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2. 유교정치의 진전
  • 5) 유교적 국정운영체제의 성립

5) 유교적 국정운영체제의 성립

 유교정치는 표방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유교정치를 위하여는 먼저 유교 정치에 적합한 정치체제나 제도가 마련되어야 하고, 유교적 교양을 가진 군주와 관료가 있어야 하며, 정치적 안정과 왕권의 강화도 불가결하다. 왕권이 지나치게 강대해질 수 있는 정치체제하에서 왕도정치·유교정치의 실현은 어려우며 반면 신권이 과대하여 왕권을 압도하는 상태도 이상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가운데 신하는 왕의 권위를 존중하고 왕은 신하의 의견을 존중할 수 있어야 소위 유가에서 이상으로 하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기대할 수 있다. 이상적인 유교정치가 실현되기 위하여는 이에 적합한 정치·제도 위에 유교의 교양을 갖춘 올바른 군주와 신하가 서로 만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조선 개국 당시 이성계를 새 왕조의 왕으로 추대·지지해준 것은 都評議使司와 그 임원들이었다. 도평의사사는 고려 충렬왕 5년(1279)에 기존의 都兵馬使를 개칭한 것으로서, 문무고관들의 합좌기관이었다. 조선 태조 원년(1392) 7월 문무백관의 제도를 정할 때 도평의사사는 門下府·三司의 정2품 이상, 中樞院의 종2품 이상 고관(29명)들이 겸하는 국가의 최고기관으로 정해졌다. 비록 고려시대의 제도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하나 문무고위관원들이 합좌하여 국정을 논의하도록 되어 있는 도평의사사 제도는 그 운영 여하에 따라서 유교정치에 적합한 정치체제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태조 이성계 왕권은 개국의 군주답게 확고한 것이었으나136)崔承熙,<朝鮮太祖의 王權과 政治運營>(≪震檀學報≫64, 1987). 당시의 형편으로는 유교정치를 펼 준비도 겨를도 없었다. 우선 시급한 것은 왕조 교체에 따른 정치적·사회적 안정의 확보였다. 개국 초창기여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일들이 산적해 있었다. 당시 도평의사사는 최고의 정치기관으로서 국정을 상달하기도 하고 왕명을 받아 시행하는 등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음은 인정되지만, 태조로서는 대소 국정을 모두 29명이나 되는 도평의사사의 임원들이 모여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인식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태조는 국정을 도평의사사를 중심으로 끌어나간 것이 아니라 조준·정도전·남은 등 소수 재신 중심의 정치를 행하였던 것이다.137)崔承熙, 앞의 글(1991), 28쪽. 정도전은 주나라의 冢宰(재상) 중심의 정치를 이상적인 것으로 강조하였는데, 그는 자신과 같은 재신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정치체제를 총재의 제도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당시 도평의사사의 임원 29명 가운데 17명이 개국공신, 8명이 원종공신으로 구성되어 있고, 52명의 개국공신과 1,400여 명의 원종공신이 있는 가운데 소수의 재신중심의 정치는 다수의 문무관료·종친·도평의사사 임원 및 공신들이 불평과 불만을 갖게 할 수밖에 없었으며, 유교정치를 펼 수 있는 이상적인 정치체제가 될 수 없었다.

 「제1·2차 왕자의 난」을 주도한 芳遠이 실세가 되고 그의 의지에 따라 정종 2년(1400) 4월 도평의사사가 議政府로 개편되고 또 그가 즉위(太宗)하여 그 원년(1401) 7월에 의정부관제를 개편한 이후 태종 14년까지 의정부가 최고의 정치기관으로서 정치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그것을 소위 議政府署事制라고 한다. 의정부대신들이 국정을 논의하고 왕의 재가를 받아 정치가 이루어지는 의정부서사제는 주나라 총재의 제도에 가까운 정치체제로서 유교정치에 바람직 한 것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의정부는 그 직장과 직제로 보아 강력한 정치권력을 가진 최고의 관부였으므로 태종으로서는 의정부의 정치권력을 축소시키는 것이 왕권강화를 위한 중요한 방향이었다. 태종 5년 정월의 관제개혁에서 6조를 승격시키고 의정부의 서무를 나누어 6조에 돌리려 한 조치는 의정부에 집중된 정치권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여 태종 8년(1408) 정월에 ‘始以議政府庶務 歸之六曹’라고 하였고 태종 14년 4월에도 ‘分政府庶事 歸之六曹’라고 한 것을 보면, 태종은 개혁을 기도한 지 1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六曹直啓制의 실현을 보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6조는 정치권력이 강화되기는 했으나 과거 의정부서사제하에서의 의정부와 같이 정치권력의 핵심기관은 되지 못하였다.

