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2. 유교정치의 진전
  • 6) 유교적 민본정치의 전개

6) 유교적 민본정치의 전개

 유교정치에서는 민본(民惟邦本)을 기본으로 하고 德治·仁政·禮治·愛民을 강조한다.「민본」의 민은 주로 피치자층을 의미하며 민본사상은 치자의 피치자에 대한 지배·통치를 위한 안전판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유교적 민본사상은 근대의 민본주의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면 조선 초기 유교정치가 실현되었다고 보이는 세종대에 민본사상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세종과 관료층의 대민의식을 통해 살펴보고 다음에 그러한 의식을 가진 정치지배층에 의한 민(백성)에 대한 정치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유교의 교양을 쌓은 세종의 백성에 대한 의식은 민본을 기본으로 하여「爲民」·「愛民」·「恤民」의 정신이 나타나고 있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다’라는 말은 尙書의 ‘民惟邦本 本固邦寧’160)≪尙書≫夏書, 五子之歌.에서 비롯하며 유교정치사상의 기본으로 되어 있다. 백성이 없으면 나라도 군주도 있을 수 없으므로 당연한 말이다. 따라서 유교정치를 표방한 국가의 위정자들이 흔히 내세우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종의 민본·위민의식은 표방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치에서 실현하려 노력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면 세종의 민본·위면·애민·휼민의식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몇몇 사례를 들어본다.

 세종 원년(1419) 2월에 내린 王旨는, 흉년이 계속되어 굶주리는 백성이 있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호조에 명하여 창고를 열어 賑濟하게 했으나 수령 가운데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하는 자가 있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면서 감사와 수령들에게 그 경내에 굶주리는 백성이 없도록 하라고 엄명을 내리는 것이다. 그 안에서 세종은 “만약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굶어죽는 자가 있으면 감사와 수령은 모두 ‘敎旨不從’의 형률로써 논죄하겠다”161)≪世宗實錄≫권 3, 세종 원년 2월 정해.라고 하였다. 굶주림의 고통에서 백성을 구제하는 것은 정치에서 가장 먼저해야 할 일이며, 세종의 이 왕지는 민본·위민의식에 입각한 것이었다.

 세종은 신병치료를 위하여 자주 온천에 갔다. 그런데 왕의 온천행에는 막심한 민폐가 따랐다. 乘輿가 지나가기 위하여는 길을 닦아야 했고, 승여를 메는 인부만도 500여 명이 필요했으며 욕실과 거처를 지어야 했다. 수백 명에 이르는 수행인원의 숙식을 해결해 주어야 했고 그들이 저지르는 민간에 대한 작폐도 적지 않아 그 민폐는 심각한 것이었다. 세종 24년 3월 강원도 平康방면으로 온천행을 했을 때 세종은 황보인·김종서 등에게 이른 말 가운데 “내가 오는 때에 도로가 극히 평탄하여 여기에 이르렀다. 궁전 역시 장대하다. 이와 같이 큰 폐를 끼치고 여기에 편안히 앉아 있으니 마음이 편치 않다”162)≪世宗實錄≫권 95, 세종 24년 3월 경진.라고 하였다. 도로가 평탄한 까닭은 백성들이 길을 닦았기 때문이고 승여를 메는 인부들의 수고로 편안히 도착할 수 있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수고로 궁전까지 장대하게 지어 놓았으니 민본·위민의식이 강하였던 세종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또한 지나는 길에 보이는 백성들의 굶주리고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에 세종의 마음은 편치 못하여 조섭할 일정을 앞당겨 돌아왔다.

 세종은 민폐때문에 온천행을 중단하려고 했다. 그러나 다리병이 심해지자 세종 25년 2월 대신들의 간청에 못이겨 온천행을 허락하면서 승지들에게 폐단이 없도록 하라고 일렀다.163)≪世宗實錄≫권 99, 세종 25년 2월 갑인. 결국 세종은 3월에 충청도 온양온천에 행차하였고 온천욕을 마친 후에는 근방의 농민 남녀 923명에게 음식을 베풀게 하였고 인마가 밟아 손상을 입힌 온천 근방의 보리밭에 대한 손해배상도 해주도록 했다.164)≪世宗實錄≫권 99, 세종 25년 3월 을유 및 권 100, 세종 25년 4월 병술. 이후의 온천행에서도 세종이 경비절감과 민폐를 줄이기 위해 고심하였던 것은 그가 지닌 민본·위민의식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의 민본·위민의식을 가장 절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貢法의 논의와 그 결정과정으로 생각된다. 조세제도는 백성의 생활과 직결되는 것으로, 세종은 국초 이래 시행되어 온 踏驗損實法의 폐단을 절감하고 즉위초부터 새로운 세제인 공법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165)金泰永,≪朝鮮前期土地制度史硏究≫(知識産業社, 1983), 265∼267쪽.
李載龒,≪朝鮮初期社會構造硏究≫(一潮閣, 1984), 246∼260쪽.
세제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국가의 재정을 확보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지만 세종의 공법 구상은 국가재정의 확립과 동시에 백성을 위한다는 데 의도가 있었다. 공법에 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세종 12년(1430)부터 공법이 확정된 세종 26년까지 끊임없는 논의와 연구, 중외 관료와 농민에 이르는 여론조사, 시험적 실시 등을 거친 것을 보면 세종의 민본·위민의식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세종 19년 8월에 세종은 일단 공법의 시행을 결정하고 다음과 같이 의정부에 명령하였다.

지금 공법을 행함은 본래 백성에게 편하게 하고자 함이다. 생각해보면 금년 각 도의 풍겸이 고르지 않으니 신법을 시행하는 처음부터 만약 일률적으로 행하면 愁歎이 생길까 두렵다. 그러므로 금년의 전세는 경상·전라 양도는 공법에 의하여 시행하고 그 나머지 충청도는 4분의 1을 감하고 경기·강원·황해·평안 등 4도는 3분의 1을 감하고 함길도는 반을 감해준다(≪世宗實錄≫권 78, 세종 19년 8월 갑자).

 공법의 시행은 백성을 위한 것임을 단언하고 있다. 그런데 시행하는 처음부터 각 도의 풍흉의 정도가 각각 달랐으므로 작황에 따라 적당히 전세를 감하도록 하였다. 세종의 민본·위민정신은 여기서도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세종의 민본·위민정신이 돋보이는 사례로 訓民正音 창제를 빼놓을 수 없다. 잘 알려진 바이지만 훈민정음 서문을 보면 漢字를 알지 못하여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을 불쌍히 생각하여 그들이 쉽게 익히고 사용하는 데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했음을 알 수 있다. 훈민정음 창제의 중요한 동기가 백성을 위한 것이라고 한 것은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생각된다. 세종 26년 2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올린 훈민정음 창제 반대상소를 본 세종이 최만리 등에게 상소의 내용을 들어 따져 묻는 첫번째 대목에서 노기어린 질책을 가하고 있다.

