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5.≪경국대전≫의 편찬과 계승
  • 5) 초기의 법사상과 법생활
  • (1) 법사상

(1) 법사상

 478)법사상의 구체적인 것은 朴秉濠,<朝鮮初 立法者의 法律觀>(≪韓國思想大系≫Ⅲ, 政治法制思想篇, 成大 大東文化硏究院, 1979) 참조.조선왕조를 법적으로 본 특징은 明律의 繼受보다도 오히려 독자적 법전편찬, 즉 그 편찬방법과 입법방법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태조는 건국과 동시에 즉위교서에서 국가통치의 기본방침으로서 통일법전을 제정하여 법치주의정치를 실현할 것을 표방하고 법제는 급격한 개혁을 하지 아니하고 고려말 이래의 법을 그대로 계승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제정된≪경제육전≫과 태종대와 세종대의≪속육전≫과≪육전등록≫그리고 세조대부터 세종대에 걸쳐 완성·시행된≪경국대전≫등은 조선왕조의 법치주의 통치의 초석이 되었다. 건국 초기의 이와 같은 법전편찬과 그 뒤를 이은 법전의 끊임없는 개수·보완은 바로 조선왕조를 법치왕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역사적 이유이다.

 조선초 입법자들의 법사상 내지 법률관은≪경제육전≫과≪속육전≫그리고≪경국대전≫의 서문과 箋文에서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다.≪경제육전≫과≪속육전≫의 전문에서는 조종성헌의 존중, 법의 영원성, 경솔하게 개정할 수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경국대전≫의 서문과 전문에서는 법은, 첫째 天地四時의 자연질서와 같이 어그러짐이 없어야 하고, 둘째 천지사시와 같은 법은 周의 古法에서 찾을 수 있으며, 셋째 조종성헌은 영구히 준수해야 하며, 넷째 법은 민심에 합치된 것이라야 한다는 사상적 바탕에서 제정되었으며 그것을 자랑하고 있다. 즉 법이 자연질서와 일치된다고 함은 古制와 민심에 합치됨을 뜻하며, 따라서 그러한 법은 영구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경솔히 개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법률관은 서문의 미사여구에만 그치지 않고 개별적인 법령의 제정과 개폐과정에서 그 타당성과 실효성이 논의될 때에 예외없이 판단기준이 되었다. 당시의 법률관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법은 古法이어야 한다.

 성인이 만든 법은 마치 넓고 큰 천지가 만물을 덮고 실으며 춘하추동의 네 계절은 어김없이 되풀이 운행됨으로써 만물을 생육시키는 질서정연한 자연질서와 같이 만인만물이 즐겨 따르며 우러러 보는 것으로 보고 이 천지사시와 같은 성인의 법을 중국의 三代 특히 周代에서 구하였다. 주를 모범으로 한 것은 우선 周官六典이 천지와 춘하추동에 따라 治典·敎典·禮典·政典·刑典·事典의 6분법으로 분류한 것을 본받아서 조선의 법전도 이전·호전·예전·병전·형전·공전으로 분류하여 조문을 수록하였으며 주대의 정치가 천지사시와 같이 이상적이었음을 동경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三代聖王의 제도를「古制」,「古訓」이라고 하여 정치의 기준으로 삼았으며 개별적인 立法定制는 일단 이고제·고훈에 비추어 보고 동시에 時宜에 적중하는지 여부를 참작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모든 신민의 왕에 대한 소망을 위로하는 것이 되고 만세에 전할「子孫之法」을 세우는 것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법이라고 해서 절대적 가치가 부여되지는 않았다. 고법을 준수한뜻은 역사적 경험을 무시하고 고제에 없는 신법을 제정함으로써 자칫 타당성과 실효성을 상실할 것을 우려하는 한편 고법을 본받음으로써 법의 영구성을 보전할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고법임과 동시에 현재에 적합한 것을 이상으로 여겼던 것이다. 현재에 적합하다는 것은 민심을 따르고 참작하는 것인데 ‘법이 비록 오래된 것이라 할지라도 백성이 좋아하지 않으면 弊法이다’라고 하여 고법의 타당성의 근거를 민의에 두었다. 물론 중국법사상에서와 같이 자연질서와 사회질서와의 동일성을 두고 고법의 기준으로 삼는 사상이 근본에 깔려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것은 운명적 질서, 자연법적 질서라고 하는 의미의 전통적 질서 사상과는 달랐다. 법전편찬에 즈음하여 현재에 알맞고 고제에 어그러지지 않으며 민에게 이로울 뿐 아니라 관에게도 편의한 사항이 법이 되어야 한다는 표현과 같이 지배권력의 신성성만을 강조한 것도 아니며, 민에게 불리하면 고법의 자연법성은 부정될 수 있는 것이었다. 즉 고법은 현재에도 적합하고 민에게 유리할 때 비로소 양법미의라고 규정 되었다.

