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4. 4군 6진의 개척
  • 5) 행성·읍성·진성의 축조
  • (2) 연해읍성의 축조

(2) 연해읍성의 축조

 세종대에는 己亥東征(1419년의 대마도 정벌)을 계기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연해읍성의 축조가 시급히 요청되었다. 제한된 무역이기는 하였으나 세종 8년까지 3포가 개항되어 倭商이 경상도의 내이포·부산포·염포에 왕래하였다. 또 입거자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恒居倭戶가 점차 증가되어 농사짓기까지에 이르자 이들에게도 수세하였다. 남해의 해도에서 釣魚를 허가하여 전라도의 고초도에 이르러 연안해역에서 어로활동을 하되 知世浦에서 수세하였다. 이처럼 왜인들에 대한 회유책이 정착되면서 이전보다 왜구가 현저히 감소하였고, 연해지역은 모처럼 평안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소규모의 왜구는 아직도 간헐적으로 있었으며, 중국과의 무역을 계속하였던 왜인들이 연해해로를 왕래하고 있었으므로 아직 왜구가 완전히 없어지거나 왜구의 위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428)車勇杰,<世宗朝 下三道沿海邑城築造에 대하여>(≪史學硏究≫27, 韓國史學會, 1979).

 이러한 시기에 중앙정부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하여 해안의 포구에 병선과 騎船軍을 배치하여 수상에서 1차적인 방어를 하도록 하였다. 수상방어를 맡은 수군의 진영들은 일정한 留泊處와 分泊處가 규정되어 해안방어와 체제가 갖추어졌으나, 전국의 해안선이 매우 긴 데다가 연해지역에는 유박처나 그 외의 해안으로 상륙할 왜의 대규모 침입에 대비하여 고려대부터 있어 온 소규모의 불완전한 읍성들이 있을 뿐이었다. 반면에 내륙에는 이전부터 많은 산성들이 있어서 입보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429)車勇杰,≪高麗末·朝鮮前期 對倭關防史硏究≫(忠南大 博士學位論文, 1988).
車勇杰·沈正輔,≪壬辰倭亂前後關防史硏究≫(文化財硏究所, 1989).
그러나 세종대에 이르러서는 연해지역과 섬지방의 공지화에서 벗어나 연해지역의 개척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연해지역과 해도에 거주하는 인구가 증가되었다. 이러한 연해지역의 경제적인 유용성이 커짐에 따라 인구가 증가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중앙정부로 하여금 종래의 방비책인 내륙의 山城入保體制만을 강요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즉 연해지역의 주민이 많아지고 농경지가 착실히 개척되었으므로 새로이 정착한 사람들을 왜구의 위협에서 보호해야 할 정책적인 전환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로 내륙보다도 연해군현들에 대하여 1차적인 안전보장을 위한 관방시설을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세종대 전반기에는 막연한 연해읍성의 축조를 위한 入保處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내지의 산성과 읍성, 연해의 산성과 읍성이 입보처로서 공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종 11년(1429) 이후로는 연해지역의 읍성들에 대해 일정한 기준에 의한 축성을 강요하였다. 또 축성의 기본방향도 연해긴요읍을 1차적 대상으로 하고, 다음에 점차 내륙의 읍으로 축성을 진행시키도록 계획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전국의 대왜 관방시설의 상태를 점검·확인하고 매년 축조될 읍성의 기지와 규모를 심의·결정하며, 여기에 투입될 축성을 위한 인력동원까지를 결정하는 책임자로서 충청·전라·경상도 전체를 통할하는 도순문사 혹은 도순무사나 도체찰사를 두고 그의 보조자로서 종사관을 둠으로써 착수되었다. 이들은 연해지역을 차례로 돌아보면서 감사·도절제사 등과 상의하여 지형적 조건과 성의 규모, 성내의 水源, 입보의 편의 등을 고려하여 축성지점을 전과 같이 할 것인지, 신축할 것인지 혹은 넓히거나 좁혀 쌓을 것인지를 결정하여 시한하도록 건의하였다. 이들의 건의는 대개 전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정책은 세종 11년 병조판서 崔閏德이 도순무사로 임명된 이후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최윤덕은 연해의「各官城子造築條件」을 정하여 종사관 朴坤과 함께 연해읍성 축조의 사명을 수행해 나갔는데,430)≪世宗實錄≫권 43, 세종 11년 정월 임신. 이 때는 도마다 몇 개 읍의 축성에 징발된 인부가 집중적으로 동원되었다.