또 (설총이) 吏讀를 제작한 본뜻은 백성을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만약 (이두가) 便民을 위한 것이라 한다면 지금의 諺文도 편민을 위한 것이 아닌가.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고 하고 너희 임금인 내가 하는 일은 그르다고 하는 것은 어찌 된 일이냐(≪世宗實錄≫권 103, 세종 26년 2월 경자).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가 백성을 편하게 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그것은 세종의 민본·위민의식에서 출발한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군주의 애민·휼민의식은 민이 천재지변이나 곤경에 처하게 될 때 발로되는 것이다. 그러면 세종의 애민·휼민의식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몇몇 사례를 통하여 살펴보자.

 세종 19년 정월 세종은 흉년을 이유로 하3도의 進膳을 면제해 주었다. 또 경기도에 굶어죽는 자들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의 진선도 면제해 주면서 승정원에 이르기를 “인군의 직은 오로지 애민하는 것이다. 지금 백성들이 굶어죽는 것이 이와 같은데 차마 제도의 進膳을 받겠는가”166)≪世宗實錄≫권 76, 세종 19년 정월 임자.라고 하였다. 세종은 분명히 임금의 직은 애민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백성들이 굶어 죽는 가운데 올려보내는 반찬을 차마 먹을 수 없어 대부분의 진선을 감면해 주었다.

 굶주림의 고통에서 백성을 구제하는 것은 정치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조선 초기 義倉·還上·常平倉·社倉 등의 제도와 賑濟·賑恤事業은

 모두 굶주림에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구제책과 그 성과는 군주의 애민·휼민의식이 어떠하였는가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세종의 애민·휼민의식이 높이 평가되는 것은 그것이 실제 정치에서 실현되었다는 데 있다. 세종 12년(1430) 12월 세종은, 한 남자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빈사상태에 있으나 아무도 구제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소문을 듣고 活人院으로 하여금 救療하게 하였고 이 일을 계기로 중앙은 한성부에서, 지방은 감사와 수령이 힘을 다하여 진제하여 혹시라도 굶주려 죽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호조에 지시하였다.167)≪世宗實錄≫권 50, 세종 12년 12월 병오. 애민·휼민의식의 실천이라 하겠다.

 또한 백성을 질병의 고통에서 구제하는 일은 정치의 중요한 과제가 된다. 군주의 애민·휼민의식의 정도는 이 과제를 대하는 군주의 조처 여하로 알 수 있다. 세종은 즉위초부터 질병에 시달리는 백성에 대한 구료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 그 해 5월에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지금 들으니 각 도에 질역이 성행하나 수령들이 힘써 구료하지 아니하여 夭死하게 한다 하니 내가 심히 불쌍하게 생각한다. 香蘇散十神湯·升麻葛根湯·小柴胡湯 등의 약을 제도 감사에게 내리니 처방에 의하여 구료하라(≪世宗實錄≫ 권 4, 세종 원년 5월 을사).

 질역으로 고통을 당하고 일찍 죽는 백성들을 딱하게 생각하여 친히 약방문을 지어 감사들에게 내려 구료하도록 한 것이다. 세종은 그 1년 전에 아우 誠寧이 瘡胗으로 위태할 때 밤낮으로 성녕 곁에서 方書(의약서)를 연구해 가면서 친히 약을 먹여 구료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의약에 관해서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던 터였다.

 세종의 애민·휼민의식은 죄수에게도 미치고 있다. 일단 옥에 갇히면 관리들의 가혹한 고문을 받게 되고 옥리들의 불찰로 죄의 유무가 가려지기 전에 옥에서 병들고 죽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세종은 그러한 사정을 딱하게 생각하여 죄수들의 옥중 복역조건을 개선해주는 데까지 마음을 썼다. 다음은 세종 7년 5월에 왕이 형조에 내렸던 傳旨다.

옥을 두는 까닭은 죄를 징계하기 위함이지 사람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司獄官이 마음 써 살피지 아니하여 囚人이 혹독한 추위와 무더위에 혹은 질병에 걸리고 혹은 얼고 굶어 비명에 죽는 일이 없지 않으니 참으로 불쌍하다. 중외의 관리들은 나의 지극한 마음을 따라 수시로 친히 살피고 감옥을 닦고 소제하여 항상 정결하게 하고 질병에 걸린 죄수는 약을 주어 구료하고, 옥바라지를 할 사람이 없는 자는 관에서 衣糧을 주어 구호하라. 그 중 마음 써 봉행하지 않는 자는 서울은 사헌부에서, 외방은 감사가 엄히 규찰하여 다스리라(≪世宗實錄≫권 28, 세종 7년 5월 경오).

 죄수에 대한 애민·흠휼 정신은 세종대에 일관되고 있어 형정에 欽恤政策이 펼쳐졌다.168)朴秉濠,<法制度面에서 본 世宗朝文化의 再認識>(≪世宗朝文化의 再諸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 120∼122쪽.

 세종은 자신이 더위를 넘긴 경험을 죄수에게 베풀기도 하였다. 세종 30년 7월 왕은 더운 때에 동이에 물을 가득히 담아 옥중에 두고 자주 그 물을 갈아주어 죄수들이 손을 담글 수 있게 해줌으로써 더위를 먹지 않도록 하는 그러한 사례가 있는지 집현전으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였다.169)≪世宗實錄≫권 121, 세종 30년 7월 병술. 세종은 자신이 더위를 푸는 데 사용한 방법을 죄수들에게까지 똑같이 베풀려 했으니 세종의 민본·애민의식의 실체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결국 세종의 이와 같은 뜻은 다음 달에 죄수들이 감옥에서 병들어 죽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위생관리법을 각 도의 감사에게 유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첫째 내용은 앞에서 본 더위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매년 4월부터 8월까지 새로 길은 냉수를 자주 갈아 옥중에 둔다’는 것이었다. 세종의 뜻은 곧바로 실천되고 있으니 세계 형정사상 이와 같은 조처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 밖에도 이 유시에서는 죄수들의 위생을 위하여 머리감고 몸을 씻도록 하는 일과 겨울에는 냉기를 막기 위하여 볏짚을 두껍게 깔아주는 일 등을 규정하고 있다.170)≪世宗實錄≫권 121, 세종 30년 8월 무인. 義禁府三覆法(원년, 2년)·笞背禁止(12년)·노비私刑禁止(12년)·빈민에 대한 收贖金감면(21년), 濫刑禁止(21년) 등 세종대 흠휼정책은 세종의 애민·휼민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노비는 당시 가장 낮은 신분으로서 인권이 거의 무시된 존재였다. 그러나 세종의 애민의식은 노비에게도 미치고 있다. 다음은 세종 12년 10월 왕이 代言들에게 유시한 말이다.

옛날 公處奴婢는 반드시 아이 낳고 7일 후에 立役하였는데 아이를 두고 입역하여 어린아이를 상하게 하는 것이 불쌍하여 100일을 더 주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産日이 임박할 때까지 입역하여 몸이 피로하면 그 집에 도착하기 전에 낳는 자가 혹 있다. 산월에 임박해서 역을 한 달 면제해주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저들이 비록 속인들 어찌 한 달이 넘겠는가. 詳定所로 하여금 이 법을 입안하도록 하라(≪世宗實錄≫권 50, 세종 12년 10월 병술).