 한편 삼대 성왕의 고법의 모범성과 신성성에 대한 신앙적 사상은 조선의 선왕의 법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선왕의 법은「祖宗之法」또는「祖宗成憲」이라고도 했는데 태조 이후의 왕들이 태조의 법 즉≪경제육전≫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그래서 후대의 왕이 새로이 법전을 편찬할 때에는 모든 조문이 한결같이 元典을 본위로 하고 원전의 규정과 모순되는 것, 원전의 규정을 개정한 내용의 속전규정은 모두 삭제하고 부득이 원전을 변경해야 할 경우에는 원전조문을 그대로 두고 그 밑에 개정조문을 각주로 표시하도록 하는 원칙이 태종대에 세워지고 이 원칙은 후대에도 예외 없이 지켜졌다.

 이와 같이 후대 왕에게 조종성헌이라 함은≪경제육전≫을 비롯하여 전왕의 법을 모두 가리키는 셈이며 조종성헌의 영구성·불가변성은 그 형식적인 신성존대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삼대 고법이 양법미의인 것과 마찬가지로 조종성헌도 양법미의로 믿었다. 이리하여 고법은 양법미의로서 자연법적 성격을 띠고 설사 개정되더라도 이념으로서, 이 상법으로서의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둘째, 법은 良法美意이어야 한다.

 각 법전에 수록된 법뿐만 아니라 제정된 법령들은 양법미의일 것을 이상으로 하고 또 양법미의라고 자처했다. 즉 조종지법이나 신법은 양법미의이어야 했다. 양법은 선법, 즉 좋은 법이며 미의는 아름다운 뜻이며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법을 뜻한다. 조종성헌을 집대성한≪경국대전≫에 대해서 서거정은 그 서문에서≪경국대전≫을 성인의 제작에 비유했다. 성인의 제작은 만물이 즐겨보지 아니함이 없으니 천지사시와 같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양법미의이며 周의 關睢 麟趾와 같이 文과 質이 잘 조화되어 있는 양법미의라고 자찬하고 있다. 최항 등도 전문에서≪경국대전≫은 선왕의 뜻을 따른 것으로서 時俗에 알맞고 실용에 적합하게 함으로써 깊이 민심에 합치시킨 아름다운 법이라고 찬양하였다.

 양법미의의 기준은「無弊」, 즉 시행하여도 폐가 생기지 않아야 하며, 특히 민정에 합치되는 것, 즉 민폐가 없이「上下相安」하여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공사가 瞻足하고 상하가 相安하는 만세에 전할 양법미의’·‘裕國裕民하는 양법’과 같이 표현하고 민폐없는 양법미의는 적극적으로 민정을 살필 수 있는 제도와도 상통하는 것이었다. 또한 유교이념에 입각한 가족제도와 신분제도에 있어서의 존비상하질서도 양법미의이기 때문에 卑下가 尊上을 능욕하거나 部民胥徒가 관리를 고소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신법의 제정이나 법의 개폐의 정당성을 주장할 경우에는 고법인 양법미의를 모범으로서 제시하거나 고법인 조종성헌에로의 복귀를 주장했는데 그것은 고법이나 조종성헌은 영구히 폐가 없는 양법미의라고 의식했기 때문이다.

 셋째, 법은 民信·民志에 따라야 한다.