 세종 16년에는 5년 동안 연해읍성의 수축을 완료하려던 당초의 계획이 이루어지지 못하자,431)≪世宗實錄≫권 65, 세종 16년 7월 임인. 형조판서 鄭欽之와 한성판윤 朴坤이 대임을 맡아 각기 하3도와 강원도의 성터를 점검하고 인부사역의 방법도 주민이 자신들의 읍성을 축조토록 바꾸어 10년을 기약하고 완공을 서두르게 되었다. 다시 세종 20년에는 판중추부사 趙末生이 하3도의 도순문사가 되어 최윤덕과 정흠지의

 뒤를 이었는데,432)≪世宗實錄≫권 82, 세종 20년 8월 정사. 이 때는<築城新圖>를 각 읍에 나누어 주어 성벽과 敵臺·옹성·해자까지 완성하려고 하였다.433)≪世宗實錄≫권 102, 세종 25년 11월 갑인.

 이 3차에 걸친 축성은 세종 26년(1444)에 이르러 대략적인 완성국면을 보일 정도로 대단한 성과가 있었다.434)≪世宗實錄≫권 105, 세종 26년 7월 병진. 세종 27년에는 읍성뿐만 아니라 읍성에서 멀리 떨어진 요해처의 柵堡까지 축조하고자 하여 병조판서 安崇善을 파견하여 성터를 점검하였다.435)≪世宗實錄≫권 107, 세종 37년 2월 갑인.

 세종대의 읍성축조는 이처럼 세종 11·16·20·27년의 4단계를 거쳐 진행되었으나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단종대에는 다시 정비를 필요로 하여 문종 즉위 년에는 우찬성 鄭苯을 도체찰사로 임명하고, 金淳과 辛永孫을 종사관으로 하여 마지막 완성을 목표로 하3도의 읍성을 점검하였다.436)≪文宗實錄≫권 3, 문종 즉위년 9월 경신·갑자. 그리하여 정분은 문종 원년(1451) 8월과 9월에 하3도의 읍성을 구분하여 당초의 계획대로 완성시킬 것으로 27개 읍성을, 성내가 좁거나 지세가 불충분한 경우 성벽을 연장해서 쌓아야 될 것으로 7개 읍성을,「改築」할 것으로 8개 읍성을 지정하는 한편 경상도의 6개 성과 충청도의 3개 성은「隨後可築」으로 지정하였다.437)≪文宗實錄≫권 9, 문종 원년 8월 병술·기축·경자. 이 때의 축성은 하3도에 머물지 않았다. 단종 즉위년(1452)에 강원도 연해의 7개 읍성의 축조가 시작되어 전국에서 왜구의 위험이 있는 중부이남 연해 군현들이 거의 읍성을 가지거나 유사시 입보할 가까운 곳의 산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세조의 단종 폐위에 뒤이은 정세의 변동으로 사업이 일단 정지되었다가 정세가 안정된 세조·성종대에 지속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진행된 세종대 이래의 축성은 우선적으로 연해거민이 쉽사리 입보할 수 있는 읍성의 마련에 있었으며, 성내로 입보하기 위해 적당한 성내공간과 충분한 식수원, 관사와 군자창고의 설치, 방어능력의 제고를 위한 적대·女牆·옹성·해자 등이 필수요건이 되었다.438)車勇杰·沈正輔, 앞의 책, 108∼135쪽.