 세종은 관비의 분만휴가가 산후 7일이던 것을 100일을 가급해 주었던 데서 나아가 분만전 휴가를 1개월 더 줄 의사를 밝히면서, 분만전 휴가가 2개월이 되는 것까지 용인할 수 있다는 뜻을 전하고 있다. 즉 분만휴가로 137일 (7일+100일+30일)을 제시했고 167일까지도 줄 수 있다는 것이 세종의 뜻이었다. 관비에게 이와 같은 분만휴가를 줄 생각을 한 군주는 인류역사상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며, 세종의 민본·애민정신의 실체가 어떠한 것인지를 웅변으로 전해 주는 것이다. 세종의 분만휴가에 대한 지시가 있은 6일 후에 상정소에서는 분만할 달과 산후 100일을 관비의 분만휴가로 할 것을 啓請하였고 그대로 결정되었다.171)≪世宗實錄≫권 50, 세종 12년 10월 임진.

 관비의 분만휴가가 결정된 4년 후에 그 婢夫에 대한 동반휴가가 결정되었다. 즉 세종 16년(1434) 4월에 왕은 형조에 다음과 같이 교서를 내려 비부에게도 휴가를 주도록 하였다.

경외의 婢子는 산월과 산후 100일을 휴가로 주는 것을 이미 일찍이 입법하였으나 그 남편(婢夫)에게는 전혀 휴가를 주지 아니하고 사역하여 구호할 수 없게 하니 다만 부부가 서로 도와주는 뜻에 어긋날 뿐 아니라, 이로 인하여 혹 죽기까지 하니 진실로 불쌍하다. 이제부터 유역인의 처가 아이를 낳으면 그 남편은 30일 후에 일을 시키도록 하라(≪世宗實錄≫권 64, 세종 16년 4월 계유).

 관비가 분만하면 그 남편에게 30일간의 동반휴가를 주도록 하였으니 그 처의 산후 뒷바라지를 위한 것이었다. 관비에게 130일의 분만휴가를 준 사실도 놀라운 일인데 그 비부에 대한 동반휴가 조처는 세종이 아니면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면 세종대 관료층의 대민의식은 어떠했는가. 세종의 민본·위민·애민·휼민의식에 제고되었음인지 당시 관료층의 의식에도 민본·위민·휼민의 정신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사례를 들어보도록 하자.

 세종 즉위년 10월 사간원에서 상소하여,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요 식량문제 해결이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과제임을 전제하고, 재생산을 위한 종자의 확보와 실농한 주·군에 대한 조세의 면제를 청하였다.172)≪世宗實錄≫권 1, 세종 즉위년 10월 기묘. 사간원의 상소는 민본·위민의식에 입각한 것이었다.

 講武는 춘추로 거행되는 군사훈련을 겸한 수렵행사였는데 왕의 거둥으로서는 가장 많은 인원이 동원되고 민폐가 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강무는 폐할 수 없는 국가행사였으므로 행하되 민폐를 줄이는 것이 군신간의 관심사였다. 세종 13년 정월 持平 許翊이 실농으로 고통받는 강원도민이 강무로 인하여 더욱 고통을 받지 않도록 啓請하였다.173)≪世宗實錄≫권 51, 세종 13년 정월 계묘. 이 대관의 언론은 민본·위민의식에 입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흉년·실농을 이유로 강무를 정지할 것을 청하는 관료들의 계청은 계속되었고174)≪世宗實錄≫권 63, 세종 16년 정월 무술·권 111, 세종 28년 정월 갑신 및 권 123, 세종 31년 정월 신축. 그것은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수령은 군주를 대신하여 직접 백성을 다스리는 관원이므로 민본·위민정치의 성취 여부는 수령에 대한 인선에 크게 좌우된다. 세종 원년 정월 경연에서 卞季良은 백성을 위한 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령에 대한 인선에 있다고 하였고 鄭招도 계하여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원컨대 지금부터 수령으로 새로 제수되는 자는 전하께서 반드시 친히 인견하시어 현부를 살피신 연후에 부임하게 하면 수령은 올바른 사람을 얻게 되고 백성은 실제의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世宗實錄≫권 3, 세종 원년 정월 을해).

 변계량·정초 등 대신들도 민본·위민정치의 성취 여부는 수령에 대한 인선의 적부 여부에 달린 것으로 생각하였다.

 세종 7년 2월 좌사간 柳季聞 등이 상소하여 “치민의 근본은 수령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수령을 적임자를 얻으면 백성이 복을 받으나 적임자가 아니면 백성이 화를 입게 되니 廉吏를 택하지 아니하고 쓰는 것이 옳겠습니까”175)≪世宗實錄≫권 27, 세종 7년 2월 임인.라고 하였다. 민본·위민정치를 위하여는 수령에 대한 신중한 선택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탐오한 수령을 징계하여 민생을 보호할 것을 청한 것이다. 세종 22년(1440) 5월 의정부에서는 직무에 태만하여 백성에게 고통을 주는 수령에 대한 징계를 계하고 있다.176)≪世宗實錄≫권 89, 세종 22년 5월 무오. 이처럼 민생의 휴척과 직결된 수령의 인선을 신중히 하고 탐오하고 태만한 수령들에 대한 징계를 요청하는 관료들은 민본·위민의식에 입각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세·역·공물은 백성들의 가장 큰 부담이며 고통의 근원이었으므로 국왕이나 관료들에게도 관심의 초점이 되는 것이었다. 세종대의 관료들은 이 문제를 둘러싸고 생기는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힘을 모았으며, 빈민에 대한 구제에도 관심을 쏟았다. 형정에 있어서도 관료들은 형벌을 신중히 하고 濫刑·혹형을 금지하는 데 관심을 모았다. 이러한 것들은 이 시대 관료들의 위민·휼민의식에 근거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세종과 그 시대 관료들이 유교정치를 성취할 수 있는 호기를 맞아 유교적 민본·위민정신과 애민·휼민의식을 지니고 유교적 민본정치를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으로 이해된다. 유교적 민본정치라는 것은 유교정치사상의 민본·덕치·인정·애민을 바탕으로 하여 백성을 위한 정치,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는 정치를 의미한다.