 태종 14년 4월까지는 국정의 대부분이 의정부의 擬議를 거쳐 시행되었으므로 의정부의의는 의정부에 정치권력이 집중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태종 14년 4월 이후는 의정부 단독의 의의는 거의 사라지고 6조의의가 의정부의의를 대신하여 나타났다. 또한 의정부·6조의의, 의정부·6조·대간 동의가 이루어졌으며 때로는 여기에 承政院·공신까지도 함께 정사를 논의하는 체제로 변화하였다. 이처럼 국정을 의정부·6조뿐 아니라 대간·승정원·공신 등 중요한 정치기관과 그 관원들이 함께 논의하게 된 정치운영체제의 변화는 과거 정치권력이 의정부 또는 몇몇 재신들에게 집중되던 체제에서 여러 관부로의 권력분산을 의미한다. 태종은 권력분산적 국정운영을 통하여 그의 왕권을 강화·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정부·6조와 대간·승정원 등 중요한 정치기관이 국정을 함께 의논하는 국정운영체제라면 유교정치를 펴는 데 적합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운영체제는 유교적 민본정치, 덕치·인정·예치를 내세우는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태종의 왕권을 강화·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왕권강화와 정치적 안정에 급급한 태종대에 유교정치의 실현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그의 치세 동안 계속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을 제거하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138)崔承熙, 위의 글, 10∼22쪽. 그의 뜻을 거스르는 언론은 용납하지 않았다. 때때로 대간의 언론은 그의 무단 앞에 완전히 봉쇄되었고 대간이 유배되는 일이 흔하였다.139)崔承熙,≪朝鮮初期 言官·言論硏究≫(서울大 出版部, 1976), 116∼127쪽. 태종 12년 3월 대간이 누차 朴蔓 등의 죄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므로 모두 사표를 제출하였고 태종은 이를 서슴지 않고 수리해버렸다. 이에 의정부에서 대간의 복직을 청하자 태종의 답변은 ‘此間에 不必臺諫’140)≪太宗實錄≫권 23, 태종 12년 3월 무술.이라 하였다. 의정부에서 계속 대간의 복직을 청하였으나 태종은 “무릇 조종하는 권한은 나에게 있는데 어찌 의정부가 간여하는가. 이제부터 대간의 직을 혁거하겠다. 내가 전일 대간의 자리를 모두 채우지 아니한 것은 이와 같이 번거롭고 시끄러운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141)≪太宗實錄≫권 23, 태종 12년 3월 경자.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관료들에게 무단적인 왕권을 행사한 태종대에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유교정치의 실현은 정치체제의 적합 여부보다는 유교정치를 할 수 있는 기반의 조성과 君臣의 유교적 교양의 실천의지 여하에 달린 것이다.

