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4. 4군 6진의 개척
  • 2) 압록강 중상류방면 영토개척
  • (1) 압록강 상류유역의 개척과 4군의 설치

(1) 압록강 상류유역의 개척과 4군의 설치

 압록강 상류유역은 공민왕대에 강계만호부가 설치되고, 공양왕 3년 甲州에 만호부를 둔 이래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이 방면의 개척이 크게 진척되었다. 그러나 강계만호부 이동 갑산만호부 이서의 압록강 상류 이남지역은 여진족의 활동무대가 되어 있었다. 서북방면 영토개척의 전초기지를 이루었던 강계와 갑산에 대해 살펴보면, 江界都護府는 공민왕 10년(1361)에 禿魯江萬戶라 칭하고 동왕 18년에 강계만호부를 두었다. 또 鎭邊·鎭成·鎭安·鎭寧의 4군을 설치하고 上副千戶를 보내어 그곳을 관장하게 하였다. 태조 3년(1394)에 만호를 바꾸어 都兵馬使를 설치했다. 태종 원년(1401)에 立石과 古哈怪 등지의 땅을 합쳐서 1개 주를 만들어 石州라 하였다가 동왕 3년에 江界府로 승격시켰으며, 동왕 13년에는 통례대로 都護府로 고쳤다.307)≪世宗實錄地理志≫·≪新增東國輿地勝覽≫·≪輿地圖書≫등의 강계도호부조를 종합함. 고려말에 강계도호부에 군사중심지를 두고 진변·진성·진안·진녕의 군사체계에 의해 관할하였는데 이들은 점차 행정적 지역단위로 이행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태종 원년에 설치되었다고 하는 석주는≪太宗實錄≫에서는 昌城郡·理州 등과 함께 태종 2년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고 되어 있다.

처음으로 창성군·석주·이주를 설치했다. 의정부가 受判하기를, 泥城道右翼에 속하는 泥城伊彦·昌州·碧團·陰童·大小波兒·亏農庫 등 각처 伊彦을 합쳐 1개 주를 만들어 昌城郡이라 호칭하고, 右翼團練使가 이를 겸하게 했다. 江界道中翼에 속하는 立石·古哈外怪 등 각처 이언을 합쳐 1개 주를 만들어 石州라 호칭하고 中翼團練使가 이를 겸하게 했다. (강계도) 우익에 속하는 豆木里·山羊會·都乙漢·烽火臺 등처 이언을 합쳐 1개 주로 만들어 理州라 호칭하고 우익단련사가 이를 겸하게 하였다(≪太宗實錄≫권 2, 태종 2년 4월 정축).

 석주는 강계만호부 인근지역의 입석·고합·외괴(흑은 夞怪) 등의 伊彦을 합친 것이었다. 이언이라는 것은 하나의 작은 지역단위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리하여 석주는 태종 3년에 강계부로 승격되었으며, 그 사이에 치소도 滿浦鎭 부근으로부터 지금의 강계로 옮겨진 것으로 짐작된다.308)李仁榮,<廢四郡地理考>(≪韓國滿洲關係史의 硏究≫, 乙酉文化社, 1954).

 창성군은 니성·창주·벽단·음동·대소파아·오농고 등의 이언을 합친 것이었고, 이주도 두목리·산양회·도을한·봉화대 등의 이언을 합친 것이었다. 이로써 보면 이들 지역은 압록강 중류 연안에 위치하는 지역들인데, 이언이라는 지역단위를 묶어 보다 체계적인 행정단위로 파악하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행정단위로서 창성군·석주·이주를 설치하고, 군사명령체계로서 창성군은 泥城道左翼團練使가, 석주는 江界道中翼團練使가, 이주는 江界道右翼團練使가 겸하게 하였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태종 3년 6월에는 창성군의 벽단과 음동을 합하여 碧潼郡을 설치하였다. 이는 행정체계의 정비로 해석된다.