 세종 11년 2월에 마련한「각관성자조축조건」에 의해 수축되거나 개축된 연해읍성들은 방어에 가장 긴요한 지역들이었다. 이들 읍성들의 축조목적은침입자가 있으면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며, 평상시에는 모두 들판에 나가 농사를 짓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사방과의 거리가 평순하고 광활한 평지에 쌓는 것이 기본이었고, 그보다는 좀더 방어의 편의와 거민입보가 가장 이상적으로 조화된 야산이나 구릉지를 끼고 있거나 해수나 천류가 휘둘러진 곳으로 자연적인 지형조건이 방어능력을 제고시킬 수 있는 곳들이 택정되었다. 따라서 넓은 평야일 경우 읍성은 네모꼴로 쌓여질 수 있었으나, 대부분 지형조건을 이용함으로써 네모꼴보다는 不定形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

 지형적 조건이 아무리 훌륭한 방어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성내가 넓고 평평하여 관사와 군자고가 설치되고, 수원이 충분하여 많은 주민이 입보하여 오래도록 견딜 수 있는 조건이 구비된 곳이어야 하였다. 기존의 성터가 가지고 있던 조건들이 다시 조사되었으며, 경제력의 증가와 그에 따른 인구의 증가로 말미암아 종래의 읍성이 ‘주민의 입보에 알맞는가’의 여부도 역시 築城役과 함께 성의 형태를 변형시킬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옛 읍성의 입지조건이 새로운 계획에 맞지 않는 경우에는 아예 새로운 읍성터를 선택하여 새로 쌓거나 아니면 입지조건상의 미비점을 보완하였고, 민호가 증가하면서는 종래의 성터를 보다 넓게 평지까지 확장시켜 나가는 추세였다.

 세종대에 이르러 본격화된 연해지역 고을들의 읍성축조는 종래의 산성입보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었고, 또 그렇게 추진되고 있었다.439)車勇杰, 앞의 책, 77∼91쪽.

 15세기 전반기에는 연해지역의 읍성축조가 계획되어 5년 혹은 10년의 기한을 두고 완성을 서둘렀으나, 흉년이나 규식이 맞지 않는 등의 이유로 진척이 늦어졌다. 그리하여 연해읍성은 15세기 전반기에 이르러서도 미완성의 상태에서 완축을 도모하고 있었다. 세조는 축성에 많은 관심을 보여 2년(1456)에는 문과의 殿試科題로도 축성을 다루게 하기도 했으며440)≪世祖實錄≫권 3, 세조 2년 2월 갑자. 그 해 7월에 방어체계의 정비를 위해 도순찰사를 파견할 사목을 정함에도「沿海諸鎭 賊路最緊處築城」의 항목이 있었다.441)≪世祖實錄≫권 4, 세조 2년 7월 임오. 그리하여 하3도 도순찰사로 朴疆과 具致寬을 보내면서 諭旨를 내려, 경상도의 군사거점인 창원과 울산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인데도 불구하고 읍성을 따로 쌓는 것이 좋을지, 또 기타의 연변 군현에 성보를 설치할 것을 검토하도록 하였다. 또 이미 축조된 읍성들 가운데 방어가 가장 긴요한 읍성에는 더욱 많은 기마병을 배치하여 지키도록 했다. 이 때 가장 긴요한 연해읍은 경상도의 김해·고성·곤양·하동과 전라도의 낙안·보성·장흥·해남·함평·영광, 그리고 충청도의 서천 등 11개 지역이었다.442)≪世祖實錄≫권 5, 세조 2년 12월 경신.