 조선왕조의 정치사상의 근본은 孔孟思想의 실현이었다.≪論語≫의 顔淵章에서 孔子는 正名主義·덕치주의·예치주의에 입각한 이상정치의 최고목표는 民信이며, 그것은 足食(경제)·足兵(군사)을 달성하되 도덕에 의한 교화가 없으면 민의 신뢰를 기할 수 없게 되어 사회가 무질서해지기 때문에 兵과 食은 버릴지언정 민의 신뢰를 버릴 수 없다고 하였다. 경제·군사보다도 민의 위정자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국가가 위태롭다고 본 것이기 때문에 정치의 지상목표는「信」이었던 것이다. 맹자의 정치사상의 최대의 특색은 민본주의이다. 맹자는≪孟子≫盡心章句下에서 민이 가장 귀하고 다음이 사직이며 그 다음이 군주라고 하여 본래의 유가정치사상이「尊君」중심인데 대하여「民貴君輕」설을 주장하였다. 공자의「民信」에서도 위민사상을 엿볼 수 있지만 맹자는 보다 적극적으로 군주가 민의를 자기 의지로 삼지 못하고 保民을 하지 못하면 군주의 자격을 상실한다고 하는 혁명사상으로까지 발전시켰다. 이것은≪書經≫의 ‘民惟邦本 本固邦寧’의 정치실천적 전개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공맹사상은 조선 초부터 정치실천적 이념으로서 강력히 주장되었다. 民信에 관해서는 태조가 즉위한 날로부터 3일 후인 원년(1392) 7월 20일 사헌부가 창업주로서의 정치 준칙을 건의한 상소에 잘 나타나 있다. 즉 군주는 정사의 대소를 막론하고 언제나 자연 사시의 운행과 같이 모순 없는 조화를 이룩해야 하고 그것은 민의 신뢰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信者人君之大寶 國保於民 民保於信’은 정치의 최고목표로서 언제나 거론되고 강조되었다. 민에게 신뢰를 잃고 능히 국가를 통치한 예가 없으며 군주가 민에게 믿음을 보이는 것이 더욱 뚜렷해야 민이 군주를 우러러 믿는 것이 더욱 깊어지기 때문에 군주는 한마디 말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법은 목적이나 운용에 있어서 四時와 같이 믿음이 있어야 하므로 법의 제정과 개폐는 언제나 민신을 기본으로 하여야 했다. 민이 만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을 경솔히 개폐하는 것은 민에게 믿음을 보이는 것이 되지 못하며 양법미의인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운용하지 않는 것은 신뢰를 잃는 것이며 군주뿐만 아니라 관리들이 양법미의를 준수하는 것도 믿음으로써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특히 형벌은 국가대사 중 가장 큰 일이며 관리들이 형을 자의대로 집행하는 것은 법령이 엄격하지 않고 미덥지 못한 때문으로 보았고 법령이 엄하지 못하면 두려워하지 않게 되며 법령이 믿음이 없으면 행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법의 시행에 믿음이 있어야 함은 군주를 비롯한 모든 관료와 민이 법에 대하여 일정성(항상성)의 의식을 갖고 있음을 뜻하며 그 중에서도 민이 법의 일정성을 믿고 있어야 하며 그것은 법이 민의를 반영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민신은 민의와 같은 뜻이었다. 민의는 당시에 民志·民情·民生·民欲·人心·人情 등으로 표현되었으며 왕이나 관료들도 爲民·泰民·安民·仁民을 강조했다.

 위정자는 항상 民志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해야 하며 민의 뜻에 따른 법이 양법미의였다. 옛부터 입법창제는 民情을 근본으로 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보고 裕國裕民하는 법이 양법이라고 보았다.

 민지에 따르는 것이 민의 이목을 하나로 고정하는 것이며 민지는 변화를 싫어하고 古常(古法)을 편안하게 여기므로 법을 변개할 때에도 민지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에 고법에 타당성과 영구성이 부여될 수 있었다. 고법을 지키는 것만이 민생을 편안히 하는 길이며 비록 양법이라고 해서 제정하였더라도 民怨이 크면 법이 아니라고 보았다. 또한 군주는 保民과 養民을 항상 마음에 간직해야 하고 부국을 우선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며 만약 부국위주로 하면 반드시 해가 민에게 미치고 고제를 따른 법이라 할지라도 민이 좋아하지 않으면 弊法이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민지의 소재를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며 그만큼 법의 타당성과 실효성을 기하기 어려웠다. 모든 것이 믿음에 귀착되는 것과 같이 모든 것이 민지에 조명되지 않으면 안되며 信賞必罰을 옳게 하는 것, 貴賤之分을 고정하는 것, 세자를 세우는 것 등도 하나같이 민지를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모든 事象을 법의 실현이라고 볼 때에 한결같이 법을 준수하는 것이 민지를 안정시키고 믿음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본 것은 民信이 민지와 일치함을 뜻하는 것이었다.

