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1. 15세기 동아시아 정세
  • 2) 북방민족의 동향
  • (4) 여진

(4) 여진

 여진이 분포하고 있는 지역을≪大明一統志≫에서는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쪽은 우량하에 접하였으며 남쪽으로는 조선과 이웃하고 북쪽으로는 奴兒干과 北海에 이른다”라고 기술하였다.508)≪大明一統志≫권 89, 女直. 그러나 여기서 언급한 이 광활한 지역에서 사는 여진을 반드시 동일한 하나의 민족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퉁구스어족·몽고어족·고아시아어족 등의 종족이 포괄된 여러 종족의 범칭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며, 그 가운데 후일 만주족으로 불리게 되는 퉁구스어족의 여진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음은 확실하다.

 명나라에서는 여진을 建州女眞·海西女眞·野人女眞으로 명확하게 구분하여 파악하였다.

무릇 女直에는 3종이 있다. 海西 등처에 거하는 자들이 海西女直이고, 建州와 毛憐 등처에 거하는 자들이 建州女直이다. 각 衛所 외에 또 地面이 있고 站이 있으며 寨도 있어, 관리를 두고 칙서를 주었는데 3衛의 제도와 같았다. 동쪽 끝에는 野人女直이 있었다. 야인여직은 중국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조공이 일정치 않았으나, 해서와 건주는 해마다 한 차례 사람들을 보내 조공을 하였다(≪明會典≫권 107, 朝貢 3, 東北夷).

 그러나≪明會典≫의 이러한 구분은 명이 여진의 분포와 이합집산에 따라 오랜 세월에 걸쳐 관리해온 경험이 축적된 결과로서 조선 중기 이후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된 분류법이다.

 조선 초기 동아시아를 움직이는 전체 북방민족의 동향 가운데 여진이 차지하는 비중은 몽고와는 비교할 수 없이 미약한 하나의 종속변수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진은 원대 내내 몽고인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가 원이 멸망한 다음에도 요동의 나하추가 명에 투항하기까지 20여 년간 원나라 잔여세력의 영향을 벗어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후 명 태조는 鐵嶺衛와 三萬衛의 설치를 통하여 요동진출을 시도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잠시 위소의 증설을 미루고 요동경략의 기지로서 遼東都指揮使司의 건설에 주력하였다. 그러나「정난의 역」 이후 명 성조가 몽고제압정책의 일환으로 여진초무에 적극적으로 나서자, 여진 각 부족은 명의「羈縻」衛所로서 그 지배체제에 차례로 편입되어갔다.

 명 성조의 여진초무는 두 방향으로 전개되었는 바, 하나는 동남방향으로 나아가 압록강·두만강 유역의 여진을 초무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북으로 올라가 海西지구를 거쳐 흑룡강 유역의 여진을 초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여진초무의 결과 조선 태종 3년(1403)에 兀良哈[오랑캐]의 阿哈出(於虛出) 등이 來朝하자 建州衛가 설치되었으며, 忽刺溫의 西陽哈 등이 내조하자 兀者衛가 또한 설치되었다. 최초의 여진위소가 되는 이 두 衛는 그 후 각지에 산재하여 있는 여진을 초무하는 명의 전초기지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후 명은 여진 각 부가 속속 귀부함에 따라 차례로 기미위소를 설치해 나갔다. 그리하여 흑룡강 유역의 여진 각 부까지 초무하여 안정시킬 목적으로 遼東都司와 별도로 奴兒干都司를 설치하는 조선 태종 9년까지 115개의 여진위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명 성조의 사후 명 선종대부터 명의 대외확장정책이 축소 조정되기 시작하고 오이라트의 내침이 잦아지자, 명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게 된 노아간도사의 경영은 결국 명 영종대에 포기되었다.

 여진인의 생업은 수렵과 어로가 중심이었으나 하천을 끼고 있는 평야지대에서는 농경과 목축도 이루어졌다. 당시 여진은 경제생활에서 목축이나 수렵·어로보다 농업생산의 비중이 날로 커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농업생산은 주로 약탈이나 매매에 의하여 획득한 노비들을 사역시키는 노예노동에 의존하고 있었다. 삼림과 하천에서 획득되는 고급모피나 약재·진주 등 사치품은 조공이나 互市를 통해 주로 중국과 교역되었다.

 관문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여진부족이 지리적으로 무역에 유리하여 차츰 세력이 강대해져 부족국가로 성장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開原의 동북방에 있는 鎭北關 밖의 葉赫, 동남방에 있는 廣順關 밖의 哈達 그리고 瀋陽의 동쪽 撫順關 밖의 建州左衛가 바로 그러하다. 그리고 이러한 관문과 오지를 연결하는 교통로의 요지에도 역시 부족국가가 성립되기 쉬운 조건이 마련되어 松花江변의 烏拉, 輝發河의 輝發 등이 흥기하였다. 엽혁·합달·오라·휘발은 해서여진으로서 扈倫 4部로 불리웠으며, 건주좌위의 동쪽 동가강 유역에는 건주위와 건주우위가 있었다. 이리하여 주로 중국과의 교역이 활성화되어 여진사회는 경제적 발전을 이루게 되고, 조선 중기부터는 해서여진의 호륜 4국과 건주여진의 건주 3위에 의한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게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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