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3. 왕권의 재확립과 제도의 완성
  • 2) 세조의 왕권강화와 정치
  • (2) 세조대의 정치

(2) 세조대의 정치

 세조는 국왕 중심의 정치운영을 위하여 즉위와 함께 의정부서사제를 혁파하고 6조직계제를 실시한 바 있지만, 재위기간을 통해 6조 중심의 국정체제를 강화하고 중앙과 지방의 정치·군사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편하여 통치체제를 크게 정비하였다.

 먼저 세종대 이래의 중앙과 지방의 정치기구를 계승하여 서울의 당상아문(관원)과 지방관아는 부분적으로 보완하는 데 그쳤지만, 서울의 정3품 이하 아문은 관직명과 관원의 수를 크게 고치면서 정비하였다. 중앙정치기구는 세조 6년에 直啓衙門인 종친부·병조·한성부·사헌부·사간원·仁壽府와 6조 속아문인 繕工監·軍器監·承文院 등 40여 아문의 관원 90여 명을 감원하였고, 慶昌府를 혁파하였으며, 䆃官署 등을 司膳署 등에 합속하고 典農寺 등을 사선서 등으로 개칭하였다. 또 奉常寺·內資寺·內贍寺·군기감·濟用監의 모든 관원과 인수부 등 25관아의 少尹 등 100여 관원을 久任官으로 조정하였다.242)≪世祖實錄≫권 20, 세조 6년 5월 정유·기해 및 권 21, 세조 6년 8월 기미. 동왕 12년에는 駙馬府·中樞院·五衛鎭撫所·尙瑞司 등을 儀賓府·중추부·오위도총부·尙瑞院 등으로 개칭하였다. 의정부의 영의정부사를 영의정으로 개칭하고, 여러 寺·監·倉·庫·署 등의 정3품 당하관 이하의 명칭을 正·副正·僉正·判官·主簿·奉事·副奉事·參奉으로 일원화하였다. 병조·掌隷院·승문원 등 30여 관아의 60여 명을 증치하고, 한성부·辨定院·成均館 등 30여 관아의 60여 명을 혁거하였다. 호·형조에 算士·明律 등 本業人(전문직업인)을 두고 구임관을 확대하였으며, 여러 아전을 錄事와 書吏로 통일하였다.243)≪世祖實錄≫권 38, 세조 12년 정월 무오.

 지방정치기구는 세조 12년에 開城府를 경관(留守府)에서 지방관(府尹府)으로 격하하고, 양주도호부와 영변도호부 및 대구·구성지군사를 목·대도호부 및 도호부로 승격하였으며, 인산군을 혁거하고 웅천현을 설치하였다. 都觀察黜陟使와 知郡事를 都觀察使와 郡守로 개칭하고, 병마도절제사 이하 육·수군의 군직을 개정하였다.244)병마도절제사를 병마절도사로, 수군도안무처치사를 수군절도사, 병마도절제사도진무를 병마우후, 수군도안무처치사도진무를 수군우후, 도만호를 수군첨절제사, 병마단련사를 某鎭도병마절제사, 병마단련부사를 모진도병마동첨절제사, 병마단련판관을 모진도병마절제도위로 각각 개칭하였다. 또 함흥·평양부에는 소윤을 혁거하고 판관 각 1명을 두었고, 성주·광주·수원·남원도호부에 판관 각 1명을 두었으며, 양계의 병마도절제사 經歷所都事를 혁거하고 評事 각 1명을 두었다.245)≪世祖實錄≫권 38, 세조 12년 정월 무오. 그 외에 전국의 驛路를 조정하고, 察訪과 丞을 두어 道驛과 驛을 관장하게 하였다.

 두번째로 중앙과 지방의 군사기구와 지휘체계를 개편하였다. 중앙군사기구는 세조 3년에 문종 원년(1451) 이래로 운영된 義興·忠佐·忠武·龍驤·虎賁司의 司를 衛로 개칭하였고, 5사의 25領에 소속된 여러 병종을 모두 5위에 소속시켜 의흥위에 甲士·近仗, 용양위에 別侍衛·攝六十, 호분위에 忠順衛·防牌, 충좌위에 忠義衛·受田牌·銃筒衛, 충무위에 忠贊衛·京侍衛牌·別軍을 각각 분속시켰다. 이로써 문종대의 3군진무소―5사(25령) 체제가 5위 진무소―5위(25부) 체제로 개편되고, 부대편성과 진법체제가 일치되었다. 이어 세조 12년에 5위진무소를 5위도총부로 개칭하고 5위도총부에 5위에 대한 군령권을 부여함으로써 5위도총부―5위체제를 확립하였다.246)閔賢九,≪朝鮮初期의 軍事制度와 政治≫(韓國硏究院, 1983), 144∼165쪽.