 갑주는 본래 虛川府인데, 오랫동안 胡人들이 차지하고 있으면서 여러 차례병화를 일으켜 거주자가 없었다. 그러다가 공양왕 3년(1391)에 처음으로 甲州萬戶府를 설치하였고,309)≪世宗實錄地理志≫권 155, 咸吉道 甲山郡. 태조 2년(1393)에 동북면안무사 李之蘭이 축성하였으며, 그 뒤 태조 6년 도선무순찰사 鄭道傳이 동북면의 州府郡縣의 경계를 정할 때 갑주의 행정구역도 정비하였다. 다시 태종 13년(1413)에 갑주만호부를갑산군으로 개칭하고, 같은 시기에 강계부도 강계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이렇게 보면, 서북방면 영토개척의 상한선은 마치 강계와 갑산을 잇는 선인 것처럼 파악하기 쉽다. 그러나 갑산부 이서 압록강 상류 이남지역은 행정단위로서는 함길도 갑산군 閭延村이었는데, 갑산군과는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태종 16년에 小薰頭 이서지역을 Ep어서 閭延으로 하고310)≪太宗實錄≫권 32, 태종 16년 7월 갑인. 태종 17년 함길도에서 평안도로 옮겨 강계도호부에 소속시켰다.311)≪世宗實錄地理志≫권 154, 平安道 閭延郡.
≪太宗實錄≫권 33, 태종 17년 5월 무술.
그렇다면 이미 태종대 이전에 압록강 상류 이남에까지 진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태종대에 압록강 연변과312)≪太宗實錄≫권 35, 태종 18년 3월 무오. 그 상류 이남의 군사적 관할은 다음과 같이 강계부를 중심으로 중익 및 우익단련사에 연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理山·閭延은 江界道에서
  江邊防禦緊要處┼昌城·碧潼은 朔州道에서
         └麟山·龍川은 義州道에서
  江界道中翼─石州(뒤에 江界府)·閭延郡313)당시의 閭延郡의 관할 범위는 虞芮口子(뒤에 虞芮郡으로 분리되어 승격)·上無路堡(뒤에 茂昌郡으로 분리되어 승격)·慈作里(뒤에 慈城郡으로 분리되어 승격) 등이었다.
     右翼─理州

 그러나 지금의 중강진 부근에 설치된 여연군(현 慈城郡 閭延面 下長洞)은 압록강 건너편에 살던 여진족이 조선을 침입하여 살상하는 일이 잦아짐에 따라,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한 실정이었다. 이리하여 세종 13년(1431)에는 여진의 침입을 자주 받는 여연에 석성을 쌓는 등 방비를 한층 튼튼히 하였지만, 방비체제상 강계와 여연(여연-자작리, 여연-우예구자, 여연-상무로보 등)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이 무렵 압록강의 큰 지류인 婆猪江(佟佳江;渾江) 방면으로 남하 이주하여 온 兀良哈[오랑캐]族이 李滿住를 추장으로 하여 建州本衛를 세우고 요동지방을 자주 노략질하였다. 그 軍民으로서 조선으로 도피하는 자가 세종 5년 이후 560여 명에 달하여 이들을 모두 명으로 쇄환했더니, 여진은 이에 대한 원한을 품고 조선에 침입하였다. 세종 14년 12월에도 이만주가 400여 기를 거느리고 여연의 서남부로 침입하여 많은 군민을 살해하고, 남녀 인민과 우마·재산 등을 노략질해 갔다.

 이만주의 내침은 조선이 건주위를 정벌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거니와 慈城郡 설치의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세종 15년 3월에 조선정부는 崔閏(潤)德을 평안도도체찰사로, 金孝誠을 도진무로 삼아 황해·평안 양도의 병력 15,500여 명으로 이를 정벌케 하였다. 최윤덕의 군대는 압록강을 건너 여진 땅으로 깊숙히 들어가 200여 명을 사로잡고, 170여 명을 척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314)宋炳基,<東北·西北界의 收復>(≪한국사≫9, 국사편찬위원회, 1973), 164쪽.

 그러나 이 지역은 여연·강계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위급할 때에 대비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세종 15년 6월 여연과 강계 사이의 요충지인 慈作里(현 慈城)에 성을 쌓고 따로 군읍을 설치하여 자성이라 이름하고, 여연의 남촌과 강계부 북촌의 민호를 떼어 붙이고 강계부 중익에 소속시켰다.315)≪世宗實錄地理志≫권 154, 平安道 慈城郡.
≪世宗實錄≫권 60, 세종 15년 6월 임오.
나아가 북방개척 영토의 내실 있는 경영을 위해서 여연군을 府로 승격시키고 진을 설치하였다. 이것은 여연군이 요해지에 해당하지만, 거주자가 적으므로 장차 민호를 이곳으로 이주시키고자 한 때문이다.316)≪世宗實錄≫권 69, 세종 17년 8월 경자.

