집현전에 재직한 경력을 가진 학자는 90여 명에 달한다.131)崔承熙, 앞의 글(1967), 附表 2.
鄭杜熙,≪朝鮮初期政治支配勢力硏究≫(一潮閣, 1983), 128쪽,<表 3-1>.
그 중 저명한 인물들의 생몰 연대와 대표되는 경력을 간단히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姜希孟(1424∼1483, 좌찬성)·權擥(1416∼1465, 권근의 손자, 靖難功臣, 좌의정)·權採(1399∼1438, 좌승지)·金墩(1385∼1440, 예조판서)·金禮蒙(1406∼1469, 이조판서)·金壽寧(1437∼1473, 이조참판)·南秀文(1408∼1443, 집현전직제학)·盧思愼(1427∼1498, 영의정)·盧叔仝(1403∼1464, 청백리, 지사간원사)·朴仲林(?∼1456, 박팽년의 부, 이조판서)·朴彭年(1417∼1456, 사육신, 형조참판)·徐岡(?∼1461, 대사성, 세조의 숭불을 논란하다가 사형됨)·徐居正(1420∼1488, 대제학, 좌찬성)·成三問(1418∼1456, 사육신, 좌부승지)·辛石祖(1407∼1459, 대사헌)·申叔舟(1417∼1475, 靖難·佐翼功臣, 대제학·영의정)·申檣(1376∼1433, 신숙주의 부, 대제학)·安止(1377∼1464, 대제학·영중추원사)·梁誠之(1415∼1482, 대제학·지중추부사)·魚孝瞻(1405∼1475, 이조판서·판중추부사)·柳誠源(?∼1456, 사육신, 사예)·柳義孫(1398∼1450, 예조참판)·尹子雲(1416∼1478, 윤회의 자, 우의정)·尹淮(1380∼1436, 대제학)·李塏(1417∼1456, 사육신, 직제학)·李季甸(1404∼1459, 이색의 손자, 대제학·영중추부사)·李克堪(1427∼1405, 형조판서)·李思哲(1405∼1456, 정난·좌익공신, 좌의정)·李石亨(1415∼1477, 지중추부사)·鄭麟趾(1396∼1478, 정난·좌익공신, 대제학·영의정·원상)·鄭昌孫(1402∼1487, 좌익공신·영의정·원상)·曹錫文(1413∼1477, 영의정)·崔萬理(1390∼1445, 청백리, 부제학)·崔恒(1409∼1474, 정난·좌익공신, 대제학·영의정)·河緯地(1387∼1456, 사육신, 예조참판)·韓繼禧(1423∼1482, 좌찬성)·洪應(1428∼1492, 좌의정)

 위의 인물 가운데 정승(相臣)이 된 사람은 정인지·이사철·정창손·신숙주·권람·조석문·최항·윤자운·홍응·노사신 등 10명에 달하고 文衡(대제학)으로 기록된 사람도 윤회·정인지·안지·신장·신숙주·최항·양성지·이계전·서거정 등 9명에 이르고 있다. 당대의 대학자·정치가는 모두 집현전출신 학자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이 세조 이후 官學派·勳舊派의 중심을 이루게 되며, 당대의 정치와 문화가 이들에 의하여 주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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