 지방군사기구는 세조 원년(1455)에 남방의 왜구에 대한 대비를 위하여 세종대에 평안·함길도에 운영된 某道―中翼·左翼·右翼과 獨鎭의 軍翼道體制를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또 이와 함께 중·좌·우익은 각 읍의 수령으로 하여금 모두 병마절제사나 병마첨절제사(중익)·병마단련사(좌·우익)를 겸직시키고, 번상군사, 현지 營·鎭·浦의 入番군사, 下番 習陣군사, 雜色軍을 각 익에 소속시켰다. 이리하여 종래까지 별도로 조직·운영되던 남·북방의 군사와 각종 군사가 군익도체제로 통일되고 일원화되었다. 세조 3년에는 군익도체제를, 주요한 지역을 巨鎭으로 하고 주변의 여러 진을 그에 속하도록 하는 巨鎭-諸鎭의 鎭管體制로 개편하여 상하의 지휘체계를 보다 강화하였다. 이어 세조 4년에 중앙과 지방의 모든 군사를 진에 소속시키고, 세조 12년에 도절제사 이하 진관책임자의 명칭을 개정하였다. 이리하여 지방의 군사지휘체계는 다음과 같이 도관찰사를 정점으로 병마절도사의 지휘를 받는 육군과 수군절도사의 지휘를 받는 수군으로 정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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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외에 군지휘관의 명칭은 태종초 이래의 攝護軍·攝司直·攝副司直·攝司正·攝副司正을 부호군(종4품)·부사직(종5품)·副司果(종6품)·부사정(종7품)·副司猛(종8품)으로 각각 개칭하고, 세종 18년(1436) 이래의 攝司勇을 副司勇(종9품)으로 개칭하여 정3품 상호군으로부터 종9품 부사용에 이르는 명칭을 확립하였다. 병종은 근장·섭육십·방패·수전패·경시위패·별군·총통위를 혁거하고, 忠贊衛·破敵衛·壯勇衛를 새로이 설치하고 시위패를 正兵으로 개칭하여 갑사·별시위·친군위·충의위·충찬위·충순위·정병·파적위·장용대로 정리하였다. 관계는 文散階는 그대로 계승되었지만, 武散階는 정3품 당하계의 折衝將軍을 당상계로 승격하고, 정3품 果毅將軍 이하를 크게 개칭 하였으며, 서반잡직계의 展力都尉와 效力徒尉를 勵力徒尉와 彈力徒尉로 개칭하였다.247)≪世祖實錄≫권 38, 세조 12년 정월 무오.

 이러한 정치체제, 관제개편을 통하여 조선왕조 통치의 근간이 되는 행정·군사체계가 정립되었고, 이것이 세조말까지 행해진≪경국대전≫편찬에 반영되었다가 성종대에 반행된≪경국대전≫에 정착되었다.

 세조는 조선 개국 이래의 잡다한 條例·條令 등을 집성할 법전을 편찬하여 통치체제를 확립하고, 아울러 강력한 왕권과 국왕중심의 정치체제를 고착시키고자≪경국대전≫의 편찬을 시작하였다.≪경국대전≫편찬은 세조 원년(1455) 집현전에 명하여 국초 이래의≪經濟六典≫·≪續六典≫·≪元六典≫·≪六典謄錄≫등의 법전과 조령·조례를 종합·체계화한 永世不變의 법전을 수찬한다는 취지 아래 시작되었다. 세조 2년 6월에 집현전이 폐지됨에 따라 六典詳定所를 설치하고 여기에 6전상정관을 소속시켜 이 사업을 계승시켰다.≪경국대전≫의 편찬은 상정관이 상정하여 올린 내용을 세조가 친히 검토·수정하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또 상정관은 문안을 작성함에 있어서 세조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경향이 현저하였다. 이리하여≪경국대전≫에는 세조의 뜻이 전적으로 반영되었다.

