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5.≪경국대전≫의 편찬과 계승
  • 1)≪경국대전≫이전의 법전편찬
  • (5) 법의 존재형태와 입법

(5) 법의 존재형태와 입법

 制定法의 기본을 이루는 것은 국왕의 명령이었다. 국왕의 명령은 황제의 명령인 制詔·聖旨·勅旨에 대하여 敎라고 하고, 형식화된 것을 王旨 또는 敎旨라고 하고 각 관청에 하달된 교지를 시행하는 뜻에서 受敎라고 하였다. 또 국왕의 명령은 그 내용의 경중에 따라 敎旨와 傳旨로 구별하였는데, 세부적 사항에 관한 명령을 전지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頒赦를 비롯하여 의정부에 명령하여 중외에 주지시킬 사항은 반드시 교지를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수교는 국왕의 자발적 명령을 뜻한다. 그러나 입법의 대부분은 당해 관청의 상신에 대해서 국왕이 재결함으로써 성립하였다. 태종 4년(1404) 10월에 결정된 입법절차에 의하여 신법을 제정하고자 할 경우에는 반드시 의정부에 보고하고 다시 왕에게 상신하여 그 재결을 받도록 하고 있다. 왕에게 상신하여 재결을 얻어 시행하는 것을 奉王旨施行·啓聞取旨施行·受判施行 또는 啓下行移 등이라 하고, 결재를 얻은 왕지를 判旨라 하고, 당해 관청에서는 이를 受判이라고 하였다. 수판시행은 奉王旨施行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왕명을 대별하여 受敎와 受判으로 구별할 수 있으며, 이를 합하여 모두 수교라고 범칭하고 수교가 법조문화된 것을 條例·條令·條畫·條件 등이라 불렀다.

 ≪경국대전≫예전 依牒條에는 입법에 관하여 신법의 제정, 구법의 개정, 부모 상중인 사람이 출사할 경우에 의정부가 심의한 다음 왕에게 계문하고 예조사간원의 署經을 거쳐 예전의 立法出依牒式에 의거하여 의첩을 내도록 규정하고 있다.

 법의 발달에는 啓下行移之事·奉王旨施行之事·啓聞取旨之事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전 의첩조의 규정도 행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대간이 신입법의 가부를 논하며 서경을 거부한 사례나 해당 관사가 계문한 조건(법)에 대하여 그것이 신법이라는 이유로 왕이 중신회의에 회부한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해당 관사가 사무처리에 필요한 사목이나 조건을 계하고 왕이 승인하면 그것은 해당 관청에 대해서만 유효한 법으로서 성립했다. 6조가 모두 이와 같이 해서 입법을 하기 때문에 입법된 수가 놀라울 정도로 증가·범람하

 고, 따라서 동일한 사항에 관하여 전후 규정이 다르거나 각 관청 상호간에 법을 달리하는 경우가 생겼다. 이렇게 되면 관리들은 혼란스러워 적용할 법을 알 수 없게 된다. 법전편찬은 이와 같은 사태를 해결하여 안정과 획일·간명을 가져오기 위해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일이다. 각 조를 비롯한 각 관청에서는 모든 受敎·受判事項을 謄錄하여 두고 이들을 수집하여 그 중 영구히 준행할 것을 선택·수정·편성하여 법전을 만들었다. 때문에 행정체계가 6조로 구성되어 있는 이상 6조의 명칭에 따른 육전이 편찬됨은 당연한 것이었다.≪경제육전≫은 말하자면 이와 같은 작업의 첫 단계로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법은 원칙적으로 민중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해당 관청을 주된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수교나 법전의 규정은 대부분 행정기구와 그 운용에 관한 행정법이며 여러 관청·관리에 대한 직무상 준칙이었다. 물론 민사에 관한 법령이나 규정이 적지 않으나 그것은 오늘날과 같이 私人 상호간의 법적 관계를 조정하는 순수한 私法이 아니라 민중에 대해서 作爲·不作爲를 명령하는 강제법규인 점에서 관리가 준행해야 할 행정법규로서의 민사법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법전을 제정·공포하더라도 법전 그 자체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각 관청·관리에게만 배포했으며, 수교도 해당 관리에게만 하달되었다. 따라서 민중이 법을 알지 못한 것은 당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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