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3. 왕권의 재확립과 제도의 완성
  • 1) 수양대군의 왕위찬탈과 그에 대한 반발
  • (1)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1)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226)이 논제를 다룬 선행연구로 韓永愚,<王權의 確立과 制度의 完成(世祖-成宗)>(≪한국사≫9, 국사편찬위원회, 1973)이 참고된다.세종은 태종이 薨逝한 동왕 4년(1422)부터 친정을 행하면서 강한 의지력, 호학과 근면한 정사를 통하여 왕권을 안정·강화하였으며,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문물을 크게 정비하고 발전시켰다. 그렇지만 세종 18년에는 강력한 국왕 중심의 국정운영에서 의정부의 국정참여를 확대하는 방향으로의 전환이 있게 되었다. 즉 세종은 건강의 악화로 정사가 국왕에게 폭주하는 六曹直啓制를 감당하기가 어렵게 되었는데, 이 때 의정부에는 黃喜·孟思誠·許稠 등의 경륜과 재덕을 구비한 인물이 재직하고 있었다. 세종은 議政府署事制를 부활시켜 의정부대신으로 하여금 6조의 정사를 통괄하게 하였고, 이로써 자신의 정사에 대한 부담은 크게 줄어들었다.

 의정부서사제하의 의정부는 처음에는 국왕과 6조의 중간에서 원만하게 국정을 통괄하였고, 세종의 정사 부담도 경감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세종 25년경을 전후하여 왕은 신병이 악화되어 정사를 직접 재결하기가 어렵게 되었고, 왕세자로 하여금 정무를 대행시키기에 이르렀다. 세종 24년에 왕세자로 하여금 서무를 재결시키기 위하여 詹事院을 설치하고, 27년부터는 왕세자로 하여금 서무를 재결하게 하였다. 그런데 왕세자 또한 질병으로 정사를 제 때에 처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세종 28년(1446) 5월과 세종 31년 11월부터 32년 윤 정월까지는 세종이 다시 서무를 재결하여야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정부는 세종의 신임이 두텁고 능력이 출중한 皇甫仁·金宗瑞 등의 재직에 힘입어 정치력을 크게 강화시켰다.

 문종은 37세로 등극하여 왕세자 때에 쌓은 정치력과 학문을 바탕으로 언로를 확대하고 문·무신을 병용하며 병제개편을 도모하는 등 신망받는 정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건강상 의정부를 중심으로 정치를 행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의정부는 기능이 더욱 강화되었다.

 단종은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문종의 고명을 받은 황보인·김종서 등 의정부대신의 국정전단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단종초에는 의정부가 이·병조를 지휘하면서 인사를 전횡하는「黃標政事」가 자행되었다. 史官 李承召는 의정부의 국정전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人主는 손하나 움직일 수 없는 괴뢰적인 존재로 전락되고, 백관은 왕명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의정부가 있는 것은 알겠으나 군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世祖實錄≫권 2, 세조 원년 8월 임자).

 단종초의 이와 같은 왕권실추와 의정부 기능의 극대화는 왕위에 욕심을 가진 首陽大君을 격분시키고, 그가 정변을 일으키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단종 즉위초의 의정부는 유약한 국왕의 보호를 표방하면서 왕의 숙부인 수양대군과 安平大君의 정치개입을 금지하고, 集賢殿과 臺諫의 언론활동을 억압하였다. 또 왕 측근에 포치된 內禁衛의 개편을 추진하고, 內侍府의 정사참여를 금지하였다.

 단종초 왕실의 사정을 보면, 모후 顯德王后 權氏는 세종 23년에 사거하였고, 문종은 정비를 들이지 않고 세종의 후궁인 惠嬪楊氏로 하여금 궁중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또한 단종의 누이인 敬惠公主도 20여 세에 불과하였으므로 단종을 후원할 세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반하여 종친들 중에는 장년으로 유능하며 야심이 큰 수양·안평대군 등이 있었다. 수양대군은 세종대에 內佛堂의 설치, 불서의 번역, 향악의 악보편찬 등의 일을 감독하였고, 문종대에도 병서와 전법의 편찬을 지휘하였다. 또 문종 원년에 범법승려를 임의로 解枷하여 사저로 데리고 가는가 하면, 단종초에는 權擥·申叔舟 등의 문신을 포섭하고 韓明澮·洪達孫·楊汀 등 무신과 내금위 무사를 규합하는 등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안평대군도 김종서·집현전학사와 교유하는 등 세력을 강화하였다. 의정부대신은 수양대군·안평대군 등에 대하여 정치의 참여를 금지하고, 奔競금지 대상에 포함시켰다. 분경금지는 두 대군의 강력한 반대로 곧 철회하였지만, 정치참여는 계속 억제되었다. 그리하여 두 대군은 의정부에 반발하면서 정치참여를 도모하고, 그 추종자의 규합을 확대하여 나갔다.