 ≪경국대전≫의 수찬은 순조로이 진행되어 세조 6년과 7년에 호전과 형전이 반행되었다. 이어 이·예·병·공전도 작업을 서둘러 세조 11년까지는 초안이 작성되고, 다음해부터 수정에 들어가 마무리를 서둘렀다. 그러나≪경국대전≫은 세조 12년 이후에 세조의 신병악화, 이시애란, 세조의 신중한 편찬방침에 따라 세조 때에 마무리되지 못하였으며, 예종·성종대로 이어져 완성되었다.248)朴秉濠,<經國大典의 編纂과 頒行>(≪한국사≫9, 국사편찬위원회, 1973), 250∼258쪽.

 세조대에는 保法을 실시하여 군액을 확대하였고, 서북방의 야인을 정복하여 북변을 안정시켰으며 진관체제를 실시하여 전국적인 방어체제를 구축하였다.

 먼저 해이해진 군역제도를 전면적으로 정비하면서 군액을 확보하고, 이를 토대로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군역은 법적으로는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양인 중 현직관인·2품 이상 퇴직관인, 각급학교 학생 등을 제외한 모두가 의무적으로 지는 국역이었다. 그런데 세종말 이래로 집권체제가 해이해짐에 따라 군역을 져야 할 퇴직관리·冒稱학생·고관자제 등이 군역을 회피·면제받고, 힘없는 농민이 전담하는 경향이 촉진되었다. 이에 따라 군액이 크게 감소되고, 군역에 토대한 국방체제도 약화되어 갔다.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세조 5년(1459)과 9년·13년에 걸쳐 전국적으로 호적을 개수하고, 號牌制度를 실시하여 호적에 탈루되고 군적에 누락된 자들을 색출하였다. 여기에서 색출한 인구를 호적에 등재시키고, 이 호적에 따라 3품 이하의 퇴직관리와 산관(影職·檢校 등)으로서 군역을 회피한 자, 校生으로서 40세 이상의 열등자와 시험에 불합격한 자, 음직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공신·관인자제, 그리고 일반양인으로서 군적에 누락된 자 등을 군적에 편속하였다.249)李光麟,<號牌考-그 實施 變遷을 中心으로->(≪庸齋白樂濬博士還甲紀念 國學論叢≫, 1956), 570∼586쪽. 세조 10년에는 동왕 5년·9년에 행해진 人丁搜括과 호패법 실시의 토대 위에 ‘2정을 1보로 하고, 전 5결은 1정에 준하도록 하며, 奴도 奉足수로 계상하는’ 보법을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군역부과 단위가 자연호를 중심으로 한「3丁 1호」에서 인위적인「2丁 1保」로 개편되어 농민의 군역부담이 증가되었으나 토지·노도 봉족화되어 유력자도 군역을 부담하는 등 군역의 평준화가 이루어지면서 군액이 크게 증대되었다.

 다음으로 세종대의 대왜·야인책을 계승하여 실시하고, 전국적인 군사방어체제를 구축하였다. 왜인에게는 물자·관직을 주어 회유·무마하였다. 그러나 야인에게는 물자와 관직을 주어 회유하는 정책과 함께 군사를 보내 토벌하는 강경책을 병행하였다. 세조 5년에는 교통의 불편, 여진과의 빈번한 충돌, 수비의 곤란 및 건주좌위도독 童倉의 조선접근에 대한 明의 강압 등과 관계되어 단종 3년(1455) 4월의 虞芮郡·閭延郡·茂昌郡 폐지에 이어 慈城郡을 폐지하였다. 이로써 압록강변의 조선국경은 4군 이남으로 축소되었다. 세조 6년에는 연초부터 시작된 야인의 침구를 징계할 자체의 사정과 명의 협공요청에 따라 신숙주 지휘하의 建州衛 정벌군을 출동시키고, 두만강을 건너 毛憐衛 추장 李滿住와 그 아들을 잡아죽이는 등 야인을 소탕하였다. 세조 13년에는 강순·남이·魚有沼 등의 지휘하에 서정군을 다시 출동시켜 건주야인을 소탕하여 북연을 안정시켰다.250)李鉉淙,<女眞關係>(≪한국사≫9, 국사편찬위원회, 1973), 428∼433쪽.