 세종은 즉위년 11월에 중외신료들에게 유시를 내렸다.177)≪世宗實錄≫권 2, 세종 즉위년 11월 기유. 이 때의 유시 내용을 요약하면, ① 흉년중인데 營繕을 일으켜 농민을 私役하는 수령이 없도록 감사가 단속할 것, ② 교육진흥책을 강구하여 보고할 것, ③ 30년 이래 수령의 치민성적을 사실대로 보고할 것, ④ 鰥·寡·孤·獨과 疲癃·殘疾者를 구호할 것, ⑤ 수령들은 굶주리는 자가 없도록 진제에 힘쓸 것, ⑥ 가난하여 혼기를 넘겼거나 葬期를 넘긴 자는 비용을 보조할 것, ⑦ 탐관오리가 위법으로 거듭 거둬들여 민생을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감사는 고과에 철저를 기할 것, ⑧ 감사는 수령이 비법으로 무고한 백성을 枉刑·濫刑하는 일이 없도록 주지시킬 것, ⑨ 鄕愿品官과 元惡鄕吏에 의한 백성들의 피해가 없도록 단속할 것, ⑩ 義夫·節婦·孝子·順孫을 널리 조사하여 포상할 것, ⑪ 水陸戰亡士卒의 자손은 復戶·敍用할 것, ⑫ 초야의 인재를 발굴·보고할 것 등이다. 위에서 ②, ⑫를 제외하면 모두 백성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세종은 즉위초부터 백성의 고통이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으므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求言은 천재지변이나 나라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내리는 것이며 군주의 미덕으로 여겼다. 세종 원년 6월 한재가 심하여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대소신료와 한량·기로에게 구언교서를 내린178)≪世宗實錄≫권 4, 세종 원년 6월 을해. 이래 자주 구언하였고 구언에 대한 陳言을 일일이 열람하고 타당한 것은 채택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세종 7년 6월의 구언에 따른 진언 가운데는 예조판서 申商 등 2인이 올린 것으로, 각관 수령이 공부·요역 등의 일을 친히 처리하지 않고 下吏들에게 위임함으로써 부역이 불균등해지고 민원을 사는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수령의 직임을 다하지 않는 자는 감사가 고찰하여 논죄하자는 것이 있다. 병조판서 趙末生 등 9인의 진언 중에는 경기의 백성들이 각종 요역에 시달려 실업할 형편에 있음을 들어 그 부담을 줄여줄 것을 청한 것이 있다.179)≪世宗實錄≫권 28, 세종 7년 6월 신유. 물론 이 진언은 채택되었다. 세종의 구언은 가뭄이나 재변이 있을 때 修省한다는 의미로 형식적으로 내린 것이 아니라 진정 나라일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알아보고 이를 바로잡으려는 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세종의 백성을 위한 정치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외신료에 대한 유시나 구언으로써 민본·위민정치가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국왕을 대신하여 방면(도)과 고을을 맡을 관찰사와 수령이 그 사명을 다할 때 유교적 민본정치가 백성에게 미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감사·수령에 대한 인선에 신중을 기하였음은 물론이고 그들이 그 사명을 충실히 수행해 줄 것을 격려·당부하였다.

 감사를 임명할 때에는 그 도의 중요성과 문제점을 일러주고 감사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할 것을 훈유하는 교서를 내려주었다. 세종 12년(1430) 윤 12월에 예문제학 윤회가 감사에게 내리는 교서를 지어 올렸는데 그 서두는 다음과 같다.

왕이 이렇게 말씀하겠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정치는 백성을 기르고 민생을 후하게 하여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하는 것이니 나라에서 제일 먼저 할 일이다(≪世宗實錄≫권 50, 세종 12년 윤 12월 을사).

 새로 임명한 감사에게 백성이 나라의 근본임을 강조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도록 일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이 직접 그 도에 와서 다스리는 것처럼 다스리라고 당부하였다. 이처럼 간곡한 부탁을 받은 감사로서는 백성을 위한 정치에 소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현지의 관찰사들에게 때때로 유시를 내렸는데 그 내용 중의 하나가 굶주리는 백성이 없도록 진휼에 힘쓰라는 것이었고 그 밖에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것들이 있기 마련이 었다.

 수령이 새로 임명되어 임지에 떠나기 앞서 辭陛할 때 왕이 친히 인견하게 된 것은 세종 7년경부터였다.180)≪世宗實錄≫권 30, 세종 7년 12월 을해. 백성에 대한 정치의 성패는 수령에게 달렸고 백성의 휴척이 수령의 현량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니 왕을 대신하여 그 고을 백성을 다스리는 수령을 왕이 친히 인견하여 선정을 당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종 7년 12월 세종은 京畿都事 裴權·文化縣令 洪汝恭·靑陽縣監 尹常·鎭川縣監 金永倫 등을 편전에서 인견하고 그 임지의 어려운 일들을 일러주고 민생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181)≪世宗實錄≫권 30, 세종 7년 12월 갑술. 이후 세종의 수령에 대한 인견은 계속되었고 세종이 당부한 내용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지만 대개 흉년·실농으로 굶주리는 백성에 대한 진휼·진제와 還上歛散문제, 권농, 愼刑政(남형·혹형의 금지), 애민, 輕徭·薄賦 등의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위에서 살폈듯이 세종이 관찰사와 수령이 임지로 떠나기 전에 인견하고 훈유·당부한 것은 그의 민본·위민·애민·휼민의식에 근거를 둔 것이며 세종의 민본정치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이의 실천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려 힘쓰는 정치가 실현되었다. 그 내용은 ① 조세부담의 蠲減, ② 요역의 견감, ③ 공물의 견감, ④ 진상의 減省, ⑤ 還上[환자]·진제의 시행, ⑥「欽恤之典」의 勵行 등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① 조세부담의 견감;조세제도와 그 운영은 백성의 생활과 직결된 중대한 문제이며 또한 국가재정이 여기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조선은 국초 이래 租率은 수확량의 10분의 1로 하였고 조액의 산정은 踏驗損實法에 의하였다. 그런데 손실을 답험하는 관리가 공정·신중하게 정하지 못하고 또한 향리들의 작간으로「실」이「손」이 되기도 하고「손」이「실」이 되기도 하여 결국 농민들에게 지나친 부담과 고통을 줄 뿐 아니라 국고수입의 감축을 초래하였다. 세종이 즉위초부터 새로운 조세제도로서 공법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답험손실법에 의한 농민의 고충을 덜어주고 동시에 국고를 충실히 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세종은 즉위 직후부터 답험손실이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받는 백성들의 고통을 염려하였다. 세종은 즉위년 8월에 호조에 명하여 수령과 그 委官이 행한 불공정한 손실평가를 바로잡기 위한 답험경차관이 수확 전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하여 손실의 평가가 잘못 내려짐으로써 당하는 백성의 고통이 없도록 하였다. 또 私田主들의 손실평가가 작황 이상으로 매겨짐으로써 당하는 사전 佃民들의 고통도 함께 덜어주고자 하였다.182)≪世宗實錄≫권 1, 세종 즉위년 8월 무술.

 세종대에도 해마다 흉년이 많았고, 흉년이 들면 농민들은 조세를 부담할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굶주리고 굶어 죽는 일까지 생겼다. 그러한 상황에서 농민들로부터 정해진 조세를 거둬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위정자들의 입장에서는 조세징수를 강요하지 않을 수 없었고 조세징수의 책임을 맡은 수령과 향리들에 의한 늑징과 횡포가 자행되어 농민들은 큰 고통을 당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세종대에는 조세 감면조처가 자주 있었다. 세종 원년 정월에 江原道行臺監察 김종서가 원주·영월·홍천을 비롯한 12개 지역에 기민이 729명이 있다고 보고하면서 조세를 감면해 줄 것을 청하니 세종은 이를 허락하였다. 더구나 이러한 조치에 대하여 卞季良이 극구 반대하였으나 세종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며 자신의 소신을 관철시켰다.

