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4. 4군 6진의 개척
  • 3) 두만강 하류방면 영토개척
  • (2) 6진의 설치와 국경선의 획정

(2) 6진의 설치와 국경선의 획정

 태조는 원년(1392)에 아들 芳遠(뒤에 태종)을 孔州(현 慶興 남쪽 古邑)로 보내 德陵(穆祖陵)과 安陵(穆祖妃 李氏陵)을 조성하고, 이듬해 8월에는 동북면안무사 이지란을341)李之蘭은 胡拔都의 동북면 침입과 거의 같은 시기의 女眞酋長 중의 하나인데, 그가 거느린 가호가 500여 호나 되어 전체의 반수를 차지할 만큼 세력이 막강하였다. 당시 이성계 역시 家別抄를 500가나 소유하고 있었다. 세력 분포상 이성계와 이지란의 결합은 동북면 일대를 제패하기에 충분하였다. 따라서 이성계의 동북면일대에서의 세력기반 구축은 이지란과의 결합과 불가분의 관계였다고 하겠다. 보내 갑주와 공주에 성을 쌓아 진무토록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군사지역인 동북면에 있는 민호의 안정을 위한 군사시설의 충실을 기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지란이 갑주와 공주에 축성한 지 5년 뒤인 태조 7년에는 동북면의 군사적 행정적 체계와 관할구역이 획정되었다. 즉 주·부·군·현의 지역경계를 정하기 1년 전에 東北面都宣撫巡察使 鄭道傳을 동북면에 보내어 소위 便民條劃을 살펴 보고토록 하였다. 주요 보고내용은 城堡를 개축하여 주민을 안정케 한다든지, 站戶를 적절히 설치하여 왕래에 편하게 한다든지, 주군의 경계를 구획하여 분쟁을 없앤다든지, 군민의 호칭을 정연하게 하여 등급을 정해 준다는 것 등이었다.342)≪太祖實錄≫권 12, 태조 6년 12월 경자. 이 보고에 근거하여 태조 6년 2월에 주부군현의 이름을 분정하였다. 안변 이북, 청주(북청) 이남은 永興道라 칭하고, 端州(端川) 이북, 공주 이남은 吉州道라 칭하며, 동북면도순문찰리사가 이를 통괄하였다. 또 단주 이북의 주부군현 및 站路의 명칭을 정하고 관리를 배정하였다.343)≪太祖實錄≫권 12, 태조 6년 12월 경자 및 권 13, 태조 7년 2월 경진.

 그리하여 공주의 옛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고 경원도호부로 승격시켰으며 같은 해에 처음으로 鏡城郡을 설치하고 만호를 두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흔히 두만강 하류의 6진 개척사상 최초의 관방이라고 부르고 있다. 즉 단주이북, 두만강 이남의 군사지역에 대하여 명령 체계화를 시도한 조치로 생각되며,344)동북면의 통괄 명령체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太祖實錄≫권 13, 태조 7년 2월 경진).
 東北面都巡問察理使─永興道
          └吉州道─吉州牧(官)
              └端 州
              └鏡城郡
              └慶源府
              └靑州府
              └甲 州
경성 이북, 경원 이남 지역을 하나의 군사지역 단위로 형성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조선 초기 동북지방의 영토 개척은 명실공히 두만강안에까지 미쳤다.

 구체적으로 輸城 이북의 땅을 경원부에 예속시켜 삭방도 관하에 두게 한 일이라든지, 단주 이북의 군량 1,000석을 경원으로 이송하고, 두만강에 병선 10여 척을 정박케 한다든지 하는 일련의 조처는 두만강 연안에 최초로 관방시설을 갖춘 것으로, 동북지방의 변방 경계에 존재하는 군사지역의 설정이라 할 것이다. 당시의 직관을 보더라도 慶源等處兵馬使 겸 경원부사는 변계의 군사책임자임을 알 수 있다.345)≪太宗實錄≫권 16, 태종 8년 7월 을묘.

 따라서 두만강안까지 개척한 사실은 조선·명·여진의 상호관계 속에서 살펴야 한다. 하지만 이들 관계가 안정세를 이룰 때까지는 명과 조선이 여진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고, 이에 남만주지역에 산거하던 여진족들의 이동과 변화가 무상하였다.