 국방에 있어서는 세조 원년·3년에, 세종대에 함길·평안도에 실시된 군익도 체제를 전국적으로 실시한 토대 위에 진관체제를 실시하였다. 연해와 내륙의 요새지마다 거진을 설치하고 그 주변 고을을 몇 개의 진(諸鎭)으로 편성하여 이를 거진이 관할하였다. 그 지역의 수령으로 하여금 군사지휘를 담당케 하는 거진 중심의 전국적인 방위체제가 편성된 것이었다. 동시에 북방의 정군과 남방의 시위패를 정병에 합칭시켜 군사를 赴防정병(북방)과 番上정병·요새부방 영진군(남방)으로 조정하고(세조 5년), 남방의 정병·영진군을 합속하여 일반 양인은 선군으로 충차하는 외에는 모두 정병에 소속시켜 번상과 부병을 교대로 담당하게 하였다(세조 10년). 이리하여 진관별로 시위군을 뽑아 중앙에 번상하도록 하고 영진군을 뽑아 각 도 병영이나 여러 진에 부방하도록 하는 체제에서 각 관의 정병이 거주지 방위를 담당하거나 番次에 따라 상경 숙위하게 되었다. 또 진법과 병서를 보급하여 전술이론을 발전시켰고, 이를 토대로 무예와 전술훈련을 향상시켰으며, 화차·화포 등을 개량하였다.

 이리하여 세조대에는 군액이 확대되고 전국적으로 조밀한 방어체제가 구축되었으며, 병종과 군역체계가 체계화되었다. 전술과 무기가 개량되었고, 북변이 안정되면서 군사·국방이 크게 강화되었다.

 세조는 국용을 줄여 국민의 부담을 경감하고, 토지사유의 진행과 과전지급 대상자의 증가로 인한 과전부족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획기적인 재정절감책과 과전개혁책을 실시하였다.

 세조 10년에는 재정제도를 개혁하여 수입을 고려하여 지출을 책정하는「計入量出制」를, 지출을 고려하여 수입을 책정하는「計出量入制」로 전환하였다. 즉 먼저 經費式例(橫看)를 제정하여 국가경상비를 사정하면서 지출계획표를 작성하고, 이에 의거하여 공부세입장부인 貢案을 작성케 하여 공부를 징수하였다. 이로써 세입과 세출이 균형을 이루었고, 종래까지 지출을 고려하지 않고 과도하게 수입을 책정함으로써 야기된 백성의 부담이 크게 경감되었다.251)田川孝三,≪李朝貢納制の硏究≫(東洋文庫, 1964), 21∼22쪽.

 과전은 개국초에 그 지급의 불균형이 논란되기는 하였으나 운용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왕조의 이행과 함께 관료의 수가 계속 증대하고 각종 공신전과 別賜田의 지급이 크게 확대되어 과전의 부족현상이 심화되었다. 과전부족을 타개하기 위하여 태종대에는 閑良官의 과전지급액을 10결 또는 5결로 제한하였으며, 守信田과 恤養田의 지급액수를 감소하였다.252)韓永愚,<太宗·世宗朝의 對私田施策>(≪韓國史硏究≫3, 1969), 57∼58쪽. 세종대에는 대군 등의 과전지급을 수십 결씩 줄이고, 과전의 혁파를 논의하기도 하였다.253)≪成宗實錄≫권 32, 성종 4년 7월 을미. 그러나 세종말에는 과전을 받지 못하는 사대부의 수가 상당히 많은 형편에 이르렀다.254)≪世宗實錄≫권 112, 세종 28년 5월 신묘. 세조가 즉위하면서는 정난·좌익공신의 책록에 따라 80∼500결씩 총 10,600여 결의 공신전과 상당한 별사전이 지급되는255)정난공신에게는 1등 12명에게 500결(수양대군)과 200결(11명)을, 2등 11명에게 150결을, 3등 20명에게 100결을 각각 지급했고, 좌익공신에게는 1등 7명에게 150결을, 2등 12명에게 100결을, 3등 25명에게 80결을 각각 지급했다. 또 한명회·신숙주·정인지가 170결·90결·50여 결의 별사전을 각각 받았다(韓永愚,<王權의 確立과 制度의 完成(世祖-成宗)>,≪한국사≫9, 국사편찬위원회, 1973, 219쪽). 등 과전의 부족이 더욱 심화되었다.