인군이 된 자가 백성이 굶어 죽는다는 소식을 듣고도 조세를 징수하는 것은 진실로 차마 할 수 없다. 하물며 지금 舊穀이 이미 떨어져 창고를 열어 진제를 해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운데 도리어 기민에게 조세를 징수하겠는가. 또한 감찰을 보내 백성이 굶주리는 것을 보고도 조세를 덜어주지 않으면 다시 어떤 일이 백성을 위하여 혜택이 있겠는가(≪世宗實錄≫권 3, 세종 원년 정월 신해).

 세종 즉위초부터 보이는 이와 같은 조처는 세종의 민본·위민의식에서 나온 것이며 세종대 정치의 성격과 방향을 결정지은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 4년 11월에는 실농한 각 도 영세농민들에게 환자의 환수를 독촉하지 못하게 하였고 강원도 영서지방의 영세농민들에게는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183)≪世宗實錄≫권 18, 세종 4년 11월 계미. 세종 14년 7월에는 호조에 전지하여 함길도 전세의 3분의 1을 감면해 주었다.

 세종은 즉위초부터 답험손실법의 폐단을 알고 있었고, 새로운 조세제도로서 구상한 공법은 결코 더 많은 조세를 부담시켜 농민을 고통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세종 26년(1439) 11월 공법을 확정할 때까지 중신·근신들과 수없는 토론을 거쳤고, 세종 12년 8월에는 전·현직관료로부터 농민에 이르는 98,657명의 여론을 수렴하기도 하였고, 집현전으로 하여금 연구도 시켰으며 시험적 시행과정을 거치는 등 하나의 제도를 확정하기까지 기울인 세종의 관심과 노력은 대단하였다. 그리고 그 관심과 노력은 농민을 위한 것이었고 농민의 조세부담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세종 26년에 확정된 공법의 내용은 전분 6등, 연분 9등으로 하고 조세율은 수확량의 20분의 1로 하였다. 이것은 그 실질적인 내용이 과거 10분의 1에서 그 반으로 감축된 것은 아니라 해도 농민의 조세부담을 덜어준 것은 분명하다. 공법이 확정되어 실시된 이후에도 공법의 문제점이 없지 않았으나 제도적으로는 농민의 조세부담을 경감해 주는 방향에서 공법이 추진되고 확정되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② 요역의 견감;요역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하여 불가피한 것으로서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부담 중의 하나였다. 특히 요역에 동원되는 백성들은 식량과 연장까지 지참해야 했고 규정된 요역일수를 초과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성곽의 수축에는 안전사고의 위험이 컸다. 그러므로 유교적 민본정치를 표방하고 민본·위민·애민을 자주 거론하던 당시의 위정자들은 요역으로 인한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요역의 경중은 요역동원의 기준과 日限에 관계된다. 개국초에는 대개 인구 수와 토지면적을 기준으로 요역에 차출할 사람의 수효를 산정했으나 요역에 동원하는 계절과 일한은 규정하지 못하였다. 세종 10년경부터 토지를 기준으로 5결에 1명을 넘지 않게 하였고, 일한과 동원하는 계절도 정하였다. 그 계기는 세종 12년 11월 세종이 좌의정 黃喜·우의정 孟思誠을 불러 “본국은 지금까지 役民에 定限이 없어 혹 旬月에 이르니 백성들이 심히 고통스럽다. 고제를 살펴 일수를 한정하여 순월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184)≪世宗實錄≫권 50, 세종 12년 11월 임자.라고 한 것이었다. 결국 세종 12년 12월에, 고제에 의하여 10월에 始役하여 20일을 일한으로 하되 풍년에는 10일을 더하고 흉년에는 10일을 감하며 춘 절(농사철)에는 민을 요역에 동원할 수 없도록 결정하였다.185)≪世宗實錄≫권 50, 세종 12년 12월 신미.

 ≪경국대전≫에는 요역의 기준과 일한을 전 1결에 ‘出一夫’하고 1년에 ‘役六日’을 넘지 않는다고 규정되어 있으나,186)≪經國大典≫권 2, 戶典, 徭賦. 이 규정과 실제는 크게 차이가 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경국대전≫이후 요역의 부담이 백성들에게 무겁고 고통스러운 역으로서 이를 피하여 代立·流移하는 경우가 허다하였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세종대의 요역부담이≪경국대전≫반포 이후의 그것보다 무거웠다고 보기는 어렵다.

 세종대에는 흉년이 들면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풍년을 기다려 요역을 잠정 보류할 것을 청원하였고 대개 허락되었다. 세종 27년 9월 사간원에서 흉년을 이유로 藍浦와 전라·경상도의 축성역을 풍년을 기다려 할 것을 계청하였을 때 세종은 “축성하는 까닭은 백성을 위한 것인데 흉년이 들었으니 이 역을 정지하는 것이 좋다”187)≪世宗實錄≫권 109, 세종 27년 9월 계유.라고 쾌히 승락하였다.「役民」은 신중히 해야 하고 백성들의 고통은 덜어 주어야 한다는 의식이 세종이나 관료층에 모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역을 강행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세종 24년 6월 사헌지평 權技가 흉년을 이유로 會寧城의 축조를 잠정 정지하고 풍년을 기다려 행할 것을 계청하였을 때 세종은 흉년에 축성역에 동원되는 백성의 고통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국방을 위하여 축성역은 미룰 수 없는 일임을 토로하고 있다.188)≪世宗實錄≫권 100, 세종 25년 6월 갑진.

 세종대는 세종과 관료들이 모두 요역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의식과 의지가 있었으므로 굶주리는 백성을 요역으로 몰아내는 일을 하지 않으려 하였으며, 흉년에는 축성역과 같은 고역을 잠정적으로 정지시키는 일을 군신이 합의하여 처리하였다.

 ③ 공물의 견감;공물은 조세 다음으로 국가재정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서 백성에게 큰 부담과 고통을 주는 것이었다. 공물은 耕田의 다소에 따라 민호에 부과되는 土産物貢으로서 풍흉에 관계없이 정부의 경비를 감안하여 그 액수를 정해 놓았고 정해진 공물의 수량은 변경할 수 없었다. 따라서 흉년으로 인하여 流移戶가 발생하면 남아있는 민호가 유리호의 부담까지 져야했으므로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 奸吏의 작간이 있게 되면 이로 인한 민폐는 심각했다. 그리고 공물의 감면조치는 백성에 대한 특별한 은혜로서 국왕만이 내릴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그 시대의 군주와 관료층의 의식에 공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의 경중이 달려 있었다.

 세종은 흉년으로 백성이 고통을 당할 때,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공물의 견감조치를 자주 내렸는데 다음은 세종 4년(1422) 9월 호조에 내렸던 명령이다.

지금 흉년을 당하여 각 사에 들이는 공물을 이미 견감토록 했으나 거둬들일 때 혹 백성을 고통스럽게 할까 두렵다. 수령들로 하여금 絲毫라도 더 걷지 못하게 하라(≪世宗實錄≫권 17, 세종 4년 9월 을해).