 가령 조선에 귀순·복속하였던 동북지방의 여진족은 태종대에 들어와서 점차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즉 태종 9년(1409)에 貝州(현 寧古塔지방) 지방으로부터 남하한 嫌眞兀狄哈[혐진우디캐]족이 경원 동쪽의 蘇多老(所多老)에 침입하였고, 이듬해 2월에 우디캐와 그 동류인 葛多介 등이 오도리족·오랑캐족과 합세하여 경원부를 재침함으로써 병마사 韓興寶를 비롯하여 15명이 전사한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東北面察理使 趙涓은 태종의 명에 따라 길주를 출발, 우디캐를 추격하여 豆門(土門;현 慶源의 북쪽 江外의 땅)에 이르렀으나 그들이 이미 멀리 퇴각한 상황이었으므로 우디캐와 함께 내침하였던 오랑캐의 추장급 4명과 관하군병 160여 명을 잡아죽이고 개선하였다.

 조연의 토문 정벌은 동북지방 여진족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그들은 그 뒤에도 각 부 연합으로 경원을 자주 내습해 왔다. 태종 10년 4월에 오랑캐의 遺種이 오도리와 협력하여 步騎 150여로 경원부 雍丘站에 침입하였고, 같은 달에 혐진우디캐·오도리·오랑캐 족이 연합하여 경원부 아오지(현 古阿吾知堡)로 침입하였다. 이 때 경원병마사 郭承祐는 대패하여 전사하였다.

 곽승우의 패전을 계기로 조정은 攻守가 곤란하다는 점을 들어 공주의 덕릉과 안릉을 함주로 옮기고, 민호를 이사시켰으며 경원부를 경성에 합속시켜 경성으로 僑置하였다.346)태종 10년 8월에 경원부를 所多老營基로부터 경성으로 僑置하고, 덕릉과 안릉을 함주로 遷葬한 후에도 경원병마사는 존재했다. 그 이듬해 3월에 이르러 이를 招喚하고 罷鎭했으므로, 이 때 경원부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경원부 땅은 비게 되었고, 이후 얼마 동안 경성이 야인 방어의 전초기지 역할을 담당하게 되어 龍城(현 輸城;古鏡城을말함)에 목책을 설치하여 경성의 전위로 삼아 왔다. 그리하여 태종 14년에는 영길도도순문사에게 교지를 내려 길주 이남 병마가 경성 赴鎭 때문에 길도 막히고 곤욕도 당하므로 길주 北村 朱禾嶺을 경계로 경성에 옮기도록 하였다.347)≪太宗實錄≫권 28, 태종 14년 8월 계축. 이는 명실공히 경성의 전초기지로서의 중요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후 태종 17년에는 용성 목책을 석성으로 개축하여 방비를 굳건히 하고, 경성 豆籠耳峴 이북을 떼어 富家站(현 富居)에 경원도호부를 다시 설치하였다. 따라서 富寧(본래는 경성군 石幕上平을 말함) 石幕 이북은 여진인에게 내맡겨지는 셈이 되었고, 경성 이북, 부령 이남은 군사지역의 최전방이 되었다.

 이 해에 명은 여진족을 회유할 목적으로 건주위에 僧綱司를 설치하여 여진승려를 都綱으로 삼는 한편, 內官 張信을 백두산에 보내어 사원을 창건케 하였다. 장신을 비롯한 많은 군병들은 이 해 3월말에 요동으로부터 羅延에 이르러 목책을 설치하고 창고를 만들어 양식을 저장하였으며, 농사를 준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南羅耳에 사원을 창건하기 시작하였다.348)池內宏,<朝鮮の東北境と女眞との關係(二)>(≪滿鮮地理歷史報告≫4, 1918).

 이러한 보고에 접한 조정에서는 명이 孔州에 衛를 설치하여 그 지방을 약취하려고 한다고 판단하고, 이 해 8월에 함길도안무사 李之實에게 명하여 경원부를 다시 옛 땅(공주)에 설치케 하고, 부가참에 목책을 설치해서 중계지로 삼게 하였다. 이리하여 옛 경원의 성터를 修葺하고 이민을 추진하기도 하였지만 끝내 그 실현을 보지는 못하였다.349)宋炳基, 앞의 글, 155쪽. 세종 3, 4년경에는 府治를 부거로 물러서 배치하였다. 이는 명에서 파견한 장신 일행의 거동이 옛 경원의 약취에 있지 않다는 확신에서 취해진 조처로 생각된다.

 경원부를 부거로 이동한 지 얼마 안되어 다시금 여진족의 침입이 잦아졌다. 세종 4년 9월에 혐진우디캐 100여 명이 경원부 阿山과 高郎岐에 침입하였고, 같은 해 10월에 오랑캐 200여 명이 경원부 釜回還에, 다시 세종 6년 5월에는 혐진우디캐 100여 명이 아산에, 같은 해 9월에는 300여 명이 고랑기에 침입하였다.

