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2. 유교정치의 진전
  • 3) 유교적 의례·제도의 정비

3) 유교적 의례·제도의 정비

 유교정치에서 형식적이면서 중요한 내용이 되는 것이 禮·樂이다. 유교정치에서는 의례를 대단히 중요시하는데 국가의 의례(5례)에는 반드시 음악이 따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음악관계는 별도로 서술되겠으므로 여기서는 유교적인 의례·제도의 정비과정만을 살피기로 한다.

 유교정치를 표방한 조선왕조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유교적인 의례·제도의 정비작업이었다. 고려시대에도 정치에서 5禮가 행하여졌음은≪高麗史≫志 권 13부터 23까지 11권이 禮志로 되어 있는 사실로써 분명하다.132)≪高麗史≫권 59∼69, 志 13∼23.
李範稷,≪韓國中世禮思想硏究≫(一潮閣, 1991), 46∼170쪽.
즉 고려시대에도 그 나름대로 유교적 의례인 5례가 행해졌다. 그러나 유교정치를 표방한 조선왕조에서 고려시대에 행하던 5례를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고려시대의 문헌으로≪吉今詳定禮≫·≪周官六翼≫등이 참고되었고 중국의 문헌으로는≪禮記≫·≪周禮≫·≪儀禮≫·≪洪武禮制≫등이 예학의 기본자료로 이용되었으며,≪唐書≫·≪宋史≫·≪元史≫·≪通典≫·≪文獻通考≫·≪冊府元龜≫·≪事林廣記≫등 사서와 類書類가 참고되었다.133)李範稷, 위의 책, 195∼203쪽. 그러므로 조선 초기 의례·제도를 마련·정리할 때에「稽古制」라 할 때의 고제는 고려시대의 예서와 중국의 예서·사서·유서류 등이 포함되는 것이다.

 조선 초기 유신(유학자적 관료)들은 3대(夏·殷·周)의 제도를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정도전이≪경제문감≫에서 周官을 중요하게 다룬 것은 이를 나타낸다. 또한 한·당·송의 제도에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은 당·송의 제도가 거의 완비된 상태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 초기 관직제도의 정비과정에서는 중국 역대의 제도가 모두 참고자료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조선개국 후 유교적인 의례·제도의 정비를 위한 작업인 고제연구 는 언제부터 어떤 관서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그 내용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살펴보자.

 정도전의≪조선경국전≫이나≪경제문감≫은 고려와 중국의 고제에 대한 연구성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태조·정종대에는 개국초여서 겨를이 없어 고제연구에 힘을 기울일 수 없었다. 태종초부터는 의례·제도에 대한 고제의 연구가 나타나고 있다. 고제연구의 중심이 된 기관은 예조였지만 때로는 의정부·이조·병조 등에서도 행하였다. 또한 어느 관서를 막론하고 의례·제도에 관한 啓와 상소에 고제에 관해서 언급이 없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특히 예조의 의례·제도에 관한 계는 거의 모두가 고제연구의 결과라고 할 수 있으나 대개 태종 8년(1408) 이후 볼 수 있는 것이며, 그 내용은 5례에 관한 것과 정치·제도에 관한 것이었다. 태종 10년 8월에는 유교적 의례·제도를 마련하기 위하여 儀禮詳定所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태종대에는 의례·제도의 정리를 위한 예조의 고제연구나 의례상정소의 활동도 활발하지 못하였다.

 세종이 즉위하면서 의례·제도의 정비를 위한 고제연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중심은 예조·의례상정소와 집현전이었다. 이 세 기관의 고제연구의 대체적인 동향을 보면 다음<표 1>과 같다

    기관
  횟수
내용
예 조 의례상정소 예조·상정소 집 현 전
횟수 % 횟수 % 횟수 % 횟수 %
五 禮 61 73 14 29 11 61 27 40
四 禮 11 13 9 18 2 11 8 12
制 度 11 13 15 31 5 28 12 18
施 政 0 0 11 22 0 0 17 25
기 타 1 1 0 0 0 0 3 5
84 100 49 100 18 100 67 100

<표 1>예조·의례상정소·집현전의 고제연구 동향

*崔承熙,<集賢殿硏究(上·下)>(≪歷史學報≫32·33, 1996·67) 참조.