 그 뒤에도 이 방면에는 여진족의 내습이 빈번하였다. 그 중에서도 趙明干口子(현 자성군 長上面 長城洞)를 끼고 흐르는 압록강은 물굽이의 굴곡이 심하여 斗入地를 형성하였기 때문에 적의 기습을 받기 쉬웠고, 虞芮堡(현 土城洞)나 下無路堡(현 胡芮)와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방수가 매우 곤란하였다. 때문에 평안도관찰사·절제사 등은 조명간구자의 戌兵을 파하여 우예·하무로보의 선으로 철퇴할 것을 청하였고, 조정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신하들이 적지 않았다. 이처럼 변경관리 방책이 확정되지 못하자, 세종은 “조종의 강역은 마땅히 삼가 지킬 것이지, 가볍게 퇴축할 수 없다. 이제 趙明干을 퇴축한다고 하면, 沿邊口子도 반드시 이를 원용하여 퇴축코자 할 것이니 그 폐단은 금하기 어려울 것”317)≪世宗實錄≫권 76, 세종 19년 2월 임술.이라 하여 퇴축론을 일축하고, 조명간을 유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책을 강구하였다.

 적극적인 대응방안으로, 우선 평안도 도절제사 李蕆으로 하여금 병력 8,000명으로 재차 여진족을 정벌케 하였다. 세종 19년 9월에 이천이 이끄는 군사는 3로로 나뉘어 이산·강계 등지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兀刺山城(懷仁縣;현 五女山)·五彌府(현 懷仁縣) 등의 여진 소굴을 공략하였다. 소극적으로는 이 외에도 城堡를 石堡로 개축하는 한편, 만호를 쁩아 파견한다든지 군마 150필을 추가하고, 민호 50호를 성보에 들이고 방비를 건실하게 하였다. 조명간에서 가장 가까운 성보는 우예보인데, 閭延府治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이곳에 읍을 설치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우예군의 설치 배경을 좀더 부연한다면, 본래는 여연군 虞芮口子로서 처음에는 만호를 설치하여 방수했다. 그러나 여연군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세종 25년(1443)에 여연군의 楡坡·조명간·소우예 및 자성군의 泰日등지의 민호를 떼어 우예군을 설치하고, 강계부의 소속으로 삼았다.318)≪世宗實錄地理志≫권 154, 平安道 虞芮郡.
≪世宗實錄≫권 101, 세종 25년 8월 무신.
이리하여 여연과 강계 사이에는 자성과 우예의 2군이 설치되어 북방개척을 위한 효율적인 영토 관할체계가 갖추어지고 있었다.

 한편 여연과 갑산을 잇는 압록강 상류 연변은 관할하기에 거리가 너무 멀어 비록 적변이 있다 하더라도 구원이 미치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뿐 아니라 三水로부터 無路의 땅까지는 지대가 높고 험하고 척박해서 농사를 지을 수가 없기 때문에 민호가 살 만한 곳이 못되었다. 그러므로 읍을 설치하느니보다 삼수 이하를 여연군에 떼어 붙이고 그대로 구자를 설치하고 목책을 배설해서 강에 얼음이 얼 때 나가 지키는 것이 어떠냐는 논의도 있었다.319)≪世宗實錄≫권 66, 세종 16년 12월 무오.

 세종 16, 17년 경부터 여연과 갑산의 중간 지점에 읍을 설치하여야 한다는의논도 제기되었다. 후보지는 여연군 동쪽 압록강 연안의 上無路堡(현 厚昌郡東新面 河山堡)였다. 상무로보는 본래 여연군 소관이었으나 여연과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성원이 미치지 못하였다. 세종 21년에는 石堡를 쌓고, 다음해에 여연의 孫梁·厚州 등지의 민호를 떼어 현을 설치하여 茂昌이라 하였다.320)≪世宗實錄地理志≫권 154, 平安道 茂昌郡. 이어 세종 24년에 군으로 승격되었고 강계부중익에 소속되었다.

 이와 같이 압록강 상류연안의 영토개척과 그 관할 체계는 태종 16년 여연군 설치로 비롯되어 세종 15년에 자성군, 세종 24년에 무창군, 세종 25년 우예군을 설치함으로써 완성을 보게 되어 무릇 27년이 소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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