 집현전(출신)관과 대간은 문종의 그들에 대한 중용책에 힘입어 많은 중견인물이 대간으로 진출하면서 영향력을 강화하여 나갔다.227)대간으로 진출한 인물에는 崔恒(직제학에서 좌사간)·하위지 (?, 장령)·宋處儉(?, 우헌납)·朴彭年(직제학, 집의)·金淡(지승문원사, 장령)·魚孝膽(직전, 집의)·신숙주(응교, 장령)·尹子雲(수찬, 좌헌납)이 있었다. 대간을 거쳐 집현전으로 돌아간 인물은 김담(장령, 직제학)·하위지(장령, 진전)·신숙주(장령, 직제학)·윤자운(좌헌납, 응교)이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단종초로 이어져 집현전(출신)관인 趙峿(直提學에서 執義)·金禮蒙(직제학, 집의)·李塏(직제학, 집의)·河緯地(直殿, 집의)·신숙주(직제학, 집의)·李克堪(檢詳, 持平)·柳誠源(副校理, 지평)·成三問(직제학, 右司諫)·尹起畎(부교리, 지평) 등이 대간으로 진출하였다. 또 대간인 조어(집의, 부제학)·하위지(집의, 직제학)·유성원(지평, 교리)은 대간을 거쳐 집현전에 복귀하였다. 이들 대간과 집현전관은 언론활동을 통해 의정부대신의 정치권력을 축소하고 그 전횡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犯贓者인 郭保民의 告身還給, 문종 훙서와 관련하여 피죄된 典醫監廳直(前典醫監正) 全循義의 放役 등을 시행한 의정부를 강력히 탄핵하였다. 그러나 대간의 언론활동은 단종이 일방적으로 의정부를 옹호하고, 의정부에서 대간의 국왕면대를 차단하고 의정부에 비판적인 대간을 체직하는 등 탄압을 받아 좌절되었다.228)≪端宗實錄≫권 7, 단종 원년 7월 경오. 그리하여 집현전과 대간은 하위지가 “늙은 여우(김종서)가 죽으면 내가 다시 관직에 돌아올 것이다”229)≪端宗實錄≫권 7, 단종 원년 7월 기묘.라고 하였듯이 공공연히 집정자를 배척하였고, 성삼문과 유성원도 황보인·김종서의 인사전횡을 비판하는 등 의정부를 비판하고 배척하였다. 이에 癸酉靖難이 일어나자 상당수의 집현전관과 대간은 이에 직접 참여하거나,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내금위는 국왕이 직접 장악하여 왕권을 뒷받침하게 하는 군사적 기반이 되었는데, 단종초에는 의정부대신인 김종서 등이 내금위의 지휘에 간여함은 물론, 공공연히 그 인원의 감축 등 개편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금위(출신) 무사는 의정부에 반발하여 정변 당일에 楊汀·柳洙·洪順孫이 수양대군을 수종하여 김종서를 격살하는 행동대원으로 참여하는230)李肯翊,≪燃藜室記述≫권 4, 端宗朝故事本末 世祖靖難. 등 계유정난 당시에 군사력을 제공하였다.

 내시부는 왕권이 강력한 시기에는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단종초에는 왕권이 미약하고 의정부의 전횡으로 그 기능이 위축되고 억압되었다. 이에 내시부관인 嚴自治·田畇 등은 제신의 국왕면대는 반드시 승정원을 경유하도록 한 의정부의 지시를 어기고 수양대군의 단종 상견을 주선하고,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호감을 갖도록 작용하는 등 의정부에 반발하였다.

 집현전과 대간·내금위·내시부의 의정부에 대한 반발은 이들과 수양대군의 결합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고, 수양대군에 의한 계유정난이 성공하는 토대가 되었다.

 수양대군은 의정부의 종친정치 배제에 대한 반감과 의정부의 전횡에 대한 내외의 비판여론을 기화로 먼저 권람·한명회 등을 심복으로 삼고, 내시부·내금위관을 포섭하여 단종의 호감을 얻고 군사력을 구축하였다. 단종 원년(1453) 10월에는 정변을 일으켜 안평대군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한다는 죄목으로 집정대신인 김종서·황보인을 살해하였으며, 이들을 보좌한 李穰·趙克寬 등을 궐내로 불러들여 살해하고 정권을 잡았다. 이 직후에 안평대군을 유배하였다가 사사함으로써 정권의 기반을 굳혔다.

 수양대군이 정변을 일으킨 단종 원년 이후는 황보인·김종서 등에 의한 전횡은 종결되었지만, 새로이 수양대군 일파에 의해 전횡이 행하여졌다. 수양대군은 정변과 함께 領議政府事로서 判吏·兵曹事를 겸하고 이·병조의 인사 등 국정 전반을 총괄하였고, 李澄玉이 난을 일으키자 內外兵馬都統使가 되어 군사까지도 총령하였다.

 이에 이르러 단종의 왕권은 더욱 약화·고립되고, 유교적 군신관에 입각하여 왕위를 유지하기에 급급하였다. 수양대군 일파는 유교적 명분의 저촉을 극복하기 위해 단종의 선위를 강요하였고, 급기야 단종 3년 윤 6월에 단종의 양위를 받아 수양대군이 즉위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