 주의해야 할 것은 민신·민지라 하더라도 민이 적극적으로 자기 주장을 할 수 있는 제도적 보장장치가 없었다는 점이다. 민은 어디까지나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위치에 있었다. 민신·민지는 어디까지나 치자계급, 즉 위로는 군주를 위시한 중앙의 관료층과 지방의 관찰사를 비롯한 수령 등 목민관과 下意上達의 기회가 원칙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양반유생들의 문견과 시찰을 통해서만 반영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삼대 성왕의 고법이 민신·민지를 실현한 양법미의라고 보았기 때문에 민지의 현실적·구체적 파악 대신 고법에의 복귀 또는 재현으로써 민신·민지에 대신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볼 때에 민신·민지는 공자의 덕치·예치사상과 맹자의 민본사상의 범주내에서 이해해야 하며 결국 仁政으로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교서와 상소 등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인정을 위한 군주의 반성과 관료의 보필이 제반정책에 적중할 때에 민신·민지는 존중되는 것이다.

 넷째, 법은 경솔하게 개폐할 수 없다.

 고법을 양법미의라고 믿는 것은 고법이 영구불변하다고 믿는 것과 결부되며 그것이 조종성헌이라고 할 때 더욱 명백해진다.≪경제육전≫은 조종성헌이기 때문에 ‘永世之典’이며 그 후에 제정된 법령은 일단「錄」이라는 법령집에 수록되고 속전을 편찬할 때에는「녹」중에서 영구히 시행할 ‘永世之典’을 골라서「典」에 수록하고 일시의 사정에 따라 임시로 시행하는 법인 ‘非永世之典’은「녹」에 그대로 두거나 폐지하도록 되어 있었다.≪경국대전≫은≪경제육전≫과≪속육전≫ 또는 등록 중에서 ‘영세지전’을 골라서 수록한 것이며≪속대전≫은≪경국대전≫이후의 법령집인≪大典註解≫·≪大典續錄≫·≪大典後續錄≫·≪受敎輯錄≫·≪新補受敎輯錄≫·기타 수교 중에서 ‘영세지전’을 골라서 편집한「전」이다. 따라서 법의 영세불변성은「전」에 수록된 조문에 부여되었던 것이며 설혹 개정되거나 실질적으로 폐지되었더라도「전」에서 삭제할 수 없었다.

 그런데 고법의 영구불변성에 대한 신앙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사정에 대응할 법 개정의 필요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법의 영구불변성을 고집하면 법의 안정성을 기할 수는 있으나 새로운 사정에 대해서는 타당성과 실효성을 기할 수 없게 된다. 무수히 증가하는 신법의 홍수 속에서 개폐를 둘러싼 찬반의 의논이 일어나면 각자 그 이유를 찾아 상호견제하게 되었다. 그것은 어떤 법이든지 절대로 개폐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경솔하게 개폐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법의「不可輕改性」이 법률관의 밑바닥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따라서 법의 영구불변성은 실질적으로는「不可輕改性」이라고 하는 제한된 법적 안정성으로 바뀐 것이며 이것이 왕조정치의 진전에 대한 功過의 요인이 되었다.

