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5.≪경국대전≫의 편찬과 계승
  • 3)≪대명률≫의 수용과 형전

3)≪대명률≫의 수용과 형전

 태조는 즉위교서에서 儀章法制에 관해서는 급격한 개혁을 피하여 고려조의 것을 그대로 답습한다고 밝히고 便民條件으로 열기한 17항목 중의 하나로서 모든 刑決官은 공사범죄를 처결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大明律≫을 적용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리하여≪대명률≫은 법전편찬에 앞서 형법으로서 일반적으로 계수 적용되었다.

 ≪대명률≫은 이미 고려말부터 적용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高麗史≫刑法志序에는 고려말에 기강이 문란하므로 원의≪議刑易覽≫과≪대명률≫을 함께 시행할 것을 건의한 자가 있었다고 하였다. 또 우왕 14년(1388) 9월의 典法司의 상소에서도≪대명률≫의 수용을 건의하였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말에 일부에서는≪대명률≫이 연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태조가 즉위교서에서 위와 같이 밝힌 것도 태조 자신이 고려말에≪대명률≫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기 때문이다. 정도전의≪조선경국전≫헌전은≪대명률≫을 그대로 채용하고 있으며, 헌전의 總序와 後書에서도 형사사건의 처결에는≪대명률≫을 적용할 것임을 밝히고, 또≪대명률≫을 방언으로 번역하여 일반이 알기 쉽도록 할 것을 확인하고 있다.

 그리하여 태조 4년(1395)에는 당시 매우 난해한≪대명률≫을 일반관리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이두를 섞어 直解한≪大明律書≫가 출간되었다. 이것을 오늘날 다른 類書와 구별하기 위하여≪大明律直解≫라고 칭하지만 본래의 서명은 아니다.≪대명률직해≫의 발문에 의하면 정승 조준이 檢校中樞院 高士褧과 金祗에게 명하여≪대명률≫을 이두로 직해하게 하고 이들이 작성한 초고를 정도전과 공조전서 唐誠이 윤색하여 태조 4년에 출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직해작업은 이미 공양왕 2년(1390) 이전에 행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대명률직해≫는 ≪대명률≫을 문자 그대로 직역한 것이 아니고,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도록 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고유한 용어와 표현이 적지 않다. 예컨대 명률에 있는 관제·관서명·직명·친족호칭을 우리 나라의 명칭·호칭으로 바꾸었고, 贖刑의 동전을 五升布로 환산하여 대납할 수 있게 하고 徒流遷徙地方에 관한 규정을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도록 고쳤다. 따라서 직해된≪대명률≫ 그 자체가 법전으로서 시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직해된 법률 조문도 매우 난해하였던 모양으로 태종 4년(1404) 10월의 議政府啓에도 관리들이 법률 조문에 밝지 못하여 형벌이 공정치 못한 사례가 있어 우려스러움을 지적하고 난해한 법률 조문은 방언으로 평이하게 번역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와 같이≪대명률≫적용에 노력을 기울였으나 관리들이 난해한≪대명률≫보다는 종래로부터의 관습형법을 적용하거나 원의 형률을 적용하는 사례가 있었다.

 한편≪대명률직해≫는 조선의 실정에 맞도록 직해된 조문이 적지 않으나 명률은 본래 중국의 사정을 기초로 해서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사정을 달리하는 조선에 법조문 전부를 그대로 적용하게 되면 무리가 생기고 또 명률에도 미비점이 있었으므로 명률 외에 조선의 사정에 적합한 법제를 만들었다. 태조 7년(1398) 3월에는 贖刑이 부자에게는 면죄하고 빈자에게는 가혹하므로 따로 徒·流·贖刑法을 정하여 정상을 참작하여 형을 집행하고, 刑官은 식자들이 맡기 싫어하여 律學을 모르는 무학자가 많아 법률 적용이 공정하지 못하므로 율학을 배운 자에게 맡게 하고 법률에 해당 조문이 없는 범죄에 대해서는 유사한 조문을 비교 적용하고 그 판례를 모아 판결례를 만들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태종 2년 9월에 명률에 준해 형벌을 집행하기 위해서 따로 조선의 사정에 적합한 도·류·속형법을 정하기로 하고 名例律 소정의 贖罪換算率을 2/3로 감하고 세종 7년(1425) 3월에는 가혹하다는 이유로 다시 1/3로 감했다. 그것은 부녀나 공사노비 등 빈곤한 자에게 가혹하였기 때문이었다. 또 세종 12년에는 명률에서 정한 流刑의 3천 리, 2천 5백 리, 2천 리 등은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으므로 각 도를 기준으로 한 유형지를 정했다. 또 태종 4년에는 각관 수령들이 명률에 규정된 笞·杖·訊杖·枷鐵·索鐐 등을 사용하지 않고 함부로 사용하기 때문에 笞杖으로 인한 치사자가 많으므로 관찰사의 수행원은 법률 조문에 밝은 자를 임명하고 각 관의 품관생도 중에서 율문을 배운 자를 선발하여 律學敎授·訓導로 임용하여 1태 1장이라도 율문에 따라 집행하도록 하는 등 명률과 조선의 실정과의 조화에 노력하였다.

