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3. 왕권의 재확립과 제도의 완성
  • 2) 세조의 왕권강화와 정치
  • (1) 세조의 왕권강화

(1) 세조의 왕권강화

 세조는 단종초 극단적인 의정부 중심의 정치로 인한 왕권의 쇠미와 실추를 시정하기 위하여 계유정난을 일으킨 후 단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즉위하였다. 이에 세조가 당면한 시급한 정치과제는 왕권을 안정·강화하고 국왕중심의 정치를 실행하는 것이었다.

 세조는 이미 단종 원년(1453) 계유정난 직후에 한명회·권람·鄭麟趾 등 43명을 靖難功臣에 책록하였고, 명망 있는 다수의 관료들을 포용하여 세력기반을 공고히 하였다.232)정난공신에 책록된 인물은 다음과 같다(≪端宗實錄≫). 공신의 성분과 그 상호관계에 대하여는 鄭杜熙,<世祖-成宗代 功臣集團의 政治的 性格>(≪朝鮮初期 政治支配勢力硏究≫, 一潮閣, 1983), 197∼209쪽 참조.
1등(12명);수양대군, 정인지, 韓確, 朴從愚, 金孝誠, 李思哲, 李季甸, 朴仲孫, 최항, 홍달손, 권람, 한명회.
2등(11명);權蹲, 신숙주, 尹士畇, 양정, 유수, 유하, 奉石柱, 洪允成, 郭連城, 엄자치, 전균.
3등(20명);李興商, 李禮長, 성삼문, 金處義, 權軀, 薛繼祖, 柳泗, 康袞, 李自蕃, 柳子煥, 權擎, 宋益孫, 洪順孫, 崔潤, 柳淑, 안경손, 韓明溍, 韓瑞龜, 李蒙哥, 洪順老.
즉위 초에는 다시 자신의 등위에 공헌한 인물과 명망이 있는 관인·군사 등을 佐翼功臣과 原從功臣에 책록하여 관인층을 포섭·융화하면서 왕권을 안정시켰다. 즉 세조 원년(1455) 9월에 한명회·권람·신숙주·정인지 등 46명을 좌익공신에 책록하였다.233)좌익공신에 책록된 인물은 다음과 같다(≪世祖實錄≫). *은 정난공신이기도 함. 공신의 성분과 그 상호관계에 대하여는 鄭杜熙, 위의 잭, 209∼222쪽 참조.
1등(7명);桂陽君 璔, 翊峴君 璉, 한확*, 尹師路, 권람*, 신숙주*, 한명회*.
2등(12명);정인지*, 이사철*, 尹巖, 李季疄, 李季甸, 姜孟卿*, 尹炯(단종 원년 졸), 최항*, 전균*, 홍달손*, 양정*, 權攀.
3등(27명);權恭, 李澄石, 정창손(세조 2년 추록), 黃守身, 朴畺, 권자신, 朴元亨, 具致寬, 윤사균*, 성삼문*, 曺錫文, 이예장*, 元孝然, 韓終孫, 李徽, 黃孝源, 尹子雲, 李克培, 李克堪, 權愷, 崔濡, 曺孝文, 韓繼美, 鄭守忠, 趙得琳, 김질(세조 2년 추록), 흥윤성*.
또 동왕 원년과·3년 및 6년에는 전·현직 정1품으로부터 종9품에 이르는 관인과 녹사·노비 등 2,000여 명을 원종공신에 책록하였다.234)≪世祖實錄≫권 2, 세조 원년 12월 무진·권 8, 세조 3년 8월 계묘 및 권 20, 세조 6년 5월 경자. 여러 병종의 군직자가 800여 명이고, 의정부·돈령부·중추원·6조·대간 등이 200여 명이고, 시·감·창·고·서가 500여 명이며, 외관이 210여 명이었다. 그 외에 내시부가 50여 명이고, 산관이 80여 명이며, 아전과 노비 등이 200여 명이었다.