 정치지도자의 자질과 교양이 그 시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고금이 같으나 전근대사회에서 군주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태종 18년 6월 태종이 세자 禔(讓寧大君)을 폐하고 새 세자를 결정할 때 忠寧大君(세종)이 형 孝寧大君을 제치고 세자로 책봉될 수 있었던 것은 충녕이 효령보다 군주로서의 자질·학문·독서량에서 우월했기 때문이었다.142)≪太宗實錄≫권 35, 태종 18년 6월 임오.
崔承熙,<太宗末 世子廢立事件의 政治史的 意義>(≪李載龒博士還曆紀念韓國史學論叢≫, 1990), 329쪽.
세종은 즉위 전에 학문을 좋아하여 폭넓은 독서를 하였고 군주가 갖추어야 할 유교적 교양을 쌓았으며, 세종 2년(1420)에는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자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에 힘썼다. 뿐만 아니라 자신도 경연에 힘써 학문과 교양을 넓혀 당시의 학자들도 미치기 힘들 정도로 높은 수준의 학자적 군주가 되었다. 세종재위 32년간 이루어 놓은 유교적 의례·제도의 정비, 유교정치에 기초가 되는 각종 편찬사업과 문화 정리사업, 민본적 유교정치의 실현 등은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국정운영방법은 체제가 완전히 바뀌지 않는 한 갑자기 변할 수 없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었을 때에도 고려의 정치체제가 거의 그대로 이어졌고, 태조가 물러나고 태종이 즉위한 후에도 얼마 동안 태조대의 정치운영체제가 남아 있었던 것과 같이143)崔承熙, 앞의 글(1991), 23∼25쪽. 정치운영체제에는 관성이 있는 것이다. 세종이 즉위했으나 태종이 上王으로서 엄존하였고, 특히 군사관계는 상왕이 직접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세종 4년 5월 상왕이 사망하기까지는 태종말의 국정운영방식이 거의 그대로 행해졌다. 태종은 세종에게 전위한 후에도 병권을 장악함으로써 상왕으로서의 권위와 신변의 안전을 확보·유지하려 하였다. 태종이 세종 즉위년(1418) 11월에 朴習·姜尙仁 등과 세종의 장인 沈溫 등을 그의 병권 장악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몰아 제거한 사건은 상왕으로서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세종은 상왕이 생존한 동안 상왕의 정치적 영향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왕명(敎旨·傳旨)과 별도로 상왕명 (宣旨)이 나왔고144)≪世宗實錄≫권 1, 세종 즉위년 9월 갑술 및 권 4, 세종 원년 5월 기미. 군사문제는 상왕이 의정부·6조에 동의하여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145)≪世宗實錄≫권 1, 세종 즉위년 9월 무진. 또한 태종 14년(1414) 4월 이른바 6조직계제 실시 이후부터 나타나는 의정부·6조동의의 국정운영 관행이 상왕의 생존기간 계속되고 있고146)≪世宗實錄≫권 1 세종 즉위년 9월 임신·권 7, 세종 2년 정월 무술·권 9, 세종 2년 9월 병인·권 10, 세종 2년 11월 기사 및 권 15, 세종 4년 2월 경인 등 참조. 의정부·6조가 함께 계하기도 하였다.147)≪世宗實錄≫권 8, 세종 2년 7월 정축 및 권 13, 세종 3년 8월 임진. 그러나 태종 14년 이후 의정부·6조에 대간·승정원까지 동의하게 하던 국정운영방식은 세종 즉위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세종 4년 5월 상왕이 薨去하기까지는 태종의 국정운영방식에서 세종 독자적인 것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고 보겠다.

 그러나 세종 4년 5월 태종이 훙거한 이후에도 의정부·6조의 동의는 변 함없이 계속된다. 세종 4년에도 ‘政府六曹同議’148)≪世宗實錄≫권 16, 세종 4년 6월 계묘. ‘召三議政六曹參判以上議’149)≪世宗實錄≫권 18, 세종 4년 10월 임진.라고 하여 국사를 의정부·6조에 논의하게 하였고, 세종 5년 이후에도 각 조에서 계한 것을 의정부·6조에 내려서 심의하게 하고 이를 숙의하여 계하도록 하였다.150)≪世宗實錄≫세종 5년 2월 임신·권 27, 세종 7년 3월 기묘·권 41, 세종 10년 7월 신해. 세종 11년 3월에는 병조에 명하여 군사관계를 의정부·諸曹와 더불어 논의하게 하였다.151)≪世宗實錄≫권 43, 세종 11년 3월 무진. 이와 같이 중요한 국정을 該曹와 의정부·諸曹가 동의하여 계하게 하는 국정운영방법은 세종 18년 4월 이른바 議政府署事制가 실시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152)≪世宗實錄≫권 72, 세종 18년 5월 신묘. 즉 중요한 국사를 의정부와 6조에 동의하게 한 것은 태종 14년 6조직계제 실시 이후부터 시작되어 세종 18년 의정부서사제 실시 이후에도 국정운영의 중요한 방식으로 계속된 것을 볼 수 있다. 즉 세종대에도 국정운영의 중요한 방법의 하나는 현안문제를 의정부·6조 에서 논의하게 하여 이를 보고받아 국왕이 결정하는 것이었다.