 세조·성종대에 읍성의 축조지역도 확대되었다. 내륙의 주요도시인 개성의 내성이 수축되고 청주읍성과 남원읍성이 수축되는 정도로 내륙까지 축성이 확대되어 갔다. 한편 연해읍성의 완성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 멀리 제주도의 읍성까지 보완되었다. 특히 강원도의 동해안에 있는 연해고을들은 축성계획에 의해 점차 축성될 단계에 이르렀으나 완성을 보지는 못하였다. 15세기 후반기에 읍성축조에서 두드러진 현상은 三浦倭人의 상경로 연변에 있는 주요 읍에 대한 축성계획이었다. 3포왜인의 상경로는 일정하게 지정되어 있었는데 낙동강을 이용하는 노선은 일차적으로 왜구침입의 염려가 있는데다가, 왜인이 오가면서 내륙의 읍에 읍성이 없음을 알면 침입할 마음이 생길지 모른다는 염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443)≪世宗實錄≫권 80, 세종 20년 2월 기사·3월 을유. 계획에는 크게 미흡했으나 양산·밀양·진주·경주 등 큰 고을의 읍성이 축조되고, 漆原 등 3포에 이웃한 연해읍성들이 크게 보완되었다. 왜구가 직접 침입하는 지역은 아니나 큰 하천인 금강의 경우에도 강을 따라 올라오는 연강지역인 한산·임천에 읍성을 쌓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읍성의 입지조건이 맞지 않고, 또한 왜구침입의 우려가 가라앉으면서 중지되었다.

 15세기 후반기의 읍성축조는 성종 8년(1477)과 17년부터 23년까지의 두 차례에 걸쳐 크게 추진되었다. 성종 8년은 신숙주의 사후, 왜의 사정에 정통한사람이 없고 왜가 내란으로 소란스러운 분위기여서 통신사의 파견이 필요하던 때였다. 뿐만 아니라 이 때에 왜구가 빈번히 침략을 자행하였기 때문에 조선왕조로서는 연해지역의 방어태세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왜가 5, 6척 규모로 상륙하거나 교전하면서 읍성의 축조는 급속히 진전을 보았다. 이러한 사정은 이 시기에 연안지역의 수군이 지키는 포구에도 집중적인 축성이 진행된 것과 상관된다고 보여지며,444)車勇杰,<朝鮮 成宗代 海防築造論議와 그 樣相>(≪白山學報≫23, 1977). 15세기 전반기에 평상시에 유사시를 대비하여 계획적인 축성을 하였던 것과 달리, 응급적인 대응조치의 성격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는 호구수에 따른 행정등급이 대체로 이루어졌던 시기였으므로, 호구수에 따라 읍성의 크기가 결정되었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읍성은 주변의 거주민이 입보하기 위한 것이었고, 따라서 인구가 많으면 그만큼 넓은 읍성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인구가 적은데도 큰 읍성을 가지면 오히려 방어밀도가 낮아지는 폐단이 있었던 것이다. 15세기 후반기의 읍성 가운데 둘레가 3,000척 이상인 것은 대규모에 속하였는데, 하3도의 연해읍성 65개처의 약 1/3이 이에 해당된다. 다음으로는 2,000∼3,000척 크기가 13개 읍성, 1,000∼2,000척 규모가 15개 읍성, 1,000척 이하의 경우는 매우 소규모라 할 수 있으며 진해읍성·광양읍성·장흥읍성의 3개가 있었다. 고을에 사는 주민수에 비례하여 읍성의 크기가 정해졌던 것은 아니며, 읍성이 평지에 있었던 것보다는 아직도 험한 성격의 것을 넓힌 경우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척수가 크게 나타났다고 보여진다.

도별\구분 읍 수 음성이
있는 읍수
축성률(%) 연 해 읍 음성이
있는 읍수
축성률(%)
경 기
충 청
경 상
전 라
강 원
황 해
39
54
66
57
26
24
4
24
41
33
10
8
10.3
40.7
62.1
57.9
38.5
33.3
9
14
23
24
8
14
2
11
23
24
8
6
22.2
78.6
100.0
100.0
100.0
42.9
266 120 45.1 92 74 80.43

<표 2>

 이렇게 조선 전기에 추진된 읍성의 축조는 연해지역이 중심이 되었는데, 행정구역 330개 가운데 읍성은 160개, 그리고 성곽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은 190개로 파악된다.445)申榮勳,<建築>(≪한국사≫11, 국사편찬위원회, 1974), 378쪽. 경상도·전라도의 모든 연해읍과 충청도의 대부분의 연해읍에 읍성이 축조되어, 하3도에만도 61개의 연해읍 가운데 58개로 95%의 축조율을 보였다. 이를 알기 쉽게 나타내면 앞의<표 2>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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