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5.≪경국대전≫의 편찬과 계승
  • 1)≪경국대전≫이전의 법전편찬
  • (3) 세종대의 속전

(3) 세종대의 속전

 세종은 즉위하면서부터 법의 기틀을 바로잡고 법에 따른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하여 신료들에게 필요한 입법사항을 건의하게 했다. 이에 따라 의정부와 6조에서 논의하여 법으로서 시행할 만한 안건을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동왕 2년(1420) 윤 정월에 16개 조목에 달하는 입법의견이 그대로 시행되었다. 이 중 형조판서 金漸 등은 법령의 개수를 건의하였다. 그것은 국초부터 당시까지 20여 년간의 受敎條例가 복잡하기 때문에 중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여 법령에 매우 밝은 관리들조차 전후 수교의 적용에 미혹하여 혼란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의정부·6조는 元典에 있는 법과 널리 현행되고 있는 법령을 제외하고, 이들과 모순되는 법령은 모두 참작·삭제하기로 결정하고 예조와 상정소에 대하여 함께 논의하여 분류하도록 하였다.

 예조는 각 관청에 산재해 있는 수교를 찾아 모으고, 각 도 수령과 閑散人등이 사무집행에 편리하다고 여겨 상소한 사항 중 의정부·6조에서 채택한 18개조와 기존법령으로서≪육전≫에 실리지 않은 것 및≪육전≫에 실려 있으나 시행되지 않은 조문 30개조를 초록하여 이들을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것은 이들 법령들이 모두 현재 행해지고 있거나 장래 행해지지 않으면 안될 수교조례들이며, 元·續六典에 다수가 누락되어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세종 4년(1422) 8월에 완벽한 법전을 편찬할 필요에서 六典修撰色을 설치하고 성산부원군 李稷·좌의정 李原이 都提調로, 찬성사 孟思誠·참찬 許稠가 提調로 임명되어 법전개수에 착수하였다. 수찬색의 육전수찬방법은 수교 중 삭제·개정·증보할 사항이 있는 경우에는 典마다 따로 계문하여 일일이 재결을 받아서 행하며, 고려조의 법이라 할지라도 지켜야 할 것은 원전과 함께 싣도록 하였다. 그 작업과정을 살펴보면, 태종 15년(1415) 8월에 정해진 편찬 준칙에 따라 원전을 개정하는 속전의 조문을 먼저 삭제하고 다음에 태종 8년, 즉 속전편찬 이후에 공포된 조례를 중외에 이첩·수집하여 공포연월을 불문하고 동류의 것을 모아 속전에 수록하였다. 그리고 매해의 수교 중 합하여도 그 뜻이 명료한 것은 1개조로 만들고, 그 밑에 수교연월을 기입하고 세종 6년 이후의 수교조례도 원·속전의 해당하는 조문 밑에 각주하여 원·속전을 증보하고, 다시 수교연월과 관청명을 기입했다. 또 일시의 편의를 위해 시행되고 있는 법령은 따로 모아 기록하여 이를 元典謄錄이라 이름지었다.

 여기에서 태종 15년에 정한 법전편찬 준칙과 함께 새로운 준칙이 또 하나 정해졌다. 즉 영구히 시행하지 않으면 안될 법규인 ‘永世之典’과 일시의 편의에 따라 임시 시행하는 법규인 ‘非永世之典’을 구별하여 전자는「典」이라 칭하고 후자는「錄」이라 칭함으로써 법전과 법령집을 구분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律令格式에 있어서 법전으로서의 율령에 대하여 수시로 공포된 법령을 집성한 것을 격이라 하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전에 수록한 조문은 영세불변의 조종성헌이 되는 것이다. 후세에까지 법전편찬 준칙으로서 준수되었던「전」과「녹」의 구별은 입법과정의 전진이라고 할 수 있다.463)田鳳德,<韓國固有法典의 성질과 입법>(≪韓國法制史硏究≫, 서울大 出版部, 1968), 240쪽.

 이와 같이 해서 세종 8년 2월에 이직·황희·허주 등이 수찬한 續六典을 세종에게 바쳤으며, 12월에 修撰色은≪속육전≫ 6책과 謄錄 1책을 완성하였다. 세종은 이를 예조에 보내고 예조는 속육전과 원육전 각 800부를 주자소에서 인쇄하여 경·외 각 관청에 반행한 후 舊元·續六典을 회수하고 등록은 영세의 법이 아니고 일시의 편법을 집록한 것이기 때문에 100부를 인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속육전≫에 대해서도 이견이 많았다. 右代言 許誠은 착오가 매우 많다고 지적하고 예조참의 高若海도≪속육전≫은 국가만세에 통용할 법이기 때문에 한두 사람이 편집하면 편견이 개입할 폐단이 없지 않으니 여러 대신들의 자문을 들어 중의에 따라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다. 세종은 신병을 제정할 경우에는 중의에 따라 결정해야 하나 속전에 수록된 법령은 모두 ‘祖宗之法’이기 때문에 개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즉 다시 논의하게 되면 각자가 자기 소견을 고집하여 의견을 집약할 수 없기 때문에 재론하지 못하게 하고, 법전의 편찬과 신법의 제정과는 전혀 그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명시한 것이다. 이직 등은 다시 검토하여 세종 10년 11월에 육전 5권과 등록 1권을 찬진하였다. 세종은 그래도 아직 만족스럽지 않은 점이 있어 河演 등에게 개찬하게 하고 세종 11년 3월에 이들 원·속육전을 인쇄하여 중·외관에 반포토록 하였다. 세종은 12년 3월부터 경연에서 육전을 강론하게 하고, 여러 신하들과 새로 편찬한 육전의 의문점을 논의하였으며 경연관과 함께 강론한 후에 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장래의 개정에 참고하기 위하여 집현전유생들에게도 개정해야 할 사항을 지적하는 六典進講書를 제출하게 하였다.