 다음은 국왕이 영의정, 좌·우의정 등 대신들을 불러 국정의 중요한 문제를 의논하여 결정하는 방법이다. 세종 6년 5월에 영돈령 柳廷顯·영의정부사 李稷·좌의정 李原·우의정 柳觀과 호조의 3당상을 불러 ‘錢幣興用策’을 의논하게 하였다.153)≪世宗實錄≫권 28, 세종 6년 5월 무인. 세종 11년 7월에는 좌의정 黃喜·우의정 孟思誠·판부사 卞季良·許稠·예조판서 申商 등을 興德寺에 모이게 하고 知申事 鄭欽之를 보내 명에 보내는 金銀貢을 면제할 것을 청하는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154)≪世宗實錄≫권 45, 세종 11년 7월 임술. 세종 14·15년 경부터는 승정원의 知申事·代言(세종 15년 이후 승지)들을 잘 이용하였는데 특히 지신사 安崇善을 신뢰하여 자주 의정부에 보내 의정부 대신들과 국정을 의논하여 오게 하였다.155)≪世宗實錄≫권 58, 세종 14년 2월 정유 및 권 62, 세종 15년 10월 기사. 이처럼 세종은 정승과 6조의 당상들을 불러 국정을 논의하게 하고 이를 참작하여 결정하는 것을 또 하나의 중요한 국정운영방식으로 이용하였다.

 또한 세종의 중요한 국정방법은 많은 관료를 자주 만나 의견을 듣고 논의하여 결정하는 것이었다.≪세종실록≫에서 자주 보이는 ‘受常參·視事·輪對·經筵’156)≪世宗實錄≫권 51, 세종 13년 2월 경신 및 권 55, 세종 14년 정월 갑신.이라는 기사는 세종이 얼마나 열심히 정치를 하였는가를 보여준다. 상참·시사·윤대·경연 등에서 만나게 되는 대신, 대소관료·侍臣들과 대화하고 의논하여 크고 작은 국정을 풀어갔던 것이다. 세종 26년에 貢法을 반포하기까지 15∼16년 동안 중외의 관료와 많은 농민의 여론을 수렴하고 수차의 시험을 거친 사실을 보면 세종이 얼마나 대소관료와 백성들의 의견을 들으려 노력하고 또 이를 정치에 반영하는 데 힘썼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세종 13년 이후 활발해진 승정원관원의 정치활동은 세종의 적극적인 정치에 기반을 둔 것이다. 즉 비서기관인 승정원의 적극적인 이용, 지신사(都承旨)·대언(승지)과의 국정의논, 빈번한 하명(傳旨) 등으로 승정원과 그 관원의 정치적인 위상과 영향력이 높아질 수 있었다.

 세종 18년(1436) 4월 소위 의정부서사제로 바뀐 것으로 되어 있다.157)≪世宗實錄≫권 72, 세종 18년 4월 무신.
末松保和,<朝鮮議政府考>(≪朝鮮學報≫9, 1956).
이 때에 내린 왕명(敎)의 내용이 실제 국정운영과 맞지 않게 표현되어 태종 14년(1414) 소위 6조직계제 실시 이후의 정치사 해석에 큰 혼선을 가져오게 되었다. 의정부서사제 실시를 선언한 이 왕명에서는 태종 14년 6조직계제 실시 당시 군국의 중대사는 의정부에서 회의하여 보고하게 한다고 하였으나 국정의 경중·대소 없이 모두 6조에 귀속되고 의정부에서는 국정에 전혀 관계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당시의 실제 국정운영상황과 크게 어긋난 것이다. 이와 같이 어긋나게 된 것은 소위 6조직계제에서 의정부서사제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6조직계제의 폐단을 과장한 데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태종 14년 이후 의정부와 그 대신들이 국정에서 완전히 소외된 일이 없었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으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태종의 정치적 의도에 의하여 의정부·6조·대간·승정원 등 중요 정치기관의 권력을 분산시킨 상태였던 것이다.