 이처럼 경원부 주변지역에 야인의 침입이 끊이지 않게 되자, 세종 8년 이래 조정 신하들 사이에는 경원부를 용성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그러나 영토 경영에 대단히 진취적 의지를 보이고 있던 세종은 조종의 옛 강토를 寸土라고 줄일 수 없다면서 慶源退排論에 찬성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방어지를 전진시키고자 하였다. 여러 해 동안 심의한 결과 세종 14년(1432) 6월에 이르러 경원부의 서쪽 석막(현 부령)에 寧北鎭을 설치하고, 경성을 도호부로 승격시켜 북방 경략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즉 경원부는 그대로 두고 경성군을 석막으로 옮겨 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용성으로부터 雲加衛(委) 大川大路 이동까지는 경원에, 이서는 경성에 속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배치는 阿木河(斡木河;吾音會, 현 會寧) 東良 北狄人들이 오가는 요해로를 차단하는 의미를 갖기도 한다.350)≪世宗實錄≫권 56, 세종 14년 6월 계사.

 그리하여 영북진을 설치한 다음해에 이 지역 여진족들 사이에 커다란 분쟁이 발생하였다. 이를 기화로 세종은 그의 평생의 포부라 할 수 있는 북방영토개척을 과감하게 추진해 갔다. 세종 15년에 吾音會[옴회] 지역에서 우디캐족과 오도리족간에 충돌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 요동의 開陽(현 開原) 지방에 살고 있던 여진족 추장 楊木塔兀은 그 지방관헌이 저지르는 횡포에 반감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개양의 많은 중국인 남녀를 노략하여 옴회로 이동하였다가 뒤에 다시 우디캐들이 살고 있던 貝州(혹은 古州, 현 寧古塔 부근)로 이주하였다. 세종 4, 5년경 명은 사신을 자주 보내어 도망한 양목탑올을 불러 타이르고 被擄人들을 추쇄하였다.

 한편 訓春 오도리에 있는 오도리족 추장 童猛哥帖木兒[퉁멍거티무르]나 그 동생 凡察 등은 조선에 귀순하여 藩倂으로서 자처하였을 뿐 아니라, 명으로부터 建州左衛都督 혹은 都指揮 등의 직함을 받고 있으면서 명사의 피로인 추쇄에 협력해 왔다. 이 때문에 양목탑올로부터 원한을 사게 되었다. 세종 15년 10월에 양목탑올은 우디캐족과 연합하여 약 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옴회로 침입하여, 퉁멍거티무르와 그 아들 權頭(管禿 혹은 管領)를 죽이고 部民을 약탈 도주하였다.351)≪世宗實錄地理志≫권 155, 咸吉道 慶源都護府. 이로써 번속관계를 지켜온 오도리의 세력이 무너지고 옴회는 다시 공허한 지대가 되었다.

 세종은 이와 같은 여진족 내분을 옛 영토를 회복하는 기회로 포착하여 두만강의 천험으로써 강계를 삼고자 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중신회의에서 세종은 석막에 설치한 영북진을 伯顔愁所(현 行營)로 옮기고, 경원부는 두만강 유역으로 옮길 것을 결정하고, 병조에 교지를 내려 合行條件을 실시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병조에서는 새로 옮기는 경원과 영북진에 우선 성벽을 쌓고 토관을 설치하되 본도 민을 추쇄하여 영북진과 경원부에 옮기도록 하였으며, 부거참의 석성(옮기기 전의 경원부)과 석막의 목책(옮기기 전의 영북진)에 군인을 배정하고, 토관과 천호를 시켜 지키게 할 것을352)≪世宗實錄≫권 62, 세종 15년 11월 무술·경자. 보고하여 세종의 승인을 받았다.

 세종이 경원부와 영북진의 군사 핵심지를 북방으로 옳긴 것은 여진족의 분쟁을 기화로 공주지방을 수복함은 물론, 두만강의 천험으로써 강계로 삼고자 한 것이다. 이는 공주지방은 祖宗舊地로서 촌토도 축소시킬 수 없다는 구지수복의식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즉 세종은 군신회의에서 “공주지방은 초목만이 무성하여 胡騎들이 짓밟고 사냥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 이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통절해진다. 옴회는 두만강 남쪽 우리 경계 안에 있어서 耕牧에 적당하고 요충에 알맞은 자리이므로 巨鎭을 합설하여 북문(북쪽의 관문)을 壯하게 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고, 경원부와 영북진을 이설함으로써 “조종의 천험의 봉강을 삼가 지켜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353)위와 같음.

 두만강 하류 유역의 옛 영토에 대한 수복이 결정되자, 세종 15년(1433) 12월에 좌승지 김종서를 함길도도관찰사에 임명하여 이 지방 경영을 맡겼다. 김종서는 세종 22년 12월 형조판서에 임명될 때까지 7년 동안 함길도관찰사로서 혹은 함길도도절제사로서 북방개척에 주력하였다.