 조선에 적용된≪대명률≫은 네 번의 개정을 거쳐 편찬된 것이다. 먼저 明太祖 朱元璋이 아직 吳王이라 칭하였던 오왕 원년(1367;공민왕 16) 12월에 반포한 율이 최초의 명률이며, 唐律을 본따 吏律 18조, 戶律 63조, 禮律 14조, 兵律 34조, 刑律 150조, 工律 10조, 계 289조로 되어 있고 편별은 당률과 달리 6분주의에 따르고 있다

 다음은 오왕이 명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를 洪武라고 칭한 홍무 원년(1368) 윤 11월에 율의 개정에 착수하여 吳元年律의 6분주의를 버리고 당률에 따라 名例·衛禁·職制·戶婚·廐庫·擅興·盜賊·鬪訟·詐僞·雜犯·捕亡·斷獄으로 하고 홍무 7년 2월에 606조의 율을 완성하고 이를≪대명률≫이라고 칭하였다.

 세번째로는 홍무 9년 10월에 부분적 개정이 있었고, 홍무 22년 8월에 당률의 편목을 바꾸어 다시 名例·吏·戶·禮·兵·刑·工의 7분주의를 채용하여 460조로 개정된≪대명률≫을 반포했다.

 네번째로는 홍무 30년에 개정 반포된 것이다. 이는 22년률에 수정을 가한 것이며 오늘날 전해 오는 것은 이 홍무 30년률이며, 오원년률·홍무 7년률·홍무 22년률은 전해 오지 않는다.

 여말선초에 걸쳐 우리 나라에 있던 명률은 우왕 14년이 홍무 22년에 해당하므로 당시 典法司가 말한 명률은 홍무 7년률이며, 공양왕 4년에 정몽주가新律편찬을 위해 참조하였던 명률과 직해에 이용된 명률은 공양왕 4년이 홍무 25년에 해당하므로 홍무 22년률일 것으로 추측된다.

 명 태조는 당율령을 이상으로 여겼기 때문에 명률 중에는 당률의 계통에 속하는 규정이 포함되어 있으며, 동시에 元代의 풍부한 법률경험의 기초 위에 편찬되어 원대의 법률생활을 통해서 성취한 것이다. 삼국시대 이래로 중국율령의 영향 아래 있었고, 특히 고려말에 이르기까지 당률과 원률이 연구 적용되었던 사실을 비추어 보면 조선왕조가≪대명률≫을 수용한 것은 문화사적 관점에서 보아 당연하다.

 ≪대명률≫의 수용에 관해서는≪경국대전≫형전 첫 머리의 用律條에 ‘用大明律’이라고 규정하였고, 그 후≪속대전≫형전에도 이 취지를 부연하여≪경국대전≫에 의하여≪대명률≫을 적용하며,≪경국대전≫과≪속대전≫에≪대명률≫에 해당하는 규정이 있는 경우에는 양전의 규정에 따를 것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대명률≫은 조선왕조 건국초부터 光武 9년(1905)≪刑法大全≫이 공포 시행될 때까지 5백여 년 동안 형벌법의 보통법으로서 전반적으로 사용되었다. 형전에 규정이 있는 경우에는≪대명률≫의 규정에 우선하여 적용되는 것이지만, 형전의 규정은 조목도 적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대명률≫이 적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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