 과전의 부족문제를 타개하기 위하여 먼저 세조 7년으로부터 11년까지 수신전·휼양전을 조사하고, 전국적인 양전사업을 실시하여 과전세습지를 조사하였다.256)≪世祖實錄≫권 28, 세조 8년 6월 신유·권 24, 세조 7년 4월 을유·권 33, 세조 10년 4월 정유 및 권 37, 세조 11년 12월 기축. 이어서 세조 12년(1460)에 조선 개국 이래로 실시되어온 과전법을 폐하고 현직자에게만 과전을 지급하는 職田法을 실시하였다. 지급액도 세종 22년(1440) 이래의 대군 250결, 군 200결, 정1품 150결에서 정·종9품 15결까지와 品外 權務 10결, 令同正·학생 5결을 대군 225결, 군 180결, 정1품 110결에서 정·종9품 각 10결까지로 감액하였고 품외는 폐지하였다.257)李景植,<朝鮮初期 職田制의 運營과 그 變動>(≪韓國史硏究≫28, 1980), 73쪽. 이 직전법은 직접적으로는 과전의 지급대상과 지급액을 축소한 과전개혁책이었지만, 간접적으로는 그 지급대상이 현직자에게 국한되어 왕권을 강화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한편 직전법은 세습이 인정되던 수신전·휼양전은 물론 퇴직자에게 주어지던 전지의 지급이 폐지되어 모든 관인의 경제난을 야기시킬 것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를 주도한 한명회 등 의정부·6조의 2품관 이상자는 대개 공신으로서 200∼500여 결의 공신전 등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258)이 시기 의정부·6조 역임자에 대해서는 鄭杜熙, 앞의 책, 220∼221쪽<표 4-10>참조. 현직관인도 일단 과전을 받았으며, 당시의 분위기상 그 실시를 강력히 반대하기 어려웠으므로 직전법이 시행될 수 있었다. 또 이 점에서 직전법은 예종·성종초에 세조의 전제왕권과 지나친 집권화정책에 대한 반발에서 세조대에 실시된 국왕 중심의 정치구조, 보법 등 많은 정책이 변개되었던 것과는 달리 그대로 계승되었다.

 또 지방재정과 군자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각종 둔전을 증설 또는 신설하였다. 세조 3년에 역둔전을 평안도에 새로 설치하여 廩田의 부족을 보충하게 하였다. 세조 4년에 전국 관둔전의 면적을 종전의 두 배로 증액하여 牧官 이상 20결, 知官 이상 16결, 縣官 12결로 각각 정하였다. 세조 6년에 전국 각급 포·진에 둔전을 설치하여 절제사·處置使營 20결, 첨절제사·都萬戶營 15결, 만호영 10결을 각각 지급하였다. 세조 7년부터 11년까지 세종 8년에 혁거된 국둔전제를 부활하여 평안도의 郭山·安州·三和 등의 荒閑地·屬公田·絶戶田에 총 15처를 설치하였다. 여러 둔전은 모두 소재지 군인이 경작하였다.259)李載龒,<朝鮮初期 屯田考>(≪歷史學報≫29, 1965), 104∼109쪽.

 그 외에도 농업생산의 증대 등 민생안정을 위한 시책을 실시하였다. 세조 4년 이래로 황해·강원·평안도의 개척을 위해 대대적인 徙民을 실시하고, 이중 농우가 없는 자에게는 농우를 지급하고 한전도 우선적으로 분급하였다. 대군과 의정 이하 종친과 조관에게 토지개간량을 할당하고 그 성과에 따라 陞職

 을 약속하는 등 토지개간도 장려하였다.260)李景植,<朝鮮初期의 農地開墾과 大農經營>(≪韓國史硏究≫75, 1991).
―――,<朝鮮初期 北方開拓과 農業開發>(≪歷史敎育≫52, 1992) 참조.
또 상평창제도를 부활하여 춘궁기의 농민을 구제하였고, 민정에 유의하여 공물대납의 금지를 천명하였으며, 蠶書를 번역하여 보급하였고 농우보급책을 계몽하였다. 군사용 화살촉을 겸한 八方通寶를 유통시켰다.

