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1. 15세기 동아시아 정세
  • 1) 명의 정치동향
  • (4)「인선의 치」

(4)「인선의 치」

 명초 50여 년을 거치는 동안 명조의 통치체제나 典章제도가 갖추어지고 농업생산력도 크게 향상되었다. 명 성조가 죽은 다음 仁宗이 즉위하였으나 불과 10개월만에 병사하게 되니, 그의 아들이 계위하여 宣宗이 되었다. 인종과 선종의 재위기간은 그다지 길지 않아 10년 남짓에 지나지 않았으나 커다란 정치적 격동과 변혁이 마무리되어 명조의 통치가 정상적인 궤도에 진입하고 정치가 비교적 맑고 깨끗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谷應泰는≪明史紀事本末≫에서 “명의 仁宣시대는 周의 成康시대나 漢의 文景시대와 같아 거의 3대를 방불할 정도였다”라고 서술하였다.502)≪明史紀事本末≫권 28, 仁宣致治.

 그러나 이러한 이른바「仁宣의 治」로의 진입이 처음부터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명 인종의 동생이며 명 선종의 숙부가 되는 漢王 朱高煦가 樂安州를 중심으로 동생 趙王 朱高燧와 연결하여 중앙정부를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정난의 역」에서 세운 무공으로 장군들 사이에서도 위망이 높고 강력한 부대를 거느리고 있던 한왕은 명 선종이 즉위한 다음해에 반기를 들었으나, 친정에 나선 명 선종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에 따라 명 태조 이래 번왕의 발호가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이후 조정에서는 제위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한왕을 따돌리고 명 인종을 옹립하는 데 공로가 있었거나 이어 명 선종을 도와 한왕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들이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도 내각대학사 楊士奇·楊榮·楊溥 세 사람은 명 인종·선종 부자와의 관계가 특히 돈독하였고 여러 정책수립에도 참여하여「仁宣의 治」를 이룩하는 데 공헌이 많았으므로 사람들은 이 세 사람을「三楊」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 시기에 내각의 권력이 눈에 띄게 신장되었다. 원래 5품관에 불과하던大學士가 이 무렵에는 公侯와 尙書의 서열로 뛰어 오르고 이미 6부의 권력을 능가하기 시작하였다. 내각권력의 핵심은 각종 章奏가 황제에게 제출될 때 황제를 대신하여 批文을 기초할 수 있는 직권, 즉 票擬機에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내각이 기초한 표의에 따라「批紅」을 하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역시 대권은 황제에게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재상제도가 없어진 명대에 내각대학사가 사실상의 재상노릇을 하였다고 볼 수도 있으나 漢唐시대의 재상과 같은 실권을 갖지는 못하였다. 내각제도의 완비나 巡撫의 지방파견 등을 통한 정치제도의 변화는 이후 명의 정치체제가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외정책에서도 명백한 조정이 시도되었다. 타타르와 오이라트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타타르 등과의 관계회복에 힘을 쏟는 한편 방어위주의 전략을 채택하여 군사행동을 절제하였다.「정화의 출사」로 대표되는 대규모 해양원정도 경제적 손실이 너무 컸으므로 다시는 시도되지 않았다. 역시 재정적 부담이 되고 있던 안남경영도 명 선종이 양사기·양영 등과 상의한 결과 손을 떼고 철수를 단행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사회의 안정을 이룩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지속적인 부역의 감면, 吏治의 정돈, 형벌의 완화, 賑災활동 등의 조치는 명제국의 사회경제적 성장을 가져다 주는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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