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1. 15세기 동아시아 정세
  • 1) 명의 정치동향
  • (5)「토목의 변」과 환관정치

(5)「토목의 변」과 환관정치

 명 인종·선종시대는 가장 안정된 시대였음에는 틀림없으나,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회경제적 및 정치적 문제가 배태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토지겸병이 눈에 띄게 늘어나며 유민이 발생하기 시작하고, 명대의 유명한 환관정치의 폐해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부터였기 때문이다.

처음 태조 때의 제도에서는 內臣이 글자를 알거나 책을 읽는 것이 금지되었다. 후에 선종 때 內書堂을 설치하고 어린 內侍를 선발하여 대학사 陳山으로 하여금 가르치도록 하니 드디어 제도화되었다. 文墨에 통하고 고금을 알게 되니 巧智로써 황제를 모시며 간악한 일을 벌이게 되었다. 몇 대가 지나 세력이 커져 王振으로부터 시작하여 魏忠賢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폐해를 살펴보면 한·당보다 훨씬 심하였다(≪明史≫권 304, 列傳 192, 宦官 1).

 명 선종이 병사하자 겨우 9세의 황태자가 즉위하여 明英宗이 되었다. 명영종대 초기는 양사기·양영·양부 등이 계속 정무를 집행하였으므로 기본적으로는 인종·선종시대의 각종 정책을 계승하고 있었다. 그러나 환관이 정치에 간여할 수 있는 길이 이미 열린 뒤라 명 영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환관 王振의 대두를 막을 수는 없었다.

 명 영종의 신임을 배경으로 환관의 조직인 司禮監은 어느덧 내각과 권력을 겨룰 정도가 되었다. 왕진이 자기 사람을 광범위하게 심고 권력을 장악하니 관료들은 왕진에 굴복하여 영합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무고한 죄를 뒤집어 쓰고 축출당하였다. 정치의 부패와 더불어 지방에서는 대규모의 민중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조선 세종 29년(1447)에는 葉宗留가 浙江·福建의 산악지대에서 礦徒를 중심으로 한 유민폭동을 일으켰다. 이에 영향을 받아 다음해 복건에서는 佃戶를 중심으로 한 鄧茂七의 농민반란이 일어나 섭종유의 무리와 호응함으로써, 조선 세종 32년에 진압될 때까지 동남지방을 크게 진동시켰다.

 더욱이 이 무렵부터 다시 강성해지기 시작한 오이라트의 내침은 사태를 한층 악화시켰다.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되자 오이라트의 也先[에센]은 大同으로 대거 남침하여 왔다. 명 영종은 치밀한 작전계획이나 충분한 전쟁준비도 없이 왕진이 부추기는 대로 조선 세종 31년 5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에 나섰다. 왕진의 지휘에 따라 무모하게 만리장성을 넘어 북진을 하던 대군이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퇴각하던 도중 土木堡에 이르렀을 때 추격해 오던 오이라트군에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공격해 들어오는 오이라트의 기병 앞에 전렬이 무너진 명군은 철저히 유린당하여 왕진을 비롯한 다수의 대신들이 전사하는가 하면, 명 영종조차도 오이라트군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명조가 건국 이래 쌓아온 국력을 어이없이 한 번의 전투에서 탕진해버린「土木의 變」이 바로 이것이다.

 토목보에서 오이라트에게 대패당하고 황제가 포로가 된 사건은 명나라 조정을 경악시켰다. 황태후의 명령에 의해 監國을 맡게 된 영종의 동생 郕王은 신하들과 대책을 논의하였으나 모두 우왕좌왕하였다. 남경천도론까지 제기되는 가운데, 于謙만이 북경을 굳게 지키며 오이라트의 침입에 정면으로 항전할 것을 주장하였다. 얼마 후 성왕이 즉위하여 景宗이 되자 병부상서 우겸을 더욱 신임하며 의지하였다. 북경까지 다시 남침하여 온 오이라트의 에센은 우겸을 중심으로 한 명의 굳건한 항전에 별 소득이 없자, 명 영종을 귀환시켜 주며 화의를 제의하였다. 경종은 석방되어 돌아온 영종을 太上皇으로 받들어 南宮에 안치시켰으나 사실상으로는 연금과 다름없었다.

 오이라트의 위협이 거의 사라지고 난 다음 경종은 영종의 아들인 황태자를 폐하고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환관 曹吉祥을 신임하여 북경을 방위하는 부대인 京營을 지휘케 하여 환관이 무력으로 북경을 장악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조선 세조 3년(1457) 경종의 병이 위독해지자 연금되어 있던 영종은 조길상 등과 연결하여 정변을 일으키고 復辟에 성공하여 다시 제위에 오르고 연호를「天順」으로 고쳤다. 이후 우겸 등의 관료들이 처형되거나 축출되었고 환관이 북경의 군대를 장악하는 힘이 더욱 강화되었음은 물론이다.

 명 영종이 두번째 즉위한 지 7년만인 조선 세조 10년에 병사하자 16세의 소년 황제 明憲宗이 계위하였다. 헌종은 재위 23년간 閣臣을 불러 만난 일이 한 번밖에 없을 정도로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므로, 내외의 정무가 모두 측근의 환관인 汪直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다음 明孝宗대에 일시적인「弘治中興」을 거치기도 하나, 이후 명조의 정치는 더욱 어둡고 부패한 환관정치의 길을 치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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