 다음으로 국정운영체체를 국왕중심체제로 개편하였고, 자신의 뜻을 받들어 정치를 담당할 측근 관료집단과 왕권을 보호할 군사집단을 구축하였다. 또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는 우대하고 거역하는 자는 가차없이 처단하며, 유교를 억압하고 대간의 활동을 탄압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였다.

 세조는 국왕 중심의 국정운영을 위하여 동왕 원년 8월에 의정부서사제의 폐지와 6조직계제의 실시를 천명하고, 이에 반대하는 6조당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명하고 6조직계제를 강행하였다.

의정부서사제는 임금이 죽은 제도이다. 너희들은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어려서 정치를 재결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느냐(≪世祖實錄≫권 2, 세조 원년 8월 임자).

 이것은 그가 단종 원년 이래로 정치·군사·인사 등 모든 국가권력을 장악한 것과 같이 즉위한 후에도 6조를 직접 장악하면서 국정을 운영하려는 조치였고, 세조의 왕권에 대한 의지가 단적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세조는 왕권강화와 그 실행을 위하여 직접 銓注에 참여하고 측근세력을 부식하였으며, 친위병을 강화하고 군권 관장에 유념하였다. 즉위와 함께 이·병조의 당상과 함께 전주(親臨銓注)를 행하였는데, 相避制를 무시하고 신임하는 인사를 중용하였다. 세조 11년(1465)에는 拔英試·登俊試를 시행하여 깊이 신임하는 인사를 발탁하였고, 세조 12년에는 세종 8년(1426) 이래로 계승된 5∼9품 관인에 대한 대간의 署經을 폐지하였다.

 또 세조는 종친·공신과 승정원승지를 중용하고 파격적으로 발탁하여 측근세력화하였다. 종친의 정치참여는 원래 금지되었지만, 세조는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이들을 파격적으로 중용하였다. 세조 13년과 14년에는 龜城君 浚(臨瀛大君의 아들)을 都摠管에 임명하였다가 李施愛亂이 일어나자 토벌군 최고사령관인 咸吉江原平安黃海四道都摠使에 발탁하고, 이어 28세인 그를 영의정에 발탁하는 등 20여 명의 종친을 6조와 군직에 기용하였다.235)세조대에 기용된 종친의 가계와 역관은 金成俊,<宗親府考>(≪史學硏究≫18, 1964), 32∼33쪽 표 참조. 종친인 임영대군 璆·永順君 溥·구성군 준·銀山副正 徹과 태종의 부마인 河城尉 鄭顯祖 등 10여 명을 內宗親 또는 兒宗이라고 칭하여 측근에 두면서 傳命을 맡기고, 중요 정사에 참여시켰다.236)韓忠熙,<朝鮮初期 承政院硏究>(≪韓國史硏究≫59, 1987), 91∼93쪽.

 그리고 세조는 공신을 발탁하여 의정부·6조·승정원과 고위 군직에 포진시켰다. 세조 초기와 중기에는 단종 원년 계유정난 때에 각각 右副承旨, 校理, 敬德宮直이었던 신숙주, 권람, 한명회를 수년 사이에 승지·판서를 거쳐 의정에까지 승진시키는 등 정난·좌익공신을 정치의 토대로 삼았다. 세조 13년 9월 이후는 구성군 준·康純·尹弼商·金國光·南怡 등 敵愾功臣을 의정부·6조·都摠府 등에 제수하여237)구성군은 세조 14년 7월에 도총관에서 영의정이 되었다. 강순은 세조 13년 9월에 지중추부사에서 우의정이 되고, 익년에 山陽君兼都摠管이 되었다. 윤필상은 세조 13년 8월에 도승지에서 우참찬겸도총관이 되었다. 김국광은 13년 8월에 우참찬에서 우찬성겸판병조사가 되고, 다음달에 도총관을 더하였다. 남이는 13년 11월에 동지중추에서 공판겸도총관이 되고, 이듬해 8월에는 병조판서가 되었다. 한명회·신숙주 등을 견제시킴으로써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세조 원년부터 13년까지 이·병조를 分房한 승지는 이·병조의 판서·참판과 함께 문·무관의 인사에 참여하였다. 왕과 주요국정을 의논하고 처리하였으며, 6조·의정부에 진출하면서 왕권의 토대가 되었다.238)金昌鉉,<朝鮮初期 承政院에 관한 硏究-承旨의 銓注機能과 任用實態를 중심으로->(≪韓國學論集≫10, 漢陽大, 1986), 13∼25쪽.
韓忠熙, 앞의 글, 85∼86쪽 및 40∼41쪽<표 6>참조.