 왕이 공물의 견감조치를 취했어도 관리들이 그 뜻을 따르지 않고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있기 때문에 내린 명령이었다. 이 해 12월에도 기근이 심한 강원·황해·평안·함길 4도의 각 사 공물을 모두 견면해 주었다.189)≪世宗實錄≫권 18, 세종 4년 12월 임진. 세종 8년 4월에는 가뭄이 심하자 세종은 호조에 “국용의 부족을 말하지 말고 견감할 수 있는 공물을 마감하여 보고하라”190)≪世宗實錄≫권 32, 세종 8년 4월 임신.고 명하였다. 세종 9년 4월 강원도 감사의 계에 따라서 세종은 염세는 반감해 주고 공물은 5년 동안 견감해 주었다.191)≪世宗實錄≫권 36, 세종 9년 4월 임오. 이후에도 흉년이 들면 그 지역의 공물을 견감해 주는 일이 계속되었다.

 공물이 백성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 것은 그 징수과정에서의 관리들의 倍徵행위였다. 세종 12년 12월에 사헌부에 전지하기를 “수령들이 人吏·관노로 하여금 그 관의 공물을 倍數徵價하여 備納케 하니 관에서 침어함이 막심하다. 이제부터 엄히 살피라”192)≪世宗實錄≫권 50, 세종 12년 12월 기축.고 하였다. 공물을 정량보다 배나 징수하는 폐단을 단속하기 위하여 내린 왕명이었다. 세종 22년 8월에는 공물의 대납과 배수 수가의 폐단이 거론되었다.193)≪世宗實錄≫권 90, 세종 22년 8월 을유. 이처럼 공물의 징수를 둘러싼 문제들이 거론된 것은 결국 세종과 관료들이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켜 주고자 하는 의식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④ 진상의 감생;진상은 각 도의 관찰사와 兵使·水使가 그 지방의 특산물을 왕에게 올리는 것이지만 실제 부담은 백성에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진상물품은 시기와 지방에 따라 다르며 그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서 육류·어류·조류·채소 및 과일류 등 식품과 약재와 일용잡품 등이 들어 있다. 잡다한 진상 물품을 때맞춰 진상하는 일은 관찰사·병사·수사에게도 부담이 되었으나 진상품을 거두는 수령과 향리들의 횡렴과 작간으로 인해 백성들의 고통이 컸다. 그러나 국왕이 자신과 왕실을 봉양하기 위한 物膳의 진상을 減省하도록 조처한다면 그 혜택은 백성에게 돌아갈 것이다.

 세종은 즉위한 다음달 흉년을 이유로 遠道에서 諸殿에 올리는 진상을 한 달에 두 차례 올리던 것을 한 차례로 줄이도록 명령하였다.194)≪世宗實錄≫권 1, 세종 즉위년 9월 무오. 세종 3년(1421)에는 수재로 인하여 제도의 진선을 못하게 하였고, 세종 7년 6월 가뭄이 심하여 진상을 줄여 주었다. 세종 22년 5월 예조참의 任從善은 당시 가뭄으로 제도의 진상을 모두 정지시킨 조처에 대하여, 경상·전라도는 가뭄이 심하지 않으므로 예전대로 진상하게 할 것을 계청하였는데 이에 왕은 다음과 같이 일렀다.

진상하는 물선은 모두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이나 지금 농사철인데 폐가 백성에게 미치는 것을 내가 차마 할 수 없으니 오는 가을을 기다려 예전대로 진상하도록 하라(≪世宗實錄≫권 89, 세종 22년 5월 경신).

 가뭄으로 고통을 당하는 백성들에게 물선진상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세종의 배려였다. 세종 25년 9월에도 함길도에 흉년이 들자 文昭殿(太祖妃 韓氏 奉安殿)의 素膳과 薦新 외에는 진상하지 말 것을 함길도 관찰사에게 명하였다.195)≪世宗實錄≫권 101, 세종 25년 9월 임신. 의정부·6조의 대신들이 물선진상 감생명령을 거두기를 계청하였을 때에도 세종은 가뭄으로 고통받는 농민에게 진상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배려에서 거절하였다.196)≪世宗實錄≫권 108, 세종 27년 5월 경진.

 그러나 진상감생은 명령만으로 백성의 부담이 덜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명을 받아 시행하는 관리들의 의식과 자세에 크게 관계된다. 진상물을 거둬들이는 수령과 향리의 정직성·공정성 여부와 자세에 따라서 백성들의 고통의 정도가 정해지는 것이다. 세종도 그러한 문제점을 알고 있었으므로 세종 25년 7월에 각도 관찰사에께 전지하기를 “소문에 듣건대 각 관의 수령들이 진상을 청탁하고 민간에 취렴하여 원망이 생긴다 하니 경은 이를 엄히 금하되 만약 범하는 자가 있으면 법으로 엄중히 다스려라”197)≪世宗實錄≫권 101, 세종 25년 7월 갑자.고 하였다. 이 전지는 진상을 빙자한 관리들의 횡포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진상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세종의 배려와 노력은 세종대에 계속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⑤ 환자·진제의 시행;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는 제도로는 고구려에도 賑貸法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도 義倉을 설치한 바 있으며 조선초에도 그 제도가 계속되었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러나 기민·궁핍자를 충분히 진제할 의창곡의 확보는 항상 어려운 일이었다. 백성이 굶주림의 고통을 당할 때 이를 구제하는 일은 국가의 책임이요 임무이다. 그러나 기민에 대한 충분한 진제·진휼이 베풀어지기 위하여는 충분한 비축과 지배층의 의지가 필요했다.

 세종대에도 계속되는 흉년으로 의창곡만으로는 진제하기 어려워 군자곡이 이에 보충되었으며 의창곡에 의한 진제방법은 환자가 중심이 되었다.198)金勳埴,≪朝鮮初期 義倉制度硏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3), 50∼133쪽.

 세종은 즉위 직후부터 기민에 대한 진제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는 원년 2월에 王旨를 내려, 감사·수령들이 기민에 대한 진제에 철저를 기할 것을 명하고 만약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굶어 죽는 자가 생기면 해당 감사·수령은 ‘敎旨不從’의 죄로 엄단하겠다고 하였다.199)≪世宗實錄≫권 3, 세종 원년 2월 정해. 이 왕지가 있은 4일 후에 호조에서는 감사·수령이 효과적으로 빈궁한 백성을 진휼할 수 있도록 그 지역의 유력한 인물을 택하여 수령과 함께 힘써 진휼하게 하고 그 잘하고 잘못하는 것을 감사와 首領官(經歷·都事)이 순회·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되 진휼을 잘못하는 수령은 처벌하고 잘하는 수령은 포상하도록 할 것을 계청하여 윤허받았다.200)≪世宗實錄≫권 3, 세종 원년 2월 신묘. 세종 즉위초부터 기민·궁핍자에 대한 진휼의 의지는 세종과 관료간에 확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종 4년 7월에는 전국에 기근이 들어 8도에 경차관을 파견하여 의창을 열어 진제토록 하였고, 수령이 힘써 살피지 아니하여 백성이 굶주린 자가 생기면 3품 이상 수령은 왕에게 보고하여 논죄하게 하고 4품 이하 수령은 직접 처벌하도록 하였다.201)≪世宗實錄≫권 16, 세종 4년 7월 갑자. 이와 같은 조처는 당시 수령 중에는 진제에 힘쓰지 않는 자가 있음을 전해주며 그러한 수령을 제재할 수 있는 권한을 경차관에게 부여하면서까지 철저한 진제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진제경차관의 파견만으로 만족할 만한 진제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경차관의 순찰도 형식적인 수준에 머물어 별 효과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세종은 이 해 10월 기근이 매우 심한 강원·평안 양도에 새로 경차관을 파견하였고202)≪世宗實錄≫권 18, 세종 4년 10월 정해. 12월에는 각 도 관찰사에게 도내 기민의 수효를 갖추어 보고할 것을 명하였다.203)≪世宗實錄≫권 18, 세종 4년 12월 병술. 군신간의 초미의 관심은「救荒之政」에 있었던 것이다.204)≪世宗實錄≫권 18, 세종 4년 12월 정해.

