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1. 15세기 동아시아 정세
  • 2) 북방민족의 동향
  • (1) 북원과 나하추

(1) 북원과 나하추

 徐達이 이끄는 명의 북벌군이 大都로 육박하자 元順帝는 공민왕 17년(1368) 마침내 황궁을 버리고 문무백관을 이끈 채 居庸關을 지나 上都로 피란하였다. 이로써 약 백 년에 걸친 몽고인의 중국지배가 막을 내리고, 이후 만리장성 이북에서 북원정권으로서 얼마동안 잔명을 유지하게 되었다. 원 순제가 북쪽으로 패주할 때 당시 원의 군사력은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원 순제를 따라 상도에 집결한 부대로서 북원정권을 보위하고 있었다. 둘째는 陝西·甘肅 일대에서 작전하고 있던 擴廓帖木兒의 부대로서 사실상 원군의 주력이었다. 셋째는 요동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諸將의 부대였으나 제대로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아 당장 명군에 위협이 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명은 군사력을 집중시켜 원 순제를 추격하는 한편 확곽첩목아의 세력을 소멸시키는 데 작전의 목표를 두었다.

 공민왕 18년 9만의 병력을 이끈 서달이 潼關을 나가서 확곽첩목아를 대파시키니 확곽첩목아는 겨우 몇 사람을 거느리고 和林으로 피신하였다. 常遇春·李文忠은 거용관을 나가 원 순제를 추격하여 상도를 쉽게 함락시켰다. 명군의 계속되는 추격을 피해 원 순제는 다시 북으로 應昌까지 달아났으나 거기서 병사하고 말았다. 황태자인 愛猷識理達臘이 계위하여 元昭宗이 되었으나 명군의 계속되는 추격에 응창은 여지없이 함락되고 다수의 황족과 귀족이 포로가 되었으며, 황제만이 겨우 수십 기로 탈출에 성공하여 화림으로 향하는 형편이 되었다.

 화림으로 퇴각한 원 소종과 확곽첩목아가 현지의 세력을 재편하고 반격의 태세를 가다듬자, 명은 공민왕 21년 다시 15만 병력을 3로로 나누어 대거 북벌을 단행하였다. 3로 가운데 감숙으로 나아간 서로의 馮勝만이 승리를 거두어 燉煌까지 이르는 교통로를 장악하였을 뿐, 중로의 서달군은 嶺北에서 패퇴하여 이후 방어에만 전념하였다. 동로의 李文忠軍도 깊숙히 阿魯渾河까지 진격하였으나 뚜렷한 전과를 올리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 결과 몽고인도 명군의 예봉을 피해 서북으로 숨어들어 간 다음, 화곽첩목아와 소종이 잇따라아 죽음으로써 작전을 영도할 중심인물을 잃게 되었다. 명군도 더 이상 사막을 넘어 무모한 공격을 가하기를 삼가하고 전략을 바꾸어 방어에만 전념함으로써, 이후 요동으로 눈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안 명의 주된 공격목표에서 벗어나 있던 요동의 원나라 잔여세력 중에서는 納哈出[나하추]이 가장 강력하였다. 나하추는 몽고제국의 공신인 木華黎[무카리]의 자손으로서, 무카리가 칭기즈칸으로부터 興安嶺 방면의 鎭撫로 임명된 이후 父祖 대대로 요동방면의 지배를 맡아오던 인물이었다. 공민왕 11년부터는 瀋陽을 근거로 하여 行省丞相으로서 고려의 동북면에도 침입하는 등 어지러운 요동에서 가장 유력한 지배자가 되었다. 명도 그의 동향에 주목하며 招撫를 위하여 때때로 사자를 보내기도 하였으나 나하추는 이를 무시하고 가끔 남하하여 약탈을 자행하였으며, 공민왕 22년에는 牛家莊을 겁략하여 군량 10여만 석을 불태워 명 태조를 격분시킨 일도 있었다.

 명은 나하추를 공략하기 전에 먼저 압록강·佟佳江·輝發河 상류 일대를 경략하여 고려와의 연결을 차단시키는 한편, 원의 잔여세력과 여진 각 부를 초무하여 나하추를 고립시키는 일에 주력하였다. 우왕 13년(1387) 명 태조는 나하추를 일거에 섬멸시킬 목적으로 풍승으로 하여금 20만 대군을 이끌고 金山으로 육박시켰고, 도저히 대적할 수 없음을 안 나하추는 드디어 항복하고 말았다. 나하추의 세력이 강성하였을 때는 북으로 북원과 연결하고 남으로는 고려와도 교통하여 명군이 요동으로 진출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명군이 북원의 주력을 토벌하는 데도 측면의 위협이 되었다. 나하추의 항복은 요동의 원나라 잔여세력이 철저히 무너졌음을 의미하며, 이로부터 명은 요동경략을 본격적으로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

 북원의 소종이 죽은 다음 그의 아들 脫古思帖木兒가 계위하였으며, 요동의나하추가 명군에 항복할 때 따르지 않은 무리들이 모여들어 혼란상을 노정하고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명 태조는 남옥으로 하여금 우왕 14년 탈고사첩목아의 본거지를 습격하게 하였다. 결국 탈고사첩목아와 天保奴 등 수십 기만이 도주하고 나머지 10만 가량이 포로가 되었다. 명 태조대의 북방원정은 대부분이 이러한 자기붕괴의 기회를 교묘히 활용한 원정으로서 그야말로 포로획득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후 몽고에는 “나머지 몽고인은 매우 적어 기병이 겨우 5천 가량으로서 가속과 합쳐 1만 인이었다”라고 일컬을 정도로 공허하게 되었다.503)≪明太祖實錄≫권 200, 洪武 23년 2월 갑진.

 원이 붕괴된 이후 명군의 추격 앞에 몽고인들이 무력적 저항을 끈질기게 시도하였던 흔적은 의외로 찾아보기 어렵다. 몽고인들은 원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라도 일단 초원으로 돌아가서 유목생활로 먼저 복귀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바람직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수의 황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몽고인들은 성곽을 근거지로 삼고 있다가 명군이 박두해오면 저항없이 항복한다든지 아예 자발적으로 집단투항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는 결국 몽고인의 거듭된 패퇴가 명군의 압도적인 무력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도, 오랜 세월에 걸쳐 정착생활에 젖어있던 몽고인 자신들이 다시 유목생활로 복귀하기가 너무 어려웠고, 중국사회와의 경제적 의존관계가 끊어지자 스스로 자기붕괴의 길을 걸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504)荻原淳平,≪明代蒙古史硏究≫(同朋舍, 1980), 2∼20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