 세조대에는 세조의 자주적인 국가·문화의식과 함께 제천의례와 단군숭앙이 고양되고 불교가 숭신되었으며, 이에 따라 유교정신이 쇠미되기는 하였으나 여러 분야의 많은 서적이 편찬되었다.

 제천의례로서 고려시대에 행해진 圓丘祭는 제후국의 명분에 맞지 않다는 성리학적 의례관으로 인해 조선 개국과 함께 폐지되었다. 그러나 태종·세종대에는 성리학적 명분상으로는 원구제를 지낼 수 없었지만 전통적으로 제천을 행하였고, 현실적으로도 기우·祈晴 등을 위한 제천이 요청되어 수시로 원구제를 행하였다. 세조 3년(1457)에 원구단을 세워 태조를 배향하고 원구제를 행하였으며, 이후 祀典에 재록되지는 않았으나 치세를 통하여 계속되었다. 민족시조인 단군에 대한 숭앙은 태조 원년(1392) 8월에 처음으로 단군의 제사를 지내면서 시작되었다. 단군에 대한 제사는 태종 12년(1412) 평양의 기자묘에 合祀(主祀는 기자, 從祀는 단군)하면서 제도화되었고, 세종 11년(1429) 평양에 단군 사당을 별립하고 단군을 주사로 받들며 신위명도 종래의「朝鮮侯壇君之位」를「조선단군지위」로 고치면서 정비하였다. 세조 2년에 다시「조선단군지위」를「조선시조단군지위」로 고치고, 동시에「후조선시조지위」와「고구려시조지위」를「후조선시조기자지위」와「고구려시조동명왕지위」로 각각 고쳤다.261)金泰永,<朝鮮初期 祀典의 成立에 對하여-國家意識의 變遷을 中心으로->(≪歷史學報≫58, 1973), 109∼134쪽. 또 세조 4년에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까지를 통관하는 최초의 통사인≪東國通監≫의 편찬이 시작되어 단군이 민족시조임을 역사적으로 천명하였다. 이리하여 세조대에는 조선은 중국의 제후국이 아니고 중국과 대등한 천자국이며, 중국과 같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국가라는 민족·국가의식이 고양되었다.

 세조대에는 세조가 왕권의 보호를 위하여 유교와 유신을 억압하고, 불교를 숭신하였기 때문에 유교정신이 쇠퇴하였고 유교정치의 발전이 둔화되었다.

 그러나 왕권이 안정되고 치국을 위한 유학자 양성이 요청됨에 따라 유학이 진흥되고 역사편찬이 행해졌으며, 각 분야의 편찬사업이 활발히 추진되었다. 세조 2년에 집현전을 혁거하고 경연을 정지함에 따라 유교정신이 크게 쇠미해졌으나 이 시기에도 집현전에 장치된 서적을 예문관으로 옮겨 관장하게 하였다. 세조 3년부터는 유생을 친강하였으며, 세조 5년에는 李永垠·鄭孝常·金宗直 등 문신 10여 명을 閑官으로 삼아 독서에 전념하게 하였다. 세조 중기 이후에는 치국을 위한 유신 양성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유학이 진흥하였다. 세조 10년에 兼藝文館職制를 실시하여 李淑瑊·李陸 등 18명의 문신을 겸예문관직에 제수하여 유학에 전념시켰다. 한편 세종 이래의 집현전출신 관인은 일부가 단종복위사건으로 복주되거나 은거하였을 뿐, 대다수는 세조의 우대를 받아 고위관직에 오르면서 정치력을 상당히 발휘하였다.262)집현전출신으로서 세조대까지 생존하며 사관한 인물은 정인지 등 40여 명이었는데, 이 중 정인지 등 33명이 재상에까지 올랐고, 정인지 등 10명이 공신에 책록되었다. 그 인물과 세조대에 역임한 최고관직에 대해서는 崔承熙,<雨班儒敎政治의 進展)(≪한국사≫9, 국사편찬위원회, 1973), 131∼132쪽과 鄭杜熙, 앞의 책, 129∼132쪽<표 3-1>참조. 이리하여 세조대에는 정치·윤리·역사·역학·윤리 등 여러 분야의 많은 서적이 편찬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학진흥과 많은 유학자의 양성에도 불구하고 세조의 유학과 유신에 대한 인식은, 동왕 12년에 유생들의 경서를 강경할 때 공자와 맹자의 인물됨을 논하는 중에 丘從直이 “맹자는 현인이 아니다”라고 하고 金宗蓮이 “주자의 말에도 틀린 점이 있다”고 하였듯이263)≪世祖實錄≫권 38, 세조 12년 4월 을묘 및 권 39, 세조 12년 8월 무진. 세조초와 큰 차이가 없었다.

