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1. 15세기 동아시아 정세
  • 1) 명의 정치동향
  • (2)「정난의 역」과 북경천도

(2)「정난의 역」과 북경천도

 건국 초기에 이미 명 태조는 큰 아들 朱標를 황태자로 책봉하였으나, 황태자가 조선 태조 원년에 죽자 부득이 16세의 손자를 皇太孫으로 세울 수밖에 없었다. 조선 태조 7년에 명 태조가 죽음에 따라 황태손이 즉위하여 明惠帝가 되었다. 명 혜제는 과거 명 태조의 ‘以猛治國’의 방침을 풀어 관대한 문인정치를 지향하였다. 그러나 원래 명 태조가 황실을 보위시킬 목적으로 각지에 분봉한 제왕세력이 이제는 오히려 중앙의 황제권력을 위협하는 존재로 성장한 것을 깨닫고는「削藩정책」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제왕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삭번정책」의 주된 목표는 北平의 燕王이었다. 명 혜제와 齊泰·黃子澄 등은 연왕을 공략하기 전에 먼저 周王·齊王·代王·湘王·岷王의 불법행위를 이유로 하여 차례로 왕위를 박탈하고 서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는 연왕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군사적 압박도 병행하였다. 이렇게 올가미가 점점 조여 들어오자 이전부터 황위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던 연왕은 드디어 명 태조가 남긴 皇明祖訓을 끌어대 ‘君側의 奸惡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이른바「靖難之師」를 일으켜 명 혜제를 상대로 싸우게 되었다.

 삭번정책으로 말미암아 황제와 번왕과의 사이에 벌어진 이 내전은 후일「靖難의 役」으로 이름지어졌다.「정난의 역」 초기에 연왕은 寧王을 먼저 공략하여 몽고귀부군을 비롯한 8만의 병력을 손에 넣어 군사력을 크게 증대시킨 다음 명 혜제군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명 혜제는 이미 명 태조가 功臣宿將들을 철저히 숙청한 다음이라 유능한 장군을 기용하여 이에 적절히 대처하기가 어려웠으며, 숫적으로 우세한 군대를 지니고도 전투경험이 많고 몽고귀부군을 장악한 연왕군에 패퇴를 거듭하였다. 조선 태종 2년(1402) 연왕군은 마침내 南京을 포위하여 함락시키고 명 혜제는 실종되었으며, 연왕이 제위에 올라 明成祖가 되었다.

 藩王으로서 반란을 통해 제위를 탈취하며 스스로 황제가 된 명 성조는 제왕분봉제도가 황제권력을 위협하는 요소라는 점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명 성조는 표면적으로는 제왕분봉제도를 옹호하는 약간의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으나, 실제로는 끊임없이 제왕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며 변방의 장군들도 제왕의 통제를 받지 않도록 함으로써 번왕이 무력으로 다시 황제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길을 막았다.

 「정난의 역」에서 명 성조가 성공할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요인 중 명 혜제 주위의 환관들로부터 제공되는 정보가 큰 몫을 차지하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후 명 성조는 관료를 장악하고 통제하는 데도 환관을 활용하기 시작하여 “대개 명대에 出使·專征·監軍·分鎭 및 臣民을 사찰하는 일 등 환관의 대권이 모두 永樂년간으로부터 비롯되었다”501)≪明史≫권 304, 列傳 192, 宦官 1.는 말과 같이, 황제권력의 강화를 대가로 이후 극심한 환관정치의 길을 열어놓게 되었다. 명 성조는 일시 폐지되었던 악명높은 錦衣衛를 부활시키는가 하면, 새로운 정보기관인 東廠을 설립하며 역시 환관에게 책임을 맡겼다. 환관이 글자를 해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는 경우 사형에 처하며 정치간여를 엄금시켰던 명 태조 이래의 금기도 이후 서서히 무너져 내린 것은 물론이다.

 명 태조가 중서성을 혁파하고 6부를 직접 관장하기 시작하며 자문을 받을 필요에서 설치하였던 殿閣大學士의 지위가 상승하기 시작한 것도 명 성조 때의 일이다. 궁성내에 殿閣이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차츰 內閣大學士로 불리게 된 이들은, 명 성조가 중대한 정책을 결정할 때 내각의 의견을 자주 구함에 따라 외형상의 관품과는 관계없이 실질적인 권력이 대폭 증대하게 되었다. 내각의 실권이 커지고 閣臣의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자연히 내각이 중앙정부를 이끌어 가는 모양으로 변모해 갔다.

 명 성조는 즉위 직후부터 북경으로 천도할 생각을 가다듬기 시작하였다. 北平을 北京으로 개칭하고 北京國子監을 설치하는 등 조금씩 북경의 지위를 높이는 동시에, 명 성조 자신도 세 차례 北巡할 때마다 북경에 몇 년씩 머물면서 정사를 처리하여 북경의 정치적 비중을 점점 높여갔다. 해상교통과 육상교통이 개선되고 특히 대운하를 준설하여 南糧北運문제가 해결되자, 명 성조는 북경성과 황궁을 대대적으로 신축하고 조선 세종 3년(1421)에 정식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북경은 원래 명 성조 자신의 세력근거지로서, 북방을 장악할 수 있는 정치적 기지이기도 하였고 명제국의 최대 강적인 몽고의 남침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군사적 거점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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