 기민에 대한 환자·진제는 해당도 감사의 기민수에 대한 계문과 호조의 계를 통해 왕의 허락을 받고 시행되었다. 그리고 기민에게 지급되는 곡식을 추수 후 본곡을 환수하는 환자로 할 것인가 아니면 무상으로 지급되는 賑濟로 할 것인가는 국왕의 결정에 의하였다. 세종 5년 2월 황해도 경차관이 실농한 遂安·谷山·瑞興 등지의 기민에게 지급한 미·두 408섬을 환자로 시행하여 추수 후 환수할 것을 계청하였을 때 세종은 진제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205)≪世宗實錄≫권 19, 세종 5년 2월 기묘.

 환자가 지급되는 한 환자곡의 환수문제도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실농한 백성으로부터 여러 해 밀린 환자곡을 일시에 모두 징수하려 하면 그 백성들은 유리할 수밖에 없게 되므로 세종은 그 백성의 형편을 보아 징수하라고 전지하였다.206)≪世宗實錄≫권 50, 세종 12년 11월 임인. 환자곡을 환납하기 어려운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蠲減之命’을 내리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면 백성들이 요행을 바라 환납하지 않는 자가 많아질 것이므로 그리할 수도 없었다.207)≪世宗實錄≫권 70, 세종 17년 11월 임신. 당시 환자곡의 체납이 얼마나 심하였는가는 세종 17년(1435) 11월에 호조에 내린 전지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갑진년(세종 8년) 이전의 환자를 다 거둔 후에 그 이후의 환자를 거두도록 이미 입법하였으나 積年 환자가 자못 많아 만약 本色(米穀)으로 거두면 비록 풍년이라도 필납하기 어려우니 갑진년 이전의 환자는 자원에 따라 포화로 거두고 을사년(세종 9년) 이후의 환자는 오래된 것부터 거두는 것을 항식으로 한다. 위반하는 자는 解由를 주지 않는다(≪世宗實錄≫권 70, 세종 17년 11월 을해).

 10년 묵은 환자가 쌓여 있었으나 환자를 먹은 백성들에 대한 세종의 배려 가 어떠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환자곡의 지급과 환수는 민생과 직결된 중요 한 문제였으므로 이를 둘러싸고 군신간의 의론이 많았다. 세종도 환자의 환수는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했으나 환자곡을 먹은 백성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독징하여 원망을 사는 일이 없도록 빈궁한 백성에 대하여 배려할 것을 의정부에 전지하고 있다.208)≪世宗實錄≫권 79, 세종 19년 12월 갑자. 그러나 환자의 독징은 없을 수 없었고 환자를 먹은 백성들의 고통도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세종 31년 6월 가뭄을 이유로 세종 26년 이전 환자의 5분의 1을 감해준 조처는 빈민들에게 5년 이상 묵은 환자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었다.209)≪世宗實錄≫권 124, 세종 31년 6월 경술.

 기민에 대한 무상 구제인 진제는 해당 도의 감사의 보고가 있은 후에 시행하는 것이 원칙이나 감사의 구체적인 보고가 있을 때까지 진제를 늦추면 기민이 굶어 죽을 가능성이 있었다. 세종 9년 8월 세종은 평안·황해도에 실농한 기민에 대한 진제를 국고로써 하되 감사의 보고 이전에 조금씩 분급하여 굶지 않도록 하고 진제를 시작한 날짜와 기민의 수효를 추후에 갖추어 보고하라고 전지하였다.210)≪世宗實錄≫권 37, 세종 9년 3월 정묘. 이미 세운 규정에 구애받지 않고 우선 기민의 진제를 명할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민본·애민의식의 소이로 이해된다. 그러나 모든 기민에 대한 진제는 의창과 국고의 사정상 불가능하여 진제의 대상은 선별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세종 18년 9월에는 의지할 토지나 친척이 있는 사람은 다만 환자를 지급하고 의지할 바가 없는 자에게만 진제를 주도록 하였다.211)≪世宗實錄≫권 74, 세종 18년 9월 정유.

 진제·진휼을 시행함에 있어 수령과 감사가 관할지역의 기민을 두루 살펴 고르게 진휼하기란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세종 26년 윤7월에는 그 관내의 기민에 대한 진휼을 수령 혼자서 살피기 어려우므로 4품 이하 6품 이상 적격 자를 매 90호에 1명을 택정하고, 관내에 그러한 사람이 없으면 下番한 甲士 와 別侍衛 등을 차출하여 진휼하는 일을 돕도록 하였다.212)≪世宗實錄≫권 105, 세종 26년 윤 7월 무술. 또 도내의 기민을 감사와 수령관이 나누어 순시한다 해도 궁벽한 촌락까지 제때 살펴 진휼할 수 없으므로 朝官을 경차관으로 파견하여 진휼하는 일을 돕도록 하였다.213)≪世宗實錄≫권 115, 세종 29년 12월 기유. 기민을 기아의 고통에서 구제하려 한 위정자들의 노력은 적어도 세종대에 있어서는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⑥「欽恤之典」의 勵行;형정의 공정성 여부는 그 시대 정치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하는 잣대가 되며 민생의 휴척과 관계되는 것이다. 형정이 공정·신중하지 못하면 무고한 백성이 죄수가 되고 혹독한 고문으로 억울하게 사망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유교사상으로 교양을 쌓은 당시의 위정자들은 형벌이 맞지 않아 억울한 사람이 생기면 천지의 화기를 상하게 하여 천재지변이 나타나게 되는 것으로 믿었다. 따라서 형정을 공정·신중하게 펴는 것이 그 시대정치의 중요한 일부였던 것이다.