 세조는 내금위·別侍衛·甲士 등을 크게 증액하고, 최상층 군직에는 깊이 신임하는 인사를 제수하여 왕권의 토대를 삼았다. 세조 4년에 별시위가 3,000명에서 5,000명으로 증액되었다. 동왕 6년에는 내금위가 100명에서 200명으로 증액되고, 그 입직인원도 34명에서 68명으로 증가하였다.239)李成茂,≪朝鮮初期 兩班硏究≫(一潮閣, 1980), 234∼235쪽<표 37>및 239쪽<표 38>. 중앙군인 五司·五衛와 이들을 지휘하는 三軍鎭撫所·五軍鎭撫所·五衛都摠府, 兼司僕·내금위 등을 지휘하는 도총관(정2품)·副摠官(종2품), 兼司僕將·내금위장(종2품)에 종친과 공신 등을 제수하였다.

 세조는 왕권에 저항하는 자는 가차없이 처단하고,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는 잘못을 범하여도 용서하는가 하면, 上命下達의 정치를 구사하여 왕권을 전제화하였다. 단종의 복위를 도모한 성삼문 등과 동생인 금성대군 등을 가차없이 처단하였다. 또 세조는 동왕 4년에 잠저에 있을 때의 사부로서 당시 가장 위망과 학식이 높고 영의정부사에 재직하고 있던 정인지를 功臣仲朔宴 중 취중에 崇佛을 비판한 일로 파직하였다. 세조 12년에 楊山君 양정은 정난·좌익 2등공신이었고 세조 원년으로부터 12년까지 함길도도절제사와 평안도도절제사로서 북변진수에 공이 있었지만, 그의 귀환을 위로하는 연회석상에서 그가 “퇴위하여 편안하게 지내라”240)≪世祖實錄≫권 39, 세조 12년 6월 경미·신해.고 한 말을 빌미로 사사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仁山君 홍윤성은 세조 12년과 13년에 강압적으로 양가의 여자를 축첩하고, 가신이 收租하면서 正兵 羅季文을 살해까지 하였지만 주의를 받는데 그쳤다. 또 세조 2년에 집현전을 혁파하고 경연을 정지하였으며, 대간의 인원을 축소하고 왕권을 침해하는 대간활동을 탄압하였다.241)崔承熙,≪朝鮮初期 言官·言論硏究≫(서울大 出版部, 1976), 141∼147쪽.

 세조는 이러한 여러 정책과 함께≪經國大典≫의 편찬을 통하여 강력한 왕권과 국왕 중심의 정치체제를 고착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는≪경국대전≫이 성종 15년(1484)에 완성되어 다음 해에 반행되고, 그 작업이 세조의 지나친 국왕 중심의 정치를 비판하던 훈구대신에 의해 주도되면서 왕권과 신권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국정을 운영하는 방향으로 개수됨에 따라 좌절되었다.

 이처럼 세조 11년(1465)경까지는 세조의 국왕 중심의 국정운영체제가 실효를 거두어 왕권이 강화되고 국왕중심의 정치가 운영되었다. 그러나 세조 11년 이후에는 신병이 악화되어 세자와 院相으로 하여금 서무를 재결하게 하고, 한명회 등 원로대신들 사이에서 세조의 지나친 왕권전제화에 대한 비판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이시애란이 일어나는 등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또 강압적인 무단정치로 왕권은 크게 강화되었으나, 정국운영상 경색을 초래하였고 사회도처에서 비리가 만연되면서 관료의 기강이 이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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