 세조는 세종 29년에 모후인 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해≪釋譜詳節≫을 지은 바 있고, 즉위와 함께 승려의 권익을 옹호하고 사찰을 중수·신축하였으며, 각종 불경을 간행하는 등 불교를 숭상하였다. 승려를 심문할 때는 반드시 왕의 사전 허가를 받도록 하고, 관속의 사찰침입을 엄금하였다. 度僧을 選試하는 법을 정하여≪경국대전≫에 명기하였다. 세조 5년에는 세종 30년에 혁파된 淨業院을 중창하고, 세조 10년에서 13년에 걸쳐 孝寧大君과 영의정 신숙주 이하 10여 중신에게 명하여 도성내의 興福寺(태조 때 창건) 옛터에 민가 200여 호를 철거하고 圓覺寺를 중창하는 등 10여 개의 사찰을 중창·조성·수리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세조 4년에는 해인사에 소장된≪大藏經≫50질을 간행하여 명산대찰에 분장하였다. 세조 7년에 刊經都監을 설치하고 信眉·守眉·弘濬·學祖·學悅 등 고승과 尹師路·黃守身·金守溫·韓繼禧 등 유신들에게 명하여≪楞嚴經≫(8년)·≪法華經≫(9년)·≪金剛經≫(10년)·≪圓覺經≫(11년) 등을 국역하였다. 또 세조 13년 원각사 중창 후의 경찬회에서 外護僧 2만 명에게 飯僧을 행하고, 왕과 왕세자의 祝壽齋와 기병을 위한 孔雀齋, 왕세자나 전몰자의 명복을 비는 水陸齋, 기우제 등 큰 불사를 빈번히 개최하였다.264)韓㳓劤,≪儒敎政治와 佛敎≫(一潮閣, 1993), 208∼226쪽. 이리하여 지금까지 억불정책에 밀려 쇠퇴하였던 불교가 크게 융성하였다.

 세조대에 편찬된 서적은 역사서로는≪文宗實錄≫(원년, 정인지 등 찬),≪國朝寶鑑≫(3년, 신숙주·권람 등 찬),≪동국통감≫(4년∼, 미완)이 있었다. 유교경서로는≪易學啓蒙要解≫(11년, 세조)가 있고, 유교윤리의례서로는≪世宗朝詳定儀註≫(2년),≪五倫錄)(11년, 양성지)이 있다. 정치서로는≪貞觀政要註≫(원년, 세조),≪국조보감≫,≪訓辭(十章)≫(4년, 세조),≪功臣誡鑑≫(원년, 정인지)이 있고, 병서관계서로는≪五衛陣法≫(문종 2년, 세조),≪武經七書註解≫(단종 즉위년, 세조),≪兵將圖說≫(원년, 세조 찬),≪歷代兵要≫(2년, 이석형 등 편),≪兵將說≫(2년, 세조찬, 신숙주 주해),≪兵政≫(5년, 신숙주 등 찬),≪兵鏡≫(7년, 세조),≪兵書大旨≫(11년, 세조)가 있다. 또≪易學啓蒙圖解≫·≪周易口訣≫·≪大明律直解≫, 예문관의 장서와 태조·태종·세종·문종의 어제시문을 편집하여 발간하였다.

 세조의 왕권강화책은 세조 12년(1466)까지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이에 보법과 직전제가 실시되고, 중앙과 지방의 정치·군사제도도 정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왕권강화와 부국강병책을 실행하기 위하여 실시한 직전법과 보법의 여파로 중앙관료는 경제력이 취약해졌고, 일반 양인과 같이 군역을 지게 되었다. 지방세력가들은 군역의 부담이 크게 늘어났고, 일반농민도 가족질서가 파괴되고 지세 등의 부담이 증가되었다. 이에 따라 중앙관인·지방세력가는 물론 농민도 정부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되었다.