 법의「不可輕變性」은 조종성헌이라는 이유와 인심 및 國基의 안정이라는 이유로 주장되었다. 먼저 건국초의 군주들은 국기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조종성헌 고수의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태종은 법개정 주장에 대해서 王安石의 故事를 예로 들고 아울러 고려도 하나의 법이나 관제를 세울 때마다 반드시 臺省으로 하여금 충분히 연구 검토하게 하여 진실로 義에 합당한 후에 시행했음을 상기시켰다. 이 때문에 신법을 만들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구법을 바꾸고자 계책을 썼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여 5백 년의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역사적 경험을 강조하면서 제도나 법을 바꾸고자 할 경우에는 구법을 유지하는 것보다도 개정한 경우의 利가 10배나 되지 않으면 안되며 그렇지 못하면 개정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세종도 즉위 이래 항상 조종성헌을 개정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부득이한 사정이 있을 경우에는 자주 개정해 왔음을 반성했으며, 법을 개정할 경우에는 현행법이 열 가지의 폐가 있다면 새로 만들 법은 하나의 폐도 없다는 것이 확실한 후에 개정해야 하며 입법은 어렵지 않으나 법의 개정은 어려우니 일단 입법하였으면 부득이 한 사정이 있더라도 폐지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이러한 사정은 관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종성헌은 그 이유만으로써 당연히 자손만대에 준수함을 이상으로 삼았으며, 구법을 돌보지 않고 꾀를 부려 법을 개정하려는 자는 不守法으로 논죄해야 한다고 하고 일단 법이 제정된 후에는 우려할 만큼 큰 폐가 없으면 반드시 법의 목적이 성취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법을 쉽사리 바꾼 경우에는 조정대법을 한낱 서생의 말만 듣고 바꾸는 것은 불가하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또한 법을 경솔히 바꾸면 인심이 쉽게 변하며 국세가 고정되지 못한다고 보았다. 즉 조종지법을 준수하여 자주 바꾸지 않는 것이 인심을 진정시켜 따르게 하고 국맥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인정은 변화보다는 고법에 안존한다고 보았으며, 고려의 법이 3일이 못가 바뀌어 민신을 얻지 못했음을 교훈으로 내세우기도 하였다.

 또한 법의 개정을 억제하고 그 영구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처음에 신법을 제정할 때 신중히 검토할 것이 요구되었다. 날로 증가하는 새 법령은 당해 관사의 사무집행이나 정책구현을 위한 세칙을 정하기 위한 경우가 많았는데 신법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판사가 직접 왕에게 상신하여 결재를 받아 시행하였다. 이들 법령 중에는 기존 법령이나 타부서의 사무와의 연관성을 고려하지 않고 각자의 소견대로 졸속으로 입법하여 그 사이에 모순 충돌이 생기기 때문에 관리들이 준수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그래서 태종대에 신법 제정은 반드시 의정부의 심의를 거치도록 했으나 실효성이 없었으며, 세종대에는 모든 관리들이 다투어 신법을 제정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법전과 등록 외에 신법을 제정하지 못하게 하자는 건의도 있었다.

 그리하여 ‘不可輕改性’과 신법 억제는≪경국대전≫이후에 형식적으로는 지켜진 셈이었으나 실제로 법은 무수히 바뀌었고 신법도 제정되었다. 그러면서도 항상 ‘法立而弊生’ 또는 ‘一法立一弊生’이라는 격언이 법의 안정성과 영구성을 기하기 위한 쐐기로서 기능했다.

 다섯째, 왕과 법의 관계가 규정되었다.

 왕은 어떠한 인간에게도 종속되지 않으며 오직 천명에 따라 天意를 대신하는 것이며 천의는 民志이기도 했다. 민심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하여 천지사시와 같은 조화있는 정치를 하는 것이 왕의 임무이며 그것이 천의에 부응하는 것이다. 입법·사법·행정과 같은 통치권이나 風敎의 종국적 權原은 왕에게 귀속되는 것이다. 위에서 왕이 법을 만들고 아래에서 人臣이 법을 지킴으로써 비로소 기강이 서고 상하가 평안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왕은 스스로 만든 법이라 할지라도 백성과 함께 준수해야 하며 그것이 조종성헌일 경우에는 왕도 인신과 함께 마땅히 준수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왕은「紀法之宗」이라고 표현하였다. 즉 왕은 한 나라의 법을 체현하는 근본이 되는 宗主인 것이다.

 또한 법은 왕이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公器」, 천하의 모든 사람이 함께 소유하며 관여하는 것, 혹은 영구히 전해서 준수해야 할 공공의 器이기 때문에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임의로 폐지하거나 굽히는 등 사물처럼 할 수 없다고 보았다. 王土·王民思想과 같이 법도「王法」이라고 표현했는데 왕토·왕민이라고 해서 왕의 사유물이 아닌 것과 같이 왕법이라고 해서 왕의 사적인 법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왕도 법 아래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왕이 법을 만들면 신하가 지켜야 하는 것과 같이 왕도 법을 받들고 스스로도 지켜야 하는 자기구속하에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사정은 오히려 반대로 왕은 법에 의한 자기구속에서 해방되어 자의가 감행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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