 위의 표에서 5례는 국가의 의례인 吉禮·嘉禮·賓禮·軍禮·凶禮를 뜻하며, 4례는 士庶의 冠·婚·喪·祭禮를, 제도는 관제를 비롯한 국가의 제도를, 시정은 실제 정치에 관한 또는 이에 참고하기 위한 것을 의미한다. 위의 표는 완전한 것이라 할 수는 없으나 대개 당시 유교적 의례·제도를 마련하기 위한 세 기관의 고제연구의 동향은 살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먼저 예조를 보면 5례가 61회로 가장 많고 4례·제도가 모두 11회로 합 계 84회나 되어 세 기관 중 가장 많으며, 예조·의례상정소 공동분을 감안하면 100회 이상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내용으로 볼 때에도 유교적인 의례·제도를 정비하기 위한 근본적인 문제가 다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의례상정소는 태종 10년 8월에 설치되어 세종 17년(1435)에 폐지되었다. 그 提調는 의례에 밝은 정승·판서급에서 겸하였으며, 특히 許稠는 태종대부터 상정소가 폐지될 때까지 단골로 제조를 겸한 의례에 정통한 학자적 관료였다.134)李範稷, 위의 책, 206∼229쪽. 그 해 상정소가 폐지된 이유는 더 이상 존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상정소가 없어도 예조와 집현전에서 의례·제도의 정리를 위한 임무를 무난히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의례상정소의 활동을 보면 총 49회 가운데 5례에 관한 것이 14회, 4례 9회, 제도 15회, 시정 15회로 되어 있다. 상정소에서는 유교적 의례뿐 아니라 제도에 관한 것과 실제 정치와 관련 있는 문제를 많이 다룬 것을 볼 수 있다.

 예조와 의례상정소가 공동으로 행한 것은 총 18회에 지나지 않으나 그 가운데 5례에 관한 것이 11회로 가장 많고 제도·4례의 순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내용으로 볼 때 예조와 의례상정소에서는 유교적 의례·제도의 큰 줄기가 되는 문제를 많이 다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집현전의 고제연구는 세종 10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때부터 집현전의 학술적인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그것은 이 때에 집현전 학자들이 학술적인 활동을 할 만한 능력과 준비가 갖추어졌음을 의미하며 세종의 인재양성을 위한 노력이 상당히 성공적이었음을 뜻한다. 집현전의 고제연구는 총 67회인데 그 중 5례가 27회로 가장 많고 시정(17회)·제도(12회)·4례(8회) 순으로 되어 있으며 예조의 활동과 확연히 구별되는 것은 시정관계의 고제연구가 예조에는 없는 반면에 집현전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예조·의례상정소·집현전은 모두 유교적 의례·제도의 정비를 위한 활동을 했다는 점은 공통되지만 집현전의 고제연구는 위의 두 기관과는 구별되는 점이 있다. 예조와 상정소에서는 유교적인 의례·제도의 큰 테두리, 큰 줄기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고 집현전의 활동은 의례·제도를 시행할 때 나타나는 세부적이고 기술적인 문제를 밝히고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큰 테두리와 줄기를 마련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의례·제도의 세부적이고 기술적인 문제를 밝히는 일이 더욱 학문적·기술적 작업이라 하겠고, 의례·제도의 정비와 시행에 있어서 절대로 필요한 일이라 할 것이다.

 집현전의 고제연구의 또 하나의 특징은 수시로 당면하는 정치·제도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데 있다. 세종은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일단 집현전으로 하여금 그 문제에 관한 고제를 연구하게 하고 이를 참고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물론 세종은 고체연구의 결과가 우리 나라의 현실과 그의 의지에 맞지 않으면 채택하지 않았다.

 이처럼 세종은 예조·의례상정소·집현전 등으로 하여금 고제를 연구하게 하여 유교적인 의례·제도를 정비해 갔다. 실제로 조선왕조의 유교적 의례·제도의 틀은 세종시대에 마련되었다고 보겠다. 세종 26년(1444)에 집현전학자를 중심으로 편찬된≪五禮儀注≫와 세조 2년(1456)에 편찬된≪世宗朝詳定儀注≫와≪세종실록≫5례가 바로 이 사실을 전해 준다. 그 후 미비한 것을 보충하여 성종 5년(1474)에≪國朝五禮儀≫가 완성됨으로써 일단 국가의 의례는 정비된 셈이다. 이와 같은 유교적인 의례·제도의 정비는 조선왕조 유교정치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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