 그런데 세종 12년 4월에 이르러≪원육전≫의 시행가부에 대한 논의가 대두되었다.≪경제육전≫은 방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알기 쉽고 관리들이 보고 익혀서 준행하기가 편하였으나 하륜이 수찬한≪원육전≫은 방언을 문어로 바꾸었기 때문에 간혹 용어가 생소하고 난삽하여 이해하기 어려웠다. 황희는≪方言六典≫시행에 찬성하였고 하륜은 이에 반대하여≪속육전≫이 이미 문어로 편찬하였으니≪원육전≫도 마땅히 문어를 사용하여야 하며, 난삽하여 해득하기 어려운 대목은 개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세종 자신도≪원육전≫과≪속육전≫이 각기 다르니 방언과 문어가 병용되더라도 지장은 없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세종 13년 5월에 六典詳定所의 계에 의하여 강원도에 있는 方言六典板子의 결손된 곳을 보수하고 이를 인쇄하여 중외에 반포 시행하며, 詳定元六典은 모두 회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와 같이 방언육전을 시행하더라도 그것과 상정육전의 내용에 현저한 차이가 없으므로 실제로는 큰 불편이 없었던 것이다.

 이직이 찬진한 속육전은 인쇄하여 반포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실행되지는 못했다. 세종 자신도 경연관을 비롯하여 널리 개정 의견을 들은 뒤 반행하기로 하였으며 미진한 점 등을 황희 등에게 검토하도록 하였다. 황희 등은 하륜 등이 찬진한 속육전 및 이직 등이 찬진한 속육전과 이들 2전에 수록되지 않은 각종 법령을 상세히 검토하여 중복을 없애고 번잡 소략한 것을 바로잡고 법령의 취사에 관하여 일일이 왕의 재가를 얻어 편찬하였다. 그리하여 세종 15년 정월에 황희 등이 正典 6권과 일시 시행되는 법령을 따로 수록한 등록 6권으로 된≪新撰經濟續六典≫을 찬진하였고 이를 주자소에서 인쇄하도록 하였다. 다시 3월에 세종은 조속히 인쇄·반포하여 관민들에게 주지시킬 것을 명하고, 자신도 이것을 강론하기로 하였다. 이≪속육전≫은 그 전의 속육전의 미비점과 결함을 보충하고 바로잡은 것이며, 건국 이래의 많은 편찬 경험의 소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시행 직후부터 결함이 지적되었다. 세종 15년 6월에 경연에서 새로 편찬한 육전의 부당한 점이 발견되었고, 安崇善·李壅 등도 예로부터의 관례에 얽매어 준용되지 않는 조문이 많으며 시행된 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점차 쓸모없는 조문이 될 지경에 이른 것을 경고하였다. 또 17년 정월에는 법전에 수록되어야 할 30여개조가 누락된 것이 발견되어 그 처리문제가 논의되었다. 이는 주자소에서 인쇄하여 속전의 말미에 첨가하는 방식으로 해결하였다. 상당한 준비와 포부를 가지고 전심전력해서 편찬한 법전이 이와 같이 시행 직후부터 결함이 드러나고 논란을 일으키는 이유는 법전편찬에서의 성헌존중주의와 현실에서의 실제적 필요와의 상극에 있었다.

 당시 실제상의 불편을 참고 성헌을 따를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실제상의 편익을 위해서 성헌이라도 희생하여야 할 것인지의 문제는 위정자간에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육전에 규정된 법이라 할지라도 실제로 편익하지 못하면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다수의 의견은 육전에 규정된 것을 경솔히 개정하면 민중의 신의를 잃는다는 것이었다. 혹자는 경·외관리들이 다투어 신법을 만들기 때문에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이 적용할 바를 모르니 신법을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하여 성헌의 존중을 강조하였다. 세종도 법을 만들기는 어렵지 않으나 법을 행하기는 어려우며, 이미 제정된 법은 부득이한 사유가 있더라도 폐지해서는 안된다고 하여 기존의 법을 존중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성헌 존중주의에 교착할 수만도 없었다. 건국 초창기에 새로운 정책의 수립과 제도의 개혁을 위하여 때로 원전은 물론 속전의 규정과 당착되는 법령이 나오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러한 사태에 대처하여 종전의 편찬방법, 즉 원전 이후 여러 해 누적된 법령을 종류별로 증보하는 일은 부적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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