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이 19세로 계위하였을 때 모후인 정희왕후가 섭정을 하고, 한명회·신숙주 등의 원상이 중심이 된 정치가 행해졌다. 그러나 예종은 세조 12년(1466) 이래의 대리청정한 경험을 토대로 왕권을 강화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국정운영을 모색하였다.
예종은 원로대신을 견제하고, 대간을 억압하면서 왕권강화를 도모하였다. 즉위와 함께 판병조사를 폐지하면서 친정체제를 강화하고,272)≪睿宗實錄≫권 1, 예종 즉위년 10월 을사.
≪成宗實錄≫권 1, 성종 즉위년 12월 기유. 재상가를 감시하여 신숙주·김질·구성군 준·朴仲善·成任에게 奔競하는 자를 적발하게 하였다. 또 왕권에 저촉되는 대간활동을 억압하고,273)≪睿宗實錄≫권 4, 예증 원년 윤 2월 갑자·을축·병인 및 3월 을미. 과전수급자가 전조를 규정 이상으로 걷을 경우 佃夫로 하여금 고소하게 하고 전조원액과 濫收額을 몰수하는 등 전조남수를 금지하여 수조권자를 제약하였다.
그러나 예종의 왕권강화책은 정희왕후와 원상 등을 중심으로 한 국정운영 및 남이옥사로 인한 원로대신의 세력 강화로 인해 어려움을 겪다가 재위 1년 만에 훙서하면서 좌절되었다. 분경을 적발하였어도 이에 대한 원로대신들의 반발로 분경자를 처벌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이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 하여 대간을 힐책하였다. 남이의 옥사가 일어나면서 왕권강화보다는 오히려 왕권의 안정을 위해 원로대신을 우용해야 했다. 남이는 태종의 외증손으로서 세조 6년과 12년에 무과와 발영시에 급제하였고, 세조 13년에 이시애란 토벌에 공헌을 세우고 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적개 1등공신에 책록되고 곧이어 동지중추와 工曹判書兼五衛都摠管에 제수되더니, 이듬해에는 24세의 나
이로 일약 병조판서에 발탁되는 등 위명을 떨쳤다. 남이는 이미 세조에게 구성군 준을 중용하지 말 것을 청한 바도 있지만, 예종이 즉위한 후에는 예종의 왕권강화 방침에 호응하여 훈신들을 비판하였다.274)鄭杜熙, 앞의 책, 237쪽. 이러한 남이에 대하여 한명회 등 세조초 이래의 훈신들이 크게 분노하였고, 반면에 예종은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기에 급급하였던 만큼 남이를 옹호할 입장이 되지 못하였다. 예종 원년 8월 남이가 역모를 꾀한다는 柳子光의 고변을 계기로 남이옥사가 야기되고,275)崔永浩,<「南怡(1441∼1468)의 獄」再考>(≪高柄翊先生回甲紀念 史學論叢≫韓國史篇-歷史와 人間의 對應-, 한울, 1985), 132∼136쪽. 그 결과 당사자인 남이는 물론 영의정 강순·鄭崇魯 등 적개공신인 무인이 대거 제거당하였다. 남이옥사를 주도한 한명회 등 원로대신은 거의 翊戴功臣에 책록되어276)익대공신은 다음과 같다(1은 정난, 2는 좌익, 3은 적개공신≪睿宗實錄≫).
1등(5명);유자광 3, 신숙주 1·2, 한명회 1·2, 申雲, 韓繼純.
2등(10명);밀성군 침, 德源君 曙, 영순군 부 3, 구성군 준 3, 沈澮, 박원형 2, 하성군 정현조, 居平君 復, 李克增, 박지번 2.
3등(24명);정인지 1·2, 정창손 2, 조석문 2·3, 韓伯倫, 盧思愼, 박중선 3, 洪應, 강곤 1, 조득림 2, 愼承善, 權瑊, 魚世謙, 尹繼謙, 鄭孝常, 權攢, 趙益貞, 安仲敬, 徐敬生, 金孝江, 李存命, 柳漢, 韓繼禧, 姜希孟, 李存. 그 지위와 영향력이 증대되었다. 따라서 예종이 사초를 개서한 閔粹를 문초하면서 “대신은 두렵고 왕은 두렵지 않느냐”277)≪睿宗實錄≫권 5, 예종 원년 4월 정축.고 묻고 있듯이 예종이 의도한 왕권강화는 실현될 수 없었다.
예종대에는≪경국대전≫의 개수와 함께 정치·군사제도가 부분적으로 개정되었다. 예종 원년(1469)에 한성부의 판사를 判尹, 윤을 좌·우윤, 소윤을 庶尹으로 각각 개칭하고 參軍을 3인으로 증치하였으며, 개성(부윤)부를 유수부로 승격하고 경관으로 편입하였다. 예종 원년 5월과 9월의 2차에 걸쳐 군제를 개편하면서 의흥위에 갑사·보충대, 용양위에 별시위·대졸, 호분위에 족친위·친군위·팽배, 충좌위에 충의위·충찬위·파적위, 충무위에 충순위·정병·장용위를 각각 분속하였다.278)千寬宇,≪近世朝鮮史硏究≫(一潮閣, 1979), 76쪽<표 D>. 이로써 세조 3년에 성립된 5위제도의 25부에 소속된 군대의 수가 병종별로 소속되어 고르지 못하였고, 세조 5년에 시위패가 개칭된 정병이 5위에 소속되지 못한 것 등이 시정되면서 5위체제가 정립되었다. 이것이 당시의≪경국대전≫에 반영되었다가 법제화되었다.
또 즉위와 함께 세조대에 정지된 경연을 개설하였으며, 3포에서의 왜와의사무역을 금지하고, 각 도·각 읍에 있는 둔전을 일반 농민이 경작하는 것을 허락하여 민생을 도왔다.≪天下圖≫와≪武定寶鑑≫(신숙주 등)을 편찬하였고, 세조대의 숭불정책을 계승하여 낙산사를 중건하고 봉선사를 조성하였으며, 세조의 명복을 위한 金泥寫經과 기재·공불반승 등 각종 불사를 설행하였다.279)韓㳓劤, 앞의 책, 280∼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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