 세종 16년 2월, 김종서는 임지에 부임하자 도체찰사 河敬復·부사 沈道源·兵馬節制使 成遠生·경원절제사 宋虎美·영북진절제사 李澄玉 등과 더불어 경원·영북진의 城基布置條件을 장계하였다.354)≪世宗實錄≫권 63, 세종 16년 2월 임술. 당초 세종은 영북진을 옴회로, 경원을 蘇多老로 옮기기로 하고 이를 추진해 왔다. 그러나 막상 성터를 돌아본 김종서의 장계에 접하게 되자, 계획을 변경하여 석막의 영북진을 백안수소에 옮겼다. 그리고 이 해 여름에 따로 회령진을 옴회에 설치하고 영북 본진에서 첨절제사를 뽑아 방어케 했다. 그 해 겨울에 영북부 회령진을 회령도호부로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7월에 회령부로부터 400호를 떼어 영북진을 鍾城郡으로 독립시키고, 경원으로부터 300호를 떼어 孔城縣을 설치하였다.

 한편 세종 16년 부거에 있던 경원부를 會叱家(현 경원)로 옳기고, 공주 古地에는 성을 수축하여 海道萬戶 겸 孔州等處管軍僉節制使를 두고, 200명의 정군을 배치하여 수륙의 방비를 담당케 하였다. 공성현은 세종 19년에 慶興郡으로 승격되었고, 세종 25년에 다시 慶興府가 되었다.

 그 뒤 경원과 종성의 읍치가 강변에서 거리가 너무 멀다 하여 세종 22년 종성군치를 백안수소로부터 愁州(현 종성)로 옮기고, 古城 자리에 도절제사 행영을 두는 한편, 같은 해에 多溫平(현 온성)에 군을 신설하여 穩城郡으로 하고, 경원 및 길주 이남 안변 이북의 각 관 민호로 이를 채웠다.

 종성과 온성에 대한 일련의 조처는 세종 22년 7월 평안, 함길도도체찰사병조판서 皇甫仁의 두만강변 방비에 관한 헌의에 따른 것인데, 이미 설치한 4읍(경원·회령·종성·경흥)과 기타 군사 요충이 되는 곳에 만호를 설치하여 이들과 연결함으로써 두만강변의 방비를 완성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이어 세종 23년 정월 도체찰사 황보인을 함길도로 보내어 종성·회령·온성·경원·경흥 등지에 많은 小堡를 설치하여 방어를 더욱 충실하게 하였다.355)이 때 설치된 堡들은 鍾城-童關·東豊·西豊·鷹谷·防垣, 會寧-高嶺·和豊·雍熙, 穩城-豊川·周原·樂土, 慶源之地-訓戎鎭·北安定·撫夷堡 등이다(≪世宗實錄≫권 92, 세종 23년 정월). 이리하여 세종 23년 5월에 종성군과 온성군은 종성도호부와 온성도호부로 각각 승격되었다. 특히 종성에는 남도민을 이주시켜 이를 채웠다. 7월에는 의정부의 계에 따라 경원도호부가 “祖宗興王의 땅임에도 지금 도리어 종성에 소속시키는 것은 실로 불가하다”고 하여 경성을 吉州道에 소속시키고, 경원을 북계의 首官으로 하여 회령·경흥·종성·온성·부거 등의 관을 이에 소속시켰다.356)≪世宗實錄≫권 93, 세종 23년 7월 임술.

 이와 같이 두만강의 천험으로써 국경획정의 의지를 실현시키고자 한 영토의식의 바탕에는 역사적 연고에 근거하는 구지의식이 깔려 있고 “조종구지는 촌토라도 축소할 수 없다”고 하는 영토의식이 배어 있었다. 세종 21년(1439) 세종이 함길도도절제사 김종서에게 명하여 “동북경은 公嶮鎭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전언이 오래 전부터 있었으므로 尹瓘이 공험진에 세운 비석을 조사케 하고”, “두만강 밖에도 많은 고성이 있다고 들리는데, 그 고성에도 비석이 있지 않겠는가. 만약 비문이 있다고 하면 이를 조사하라”고 한 것은 두만강 안쪽은 물론, 강외지방까지도 상당한 관심을 내보인 것이고 옛 영토에 대한 수복의식의 한 표현이었다. 그 후 경흥도 선왕의 ‘肇基之地’라 하여 다른 4읍과 마찬가지로 세종 25년 8월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이상의 5진 이외에도 세종 31년에는 석막의 옛땅에 부령부를 설치함으로써 6진의 완성을 보았다 이에 따라 東良北(동량뒤;茂山)을 제외한 두만강 이외의 지역을 수복하게 되었다.

<方東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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