 관료와 지방세력가는 세조의 왕권이 강력할 때에는 불만을 표면화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세조 12년 이후에 세조의 신병으로 왕세자가 代理聽政하고, 한명회 등이 원상으로서 정치를 주도하게 됨에 따른 왕권의 동요와 함께 이들의 불만이 서서히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중앙의 관인들도 불만을 가졌지만, 특히 지방세력가의 반발이 강력하였다. 세조 10년경부터 지방세력가는 반자치적인 성격을 가진 留鄕所를 중심으로 저항하였는데, 토착세력이 강한 충주·청주지방과 함길도지방이 심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세조 13년 5월에 李施愛亂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시애는 祖 原京과 父 仁和가 僉節制使·檢校門下府事와 判永興大都護府使·첨절제사를 역임한 길주지방의 토호로서, 세조 4년 慶興鎭兵馬節制使가 되고 이후 行知中樞府事와 判會寧府事를 역임하면서 함길도의 대표적인 세력가가 되었다. 함길도는 조선의 발흥지이고 북방 야인지역과 접한 관계로 지방관은 그 곳 호족 중에서 임명하여 대대로 다스리게 하였고, 남방민을 이주시켜 방어를 도모하였다. 그런데 세조대에는 중앙집권을 강화하여 북도 출신의 수령을 점차 줄이고 서울에서 관리를 파견하였는데, 특히 난이 일어나기 직전에 함길도병마절도사인 康孝文과 그 당여가 불법·탐학을 자행하여 민중의 원성이 높았다. 또 전국적으로 실시된 호패법과 보법으로 군정이 搜括되고, 군역의 부담이 증대되었으므로 함길도의 세력가와 민중 모두 중앙정부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조 13년 4월 이시애는 동생 施合·매부 李明孝 등과 함께 “하3도 군병들이 수륙으로 함길도로 진격하고 있다. … 조정에서 평안도와 황해도 병사를 보내어 雪寒嶺으로부터 북도에 들어와 장차 본도 사람을 모두 죽이려 한다”265)≪世祖實錄≫권 42, 세조 13년 5월 경진.는 말로 민중을 선동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길주에 와 있던 절도사 강효문과 길주목사 薛丁新, 부령부사 金益壽 등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을 모두 살해하고, 조정에 대해서는 “강효문이 한명회·신숙주 등의 중신과 결탁하여 모반하려 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먼저 죽였다”266)위와 같음.고 하면서 거병의 정당함을 주장하였다. 이후 이시애는 도내 각지의 유향소 토호들과 농민들의 호응을 받으면서 端川·北靑·洪原으로 진격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을 모두 죽였다. 또 스스로 왕명을 받은 절도사라 칭하면서 함흥을 점령하고, 함길도관찰사 申㴐을 죽이고 體察使 尹子雲을 사로잡는 등 삽시간에 함흥 이북지역을 석권하였다.

 조정에서는 구성군 준을 함길·강원·평안·황해도 도총사, 호판 曹錫文을 부총사, 허종을 함길도절도사, 강순·어유소·남이 등을 대장으로 삼아 3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반군을 진압케 하였다. 처음에는 반란이 기세를 떨치고, 조정내부에서도 반란군이 한명회·신숙주 등 중신들이 자신들과 내응하고 있다고 한 이간책에 말려들어 이들을 하옥시키는 등 차질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관군은 먼저 반군의 고립을 도모하고 반란지역 주민들을 회유하여 반군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어 동년 8월에 홍원·북청·利原 등지의 싸움에서 반군을 대파하고 이시애 형제를 체포·참수함으로써 난을 진압하였다.267)이상 이시애란에 대해서는 金相五,<李施愛亂에 對하여(上·下)>(≪全北史學≫2·3, 1978·1979) 참조.

 이 난이 진압된 후 조정은 반군토벌에 공을 세운 구성군 준·조석문 등 45인을 敵愾功臣에 책봉하였다.268)적개공신에 대해서는 鄭杜熙, 앞의 책, 222∼231쪽 참조. 지방반란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전국의 유향소를 폐지하고, 함길도를 남북으로 양분하여 통제를 강화하였다. 한편 정치운영에 있어서도 적개공신을 중용하여 세조집권 이래로 정치력이 컸던 한명회 등 정난·좌익공신세력을 견제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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