 위와 같은 국정운영체제는 유교정치를 불가능하게 하지는 않겠지만 유신들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주대의 총재제와 다르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세종 18년 경이면 유교정치를 담당할 유신들도 충분히 배양되었고 유교적인 의례·제도도 상당 수준 정비된 상태였으므로 국정운영체제도 유신들이 이상으로 하는 총재제로 돌아갈 만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세종은 건강이 좋지 않았으므로 크고 작은 국정이 모두 국왕에게 폭주되는 6조직계제를 계속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신병을 이유로 庶事를 세자에게 맡기려 한 것도 바로 이즈음이라는 사실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세종은 세종 18년 4월의 의정부서사제를 주대의 총재제에 부합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 때 왕명에서 보이는 국정운영체제는 다음과 같다. “6조는 각기 그 직사를 모두 먼저 의정부에 보고하고, 의정부에서는 가부를 헤아려 의논한 후 啓聞하여 재가를 받아 다시 6조에 내려 시행한다. 다만 이·병조의 제수, 병조의 用軍, 형조의 死囚 외의 刑決은 그대로 본조에서 직계하여 시행하되 곧 의정부에 보고한다. 만약 마땅치 않은 것이 있으면 의정부에서 살펴 논박하여 다시 계하여 시행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국정운영은 의정부로 하여금 국정을 總領하게 하여 폭주하는 6조의 직계에서 벗어날 수 있고 인사·군사·형사 등 중요한 일들은 직접 보고받음으로써 왕권의 유지·확보에도 유의 할 수 있는 것이다. 재상에게 국정을 위임하면서 왕권을 유지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의정부서사제를 세종은 ‘庶合古者專任宰相之意’158)≪世宗實錄≫권 72, 세종 18년 4월 무신.라고 하여 마치 주대의 총재제를 실현한 듯 得意한 모습을 보였다. 세종대와 같이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왕권이 확립된 시기의 의정부서사제는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유지하면서 유교정치를 펼 수 있는 체제였고, 고제인 총재제에도 부합되며 건강이 좋지 않은 세종에게도 부담을 덜어주는 효과도 있었다. 또한 의정부를 국정최고기관으로 하는 의정부·6조체제는 주나라 관제의 3公 6卿(3정승·6판서)과 일치하여 유교정치에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체제하에서 유자적 소양을 가진 세종과 유자적 관료들이 만남으로써 유교정치가 꽃피울 수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문화적 분위기는 문종대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의정부서사제는 정치가 불안해지고 왕권과 신권의 균형이 깨지면 계속 유지할 수 없었다. 단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 皇甫仁·金宗瑞 등 의정부 대신들의 정치권력은 왕권을 압도하는 감을 갖게 하였으며 왕권의 회복을 명분으로 한 首陽大君의 쿠데타(癸酉靖難)와 왕위의 찬탈로 의정부서사제는 그 설 곳을 잃어버렸다. 수양대군(세조)은 즉위하자 마자 왕권강화를 위하여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고 6조직계제로 개혁하였다. 이 때 대부분의 6조 당상들이 반대하였고 특히 예조참판 河緯地는 주나라의 총재제(의정부서사제)를

 따를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이에 세조는 하위지의 冠을 벗기고 “冢宰의 制는 君이 죽은 제도이다. 너는 나를 죽은 것으로 생각하는가”159)≪世祖實錄≫권 2, 세조 원년 8월 신해.라고 호령하고 杖을 치게 하고 사형에 처하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의 만류로 사형집행은 하지 않았으나 6조직계제는 그대로 강행하였다. 왕권의 일방적인 강화를 목적으로 한 세조의 6조직계제 강행은 이상적인 유교정치의 구현과 역행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세종 18년 4월 의정부서사제 이전의 국정운영체제가 유교정치를 펴는 데 전혀 합당치 않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유교정치의 실현은 체제보다도 군·신의 유교정치를 위한 준비와 노력 여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면 유신들이 이상으로 하는 주대의 관제, 총재의 제도 또는 그에 대신할 수 있는 제도를 채택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세종 18년의 의정부서사제로의 개혁은 유교정치를 위한 모든 준비가 이루어졌고 또한 세종의 개인적 필요(건강문제)가 더해 실현되었다. 따라서 이 체제로의 전환에는 어떠한 반대도 없이 시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교정치를 펴기에 적합하고 옛 제도에도 맞는 체제라도 정치적 불안정과 국왕의 자질·성향에 따라서는 존립할 수 없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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