 형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백성이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백성 중에는 몰라서 죄를 짓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세종 14년(1432) 11월에 세종이 중신들에게 이르기를 “비록 백성에게 律文을 모두 알게 할 수는 없으나 대죄의 條科를 따로 뽑아 吏文으로 번역하고 민간에 頒示하여 愚夫愚婦로 하여금 알아서 피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라고 하니 이조판서 許稠는 율문을 알고 弄法하는 폐단이 있을 것을 걱정하였다. 이에 세종이 이르기를 “그러면 백성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고 범하게 하는 것이 옳은가. 백성이 법을 알지 못하는데 그가 범한 것을 죄주는 것은 朝四暮三의 術과 가깝지 않은가. 조종께서 讀律之法을 세운 것은 모두 이를 알게 하고자 함이다. 경들은 고전에서 살펴 의논하여 보고하라”214)≪世宗實錄≫권 58, 세종 14년 11월 임술.고 하였다. 백성으로 하여금 법을 알게 하고 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세종의 법정신은 세종대의 법운영의 수준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세종대에도 10악에 해당하는 중죄인과 절도범에 대하여는 엄중히 다스렸으나 일반 범죄에 대하여는 寬典을 베풀었다. 세종 4년에 흉년이 들어 금주령을 내린 바 있는데 이에 따라 금주령을 범한 자는 ‘制書有違’의 형률이 적용되었다. 그런데 豪强한 자들은 금령을 피하고 무식하고 힘없는 백성들만 걸려들었으므로 범금자에 대하여 ‘制書有違’의 중형에서 ‘違令’의 경형으로 관전을 베풀게 하였다.215)≪世宗實錄≫권 18, 세종 4년 12월 무술.

 죄수 중에는 진범도 있고 혐의자도 있으며 억울하게 갇힌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어떤 경우이든 감옥의 시설부실과 관리소홀로 죄수의 건강을 해치거나 사망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지만 당시에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세종 7년 5월에 형조에 내린 전지에서는 죄수들의 고통이 되는 추위·더위·음식·

 위생문제까지 배려하고 이를 개선하도록 명령하고 있다.216)≪世宗實錄≫권 28, 세종 7년 5월 경오. 세종 21년 2월에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감옥의 설계도를 각 도에 보내 관찰사들이 그 설계도를 참작하여 감옥을 짓도록 한 것과217)≪世宗實錄≫권 84, 세종 21년 2월 신해. 세종 30년 8월에 죄수들이 더위를 피하고 위생적으로 복역할 수 있도록 한 것이218)≪世宗實錄≫권 121, 세종 30년 8월 무인.
朴秉濠, 앞의 글, 121쪽.
옥수들을 위한 구체적인 조처였다.

 형정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판결의 공정성 여부이다. 무고한 사람이 죄인이 되고 경범자가 중벌을 받게 되는 경우는 고금을 막론하고 얼마든지 있다. 위정자의 선정 여부는 형정의 공정성 여부로 가늠할 수 있는 일이며 형정의 운영 여하가 백성에게 미치는 영향은 큰 것이다. 세종은 동왕 12년 12월에 상정소에 내린 교서에서 다음과 같이 중죄인에 대한 공정한 판결을 위한 절차를 제시하였다.

형옥의 일은 애매하고 분명하지 않아 한두 사람이 辨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외방의 死刑은 따로 差使員을 정하여 본관수령과 함께 추핵하고 감사가 친문한 후에 형조에 이관하는 것이 이미 성헌되어 있다. 그러나 관리가 추핵할 때에 혹 소견이 같지 않고 혹 시행하는데 어려워 生을 死로 하고 사를 생으로 하는 자가 간혹 있다. 이제부터 차사원은 본관수령과 함께 추고하여 감사에게 보고하면 감사는 타관에 移囚하여 다시 다른 차사원 2인을 정하여 고핵케 한 후에 감사가 친문하고 형조에 이관하는 것을 항식으로 삼는다(≪世宗實錄≫권 50, 세종 12년 12월 경오).

 생사가 달린 死罪에 대한 재판은 지방에서도 3심을 한 후에 형조에 이관하도록 하여 억울하게 사형을 당하는 일을 예방하려 한 것이다. 세종 13년 5월 세종은 知申事 安崇善에게 중외관리의 오판이 많아 생·사가 바뀌는 일이 있음을 이르고 집현전으로 하여금 역대 오판사례를 초록하게 하고 안숭선에게도 江湖紀聞 안에서 오판사례를 초하여 보고하라고 하였다.219)≪世宗實錄≫권 52, 세종 13년 5월 경인. 그 4일 후에 세종은 역대 오판사례를 중국과 우리 나라의 예를 들어 재판을 공정·신중히 처리할 것을 하교하였다.220)≪世宗實錄≫권 52, 세종 13년 5월 갑오.

 공정한 재판을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범죄사실을 밝히기 위한 신문이다. 그런데 당시의 신문은 바로 고문을 의미하며 형틀과 笞杖부터 준비되었다. 그리하여 신문과정에서 죄의 유무와 관계없이 병신이 되거나 사망하는 경우가 생겼으므로 남형금지의 왕명이 자주 내려졌다. 세종 12년 10월에 형조에 내린 교지는 그 한 예이다.221)≪世宗實錄≫권 50, 세종 12년 10월 을미. 세종 12년 11월에 죄인에게 등을 때리는 형벌을 官門이든 私門이든 금지할 것을 전지하였다.222)≪世宗實錄≫권 50, 세종 12년 11월 무오. 이는 등을 상하게 하여 사망하는 자가 자주 생겼기 때문이다. 세종 13년 12월에는 죄의 경중과 관계없이 태장을 함부로 치지 못하도록 형조에 전지하였다.223)≪世宗實錄≫권 54, 세종 13년 12월 신해. 백성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형장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세종의 합리적인 법운영 정신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세종 21년 2월 의정부에서도 남형·혹형을 일체 금지시킬 것을 계청하여 윤허되었다.224)≪世宗實錄≫권 84, 세종 21년 2월 신해. 이처럼 군신간에 남형·혹형을 금지시키려는 노력이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체 근절시킬 수는 없었다. 세종 27년 11월 형조에 내린 전지에 “비록 사형수라도 삼가 함부로 형장을 가하지 말며 栲訊할 때마다 힘써 긍휼을 다하여 나의 뜻에 부응하라”225)≪世宗實錄≫권 110, 세종 27년 11월 정해.고 한 것은 세종대 형정이 欽恤에 힘써온 것을 한마디로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조선은 개국초부터 유교정치를 표방했으나 유교정치는 표방만으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태조대에는 개국초창기였으므로 우선 정치적·사회적 안정이 필요했고 국가의 기틀을 갖추기에도 겨를이 없었다. 태종대에는 정치적 안정과 왕권의 강화에 급급하였으므로 유교정치의 실현은 세종대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은 재위 32년 동안 유교정치의 기틀을 확립했고 또 꽃피웠다. 집현전을 설치하여 많은 유학자적 관료들을 양성했고 그들을 동원하여 유교적 의례·제도를 정비하였으며, 유교정치의 기반을 다지는 각종 편찬사업과 문화정리사업을 펼쳤다. 실로 유교정치의 기반이 확고해졌고 민족문화를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특히 세종대의 민본정치는 이 시대 유교정치의 참모습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군신이 민본·위민·애민·휼민의식을 지니고 백성을 위한, 백성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한 노력은 돋보이는 것이었다. 세종과 세종시대의 역사를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근거가 또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崔承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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