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5.≪경국대전≫의 편찬과 계승
  • 5) 초기의 법사상과 법생활
  • (3) 법생활

(3) 법생활

 480)朴秉濠,<傳統的 法意識과 現代法의 課題>(≪歷史的 脈絡에서 본 現代韓國文化의 方向≫,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 참조.良法美意로 자처하고 공포 시행된 각 법전 그리고 民信·民志에 입각하여 裕國裕民하는 법으로서 시행된 무수한 단일 법령은 그 내용이 대부분 통치조직과 운용에 관한 헌법·행정법·군사법·형사법이며 직접적으로는 각 관사나 관리에게 하달되는 법이었다. 그것이 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민에게 시달될 때에 민은 비로소 법령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따라서 민은 법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였다고 할 수 있다.

 일반민은 법전을 읽을 기회가 없고 법전은 관사에만 비치되어 있었다. 다만≪경국대전≫예전 잡령조에 단행법령이나 금령이 제정되어 하달되는 경우에는 서울은 한성부가, 외방은 각 고을에서 榜을 붙여 널리 보게 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므로 방이 붙은 법령은 민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법전에는 처벌규정이 수반되지 않은 이른바 민사적 법규가 없었던것은 아니다. 호전에는 토지·가옥·노비·우마의 매매·임대차·訴權·이자제한에 관한 규정이 있고, 예전에는 혼인·친족의 범위·제사상속·입양에 관하여 규정하고 있고, 형전에는 재산상속에 관해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민이 私法的인 것으로서 국가법과 관계하는 것은 위의 범위에 국한되었다고 할 수 있고 나머지는 관습법·판례법에 일임되어 있었으므로 사적 생활의 대부분은 국가법의 직접적인 규율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민의 국가법에 대한 인식은 특수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즉 민에게 국가법은 거의 모든 경우에 위압이나 형벌을 수반하는 명령으로 받아들여지고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법은 형과 같은 뜻으로 민에게 인식되었다.

 이 점은 국가법의 내용과 성격에서만 유래하지 않는다. 형사재판에서는 유죄판결이 있은 후에 죄인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의자로 지목된 때부터 죄인으로 취급되었다. 실제로 위압적인 官司에서는 처음부터 자백을 강요하기 위해 각종 잔인한 고문이 자행되었다. 민사재판은「詞訟」이라고 하여 형사재판과 절차면에서 구별되었지만 오늘날과 같이 완전히 구별된 것이 아니라 사안과 관계되는 한도에서 형사재판적 성격이 가미되었다. 즉 비록 순수한 민사사안이라 할지라도 사건의 발단, 당사자간의 사적 해결과정, 그리고 재판과정에서 사기·문서위조·협박·구타·상해·명예훼손 등 비도의적, 반사회적 언동이 수반되는 것이 상례이므로 그러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소송 진행 중에 또는 변론을 종결할 때에 부수적 병행적으로 형사처벌을 과했으며 당사자도 訴狀에서 분쟁해결 청구와 동시에 형사처벌도 요구하는 것이 상례였다. 따라서 민사재판이라 하지만 형사재판의 분위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국가법의 경우와 같이 관사나 재판도 두려움의 인상을 주었다.

 또한 국가법이 아닌 사법적 영역에서는 통일적·추상적인 법규가 없으므로 관습법과 條理에 따라 규율되었다. 이 영역에서의 행위의 규준은 理·道理·事理·經緯·法理라고 하였다. 이것은 국가에서도 당연한 것으로 규정되고 민사재판을 심리하는 것을「聽理」라고 하고 이유가 없어 패소하는 것을「理屈」이라고 하며 당사자는 소장에서 판결을 청구하는 용어를「論理題給」·「論理處決」이라고 표현하였다. 모든 사물에는 이치 또는 도리가 있어서 소작인에게는 작인도리, 班常에게는 양반도리, 상인도리가 있었다. 도리나 경위는 조리 또는 형평과 같은 말이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법의 이념적 기초관념이며 보편적 상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물에 내재하는 보편적 이치인 사리는 모든 사람이 수긍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있으므로 도리에 어긋나는 것을 無據道理라고 하고 그것은 억지이어서 非理生臆이라고 했다.

 결국 도리에 맞는 것은 염치를 알고 인의에 따른 것이므로 그에 반한 경우에는 事極無廉·無廉無法·不可仁義爭者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사리와 도리에 좇아 생각하고 거래하는데 理는 실정법처럼 통일적이고 명확하지 않으나 양심 속에 깔려있는 것이었다. 일상적인 거래나 행위에서 말미암은 분쟁이 당사자의 理에 따른 사적 해결에 실패한 경우에 분쟁은 관사에 제소되는데, 관사도 이에 따라 재판하므로 聽理에 의하여 쌓인 판례는 객관적인 관사의 理의 집적이었다. 관사의 理의 반복연속에 의해서 법리가 형성되며 그것은 권위 있는 이로써 받아들여지고 사람들은 그 법리를 기준으로 삼았다. 또한 민신·민지에 따른 양법미의인 국가법에 대하여도 민중은 이로써 평가하여 받아들이거나 거부했을 것이다.

 민중의 理法은 형사적이거나 위압적이 아니다. 그러나 사리의 다툼이 관사의 공권적 해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이상 결국 이법의 실현은 관사의 분위기와 결부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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